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일본 공사를 만나 연회에 초청하니, 회답이 ‘26일 학대댁(學大宅) 연회에 초청받아 선약을 하여 올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형편상 연회를 내일 저녁으로 변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 공사관과 각 처 사람들을 연회에 초청하려면 시일이 매우 촉박하여, 몹시 걱정스럽습니다. 반드시 회계과장을 비롯한 상의할 만한 사람을 즉시 불러 모아 기어코 내일 저녁까지 연회에 필요한 물건을 힘써 준비함으로써, 큰 낭패를 면하도록 하세요. 반드시 황급히 단단히 일러 모두 모이게 해야 합니다. 설령 밤을 새우더라도 기필코 노력하여 준비를 갖춘 후, 내일 저녁으로 변경한 초대장을 보내세요. 소홀히 여기지 말고 지체하지 마세요.
즉시, 요하(僚下) 가진(嘉鎭) 올림. 밤 10시.
- 원문 -
今見日公使請宴 回答則於卄六日 因學大宅招宴先約不得來會云 則勢不容不以明夕改定 請宴于日館與各處 而時日甚促 殊可憫也 須卽招集會計課長與可議人 期於以明夕辦備宴需 以免大良貝如何 必急急飛飭來會 雖達夜期圖辦備後 更以明夕發柬如何 勿泛勿遲
卽 僚下 嘉鎭 拜 夜十點
그림. 정윤미
삽화의 태극기는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현재의 태극기를 기준으로 함
김가진이 다급하게 중언부언하며 부하에게 지시하는 편지다. 밤 10시에 편지를 보내며, 밤을 새워서라도 다음 날 저녁까지 일본 공사를 초청하는 연회를 준비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연회는 원래 26일에 열 계획이었는데, 학대댁(學大宅)에 선수를 빼앗겨 버렸다. 그러면 26일 이후에 연회를 열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무리를 해서라도 학대댁보다 먼저 열려는 것을 보면, 일본 공사를 두고 학대댁과 경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편지에 날짜는 없다. 과연 언제 쓴 편지일까? 사연을 단서로 살펴보기로 하자. ‘학대댁(學大宅)’은 ‘학부대신댁(學部大臣宅)’의 준말인 것으로 보인다. ‘학부(學部)’는 1894년 갑오경장 때 예조의 업무를 계승한 학무아문(學務衙門)을 개칭한 것으로, 1895년 4월에 설치되어 1910년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존속하였다. 이 기간 중에 이 편지가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원유회(園遊會)를 열 것을 고시(告示)하다
내각(內閣)에서 다음과 같이 고시했다.
“칙령(勅令)을 내려 원유회를 엶으로써 나라의 오늘의 태평과 청국(淸國)의 종래의 간섭을 끊어버린 것을 축하하게 한다. 장소는 동궐(東闕)의 연경당(演慶堂)이고, 날짜는 이달 14일 오후 2시로 정한다. 각 대신(大臣)의 총대위원장(總代委員長)인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김가진(金嘉鎭)이 연회석을 준비하고, 중앙과 지방의 신사(紳士)와 상인(商人)을 편지로 초대한다.”(1895년 5월 10일)
‘원유회’는 ‘garden party’를 말한다. 여기에도 김가진이 연회를 주관하고 있다. 여기에 이른바 ‘중앙과 지방의 신사(紳士)와 상인(商人)’은 대부분 일본인이었을 것이다.
또 ‘나라의 오늘의 태평과 청국의 종래의 간섭을 끊어버린 것을 축하하게 한다.’고 했는데, 무엇이 축하할 일인지 의문스럽다.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을 겪고, 곧 일어날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을 상황을 ‘오늘의 태평’이라고 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청국의 간섭을 끊어버린 것’ 대신 더 노골적인 일본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아무튼 이 원유회와 비슷한 시기에 이 편지가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무렵 위정척사(衛正斥邪)로 유명한 최익현도 상소에서 김가진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왜놈들을 끼고 궁궐을 에워싸고 임금을 협박했으니,
갑신년(1884년)에 여러 역적들이 하던 술책과 완전히 같습니다. 옛 법을 고쳐 혼란시키고 예의를 무너뜨려 없애는 것은 김옥균이나 박영효도 미처 하지 못한 것인데, 여러 간흉들이 모두 따라 했으니, 김가진(金嘉鎭)·안경수(安壽) ·조희연(趙羲淵)·유길준(兪吉濬) 등의 무리가 그들입니다.
(《면암선생문집권4》 1895년 6월 26일 상소)
김가진의 편지 원문
김가진(金嘉鎭,1846~1922)은 1886년 인천항 서기관(仁川港書記官)을 거쳐 1887년 주차일본참찬관(駐箚日本參贊官)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일본주재 판사대신(辦事大臣)으로 진급하여 1890년까지 4년간 일본에 주재했다. 그 후 1895년 8월 또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되어 일본에 주재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보면, 그는 일본통 외교관으로서 일본을 비롯한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고 그들의 문물을 수입하는 데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 그는 일본에 비협조적이었다는 이유로 1906년에 충남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는 입장을 완전히 바꾸어, 1909년에는 대한자강회를 계승한 대한협회의 회장이 되어 친일단체 일진회를 성토하였다. 1910년에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뒤 수여한 남작(男爵) 작위를 받았다가 곧 반납하고, 이후 대외활동을 하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독립대동단(獨立大同團)을 창설하고 초대 총재로 선출되었다.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으로 활약했다.
그는 글씨를 잘 썼는데, 이 편지도 사연에 걸맞게 강한 필치로 빠르게 써서 자신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또 이 편지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편지를 쓴시간을 기록한 점이다. 편지 끝에 ‘밤 10시〔夜十點〕’라고 쓴 것은 편지에 서양식 시각을 기록한 것으로는 거의 유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당시 서양식 시계의 사용이 상류층에서는 일반적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편지는 역사의 생생한 장면 하나를 짤막하게 기록한 것이다. 이 장면을 통하여 우리는 필자 김가진의 성격을 알 수 있고 그의 입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복잡한 정국 속에서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이 밤낮 벌이는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엿볼 수 있다. 또 근대적인 관료체계가 어느 정도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