그림. 정윤미
생식(省式)①. 그립던 차에 해삼(海參) 차인(差人)이 와서 보내신 편지를 받으니, 얼굴을 마주한 듯이 위로가 됩니다. 여름철이 바야흐로 한창인데, 편지 보내신 후에도 대감께서 관찰사 업무를 보시며 평안하신지요? 더욱 궁금합니다.
저는 식구들이 오지 않아 객관에서 홀로 지내느라, 변경의 수심이 끝이 없습니다. 조정에는 저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없으니, 이 자리를 벗어나 돌아갈 길이 실로 없습니다. 괴롭지만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영원(寧遠)의 비적(匪賊) 사건에 많은 인명이 살해되어, 매우 놀랐습니다. 이 도는 본래 비적에 대한 근심이 없었는데,
작년 겨울과 올봄에 불길처럼 맹렬히 일어났습니다. 지금 소탕하여 잡아 가둔 자가 남북(南北)을 막론하고 40명이나 되는데, 태반이 귀 도의 변두리 백성입니다. 이것은 작은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회이(回移)②의 내용을 상세히 보면 아시겠지만, 각별히 힘써 수색하고 체포하여 후환을 근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므로 알려드립니다.
장교는 머물러있어야 도움이 안 되겠기에 돌려보냅니다. 보내주신 각종 선물은 모두 이곳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입맛을 깨우기에 충분합니다.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여름에 입는 철릭이 없는데, 형이 평안감사로서 어찌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품질 좋은 항라(杭羅, 항주 비단) 40척③을 편의대로 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사이에 왕래하는 인편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구해 놓으면 가져올 것입니다.
본 도의 생산품을 보내고 싶으나, 장교(將校)가 걸어서 가기 때문에 보내지 못합니다. 해삼을 사가는 인편을 기다려 보내겠습니다. 나머지는 이만 줄이니 헤아리시기 바라며, 삼가 답장을 올립니다.
경신년(1740) 5월 초 2일 복제(服弟) 문수(文秀) 올림.
- 원문 -
省式 海參差人之來 得承惠書於馳戀之際 仰慰如對 不審夏令方行 書后台旬候增重 旋切仰溯 弟家眷不來 獨寄客館 關外愁緖 千萬其端 朝無憐者 實無解歸之道 切悶奈何 寧遠賊事 多殺人命 極爲驚心 此道本無賊患 昨冬今春 熾發如火 今方搜蕩而捉囚者 毋論南北 至於四十名之多 太半貴道邊民 此非細憂 詳見回移辭意則可知 各別用力搜捕 絶後患如何 此非細憂 故仰報矣 將校留○* 無益 還送矣 惠來各種 皆非此處所産 足醒脾胃 感謝無已 弟之夏着 天益無之 兄爲西伯 豈不相助耶 好品杭羅四十尺 因便得惠如何 其間必有往來便 得置則 當持來矣 欲送本道所産 而將校步去 故未果
當 海參貿去便 餘姑不備 伏惟台照 謹上謝狀
庚申五月初二日 服弟 文秀 頓
각주
① ‘편지의 격식은 생략합니다.’라는 뜻으로, 편지의 발신자 또는 수신자가 상중에 있을 때 인사말 대신 쓰는 말.
② 타 관아에서 보낸 조회문서〔移文〕에 대한 회답문서.
③ 한 필(疋). 어른 옷 한 벌을 만드는데 드는 옷감.
* 원본 편지에 한자가 뜯겨져 기호처리 했음을 알립니다.
함경감사 박문수(朴文秀, 1691~1756)가 평안감사 민응수(閔應洙, 1684~1750)에게 보낸 답장이다. 편지의 사연을 따라 가보자. 박문수는 민응수의 편지를 해삼 차인을 통하여 받았다. 차인은 관서(官署)에 딸린 심부름꾼을 말한다. 해삼 차인의 임무는 해삼을 사오는 것이었겠지만 다른 심부름도 겸하여 했다. 이 편지의 끝에 박문수가 ‘해삼을 사가는 인편’을 통하여 함경도의 선물을 보내겠다고 했는데, 이 인편 역시 해삼 차인을 말한다. 해삼은 함경도의 종성(鍾城)과 온성(穩城)의 주요 토산물이었다. 해삼 차인이 자주 내왕한 것을 보면, 평안도가 함경도에서 해삼을 많이 사 갔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쉴 새 없이 오고 가는 사신의접대에 썼을 것이다. ‘영원의 비적 사건’이 이 편지의 중심 내용이다. 비적은 무리로 몰려다니며 인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빼앗는 조직적인 강도단을 말한다. 영원현은 평안도와 함경도의 접경인 대동강 상류의 산악지대에 있어서, 비적의 소굴이 되기에 적당했을 것이다. 갑자기 ‘불길처럼 맹렬히 일어난’ 비적을 박문수는 매우 심각하다고 생각하여, 소탕하여 근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박문수가 보낸 ‘회이’에는 비적을 소탕하는 구체적인 방안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제가 여름에 입는 철릭이 없는데, 형이 평안감사로서 어찌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품질 좋은 항라(杭羅) 40척을 편의대로 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부분이 박문수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구걸하면서도 미안해하거나 머뭇거리는 기색이 전혀 없다. 무슨 일이든지, 그는 눈치를 보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임금과 함께 경서를 읽으며 국정을 논하는 경연(經筵)에서도 간혹 골계(滑稽)를 했다고 한다. 적당히 넘어가는 법이 없이 서슴지 않고 직언을 하는 바람에 정승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며, 영조는 그가 죽자마자 영의정에 추증했다. 철릭은 상의와 하의를 따로 마름하여 허리에서 연결시킨 두루마기를 말한다. 주로 군복으로 입었다. 항라는 중국 항주(杭州)에서 생산되던 고급 비단인데, 중국을 오가는 길목에 있었던 평안감사는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기에 이렇게 부탁했을 것이다. 얼마 후 18세기 후반에는 이 항라를 사치품이라고 영조와 정조가 수입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의 능력으로 볼 때 함경감사로 두기에는 아까운 인물이었다. ‘조정에는 저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없으니, 이 자리를 벗어나 돌아갈 길이 실로 없습니다.’고 한 데서도 답답한 본인의 심경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편지를 쓴 다음 달 그는 호조판서에 임명되어 서울로 돌아갔다. 그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영조(英祖) 임금이었다. 박문수의 죽음을 들은 영조의 탄식이 《영조실록》에 나온다.
“아! 영성(靈城, 박문수의 봉호)이 춘방(春坊)에 있을 때부터 나를 섬긴 것이 이제 벌써 33년이다. 예로부터 군신(君臣) 사이에 뜻이 잘 맞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어찌 나와 영성만 함이 있었으랴?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영성이며, 영성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나였다. 그리고 언제나 나라를 위하는 그의 충성이 깊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자신이 가장 아낀 신하가 바로 박문수였다고 영조는 말하고 있다. 박문수! 그를 우리는 불쌍하고 억울한 백성의 원한을 풀어준 암행어사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암행어사의 임무를 띤 적이 없었다. 수없이 읽힌 〈암행어사 박문수〉는 가렴주구에 시달리는 백성의 염원이 만들어낸 설화였던 것이다. 그만큼 그는 백성이 기대고 싶은 인물이었다. 그의 묘표(墓表)에는 다음 글귀가 새겨져 있다.
生則不可奪其志
살았을 때는 그 뜻을 뺏을 수 없었고
死則不可奪其名
죽고 나서는 그 이름을 뺏을 수 없네
함경감사 박문수가 평안감사 민응수에게 보낸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