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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는 생략하고 말합니다〔省式言〕①. 뜻밖의 나쁜 소식으로 존 중부(尊仲父) 동지부군(同知府君)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는 부음을 듣고, 놀랍고 슬프기 그지없었습니다.
하늘이 장수를 누리게 하여 백세를 9년 남겼으니 실로 세상에 드문 나이이나,
깊이 우러러 의지하고 사모하는 자제의 마음과 친척의 심정은 어찌 그것으로 만족했겠습니까?
4월에 취성(鷲城, 창녕군 영산)에서 이군(李君)이 와서 비로소 듣고, 옛날 모시고 유람하던 즐거움을 추억하며 슬픔을 누를 수 없었던 것은 종친의 정이 깊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공(公)을 남달리 사랑하셨을 것 같은데, 비통함을 어떻게 감당하며 지탱하시는지요?
편지를 부칠 길이 없어 위문편지를 쓰지 못하고 공연히 그리움만 간절하던 차에, 뜻밖에 인편이 와서 삼가 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내용이 매우 정중하고 자상하여
마주 앉아 차분히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 서로 천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만한 감사와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무더위에도 상중에 건강하시며 중씨와 계씨
여러분도 두루 평안하신 것을 편지 읽고 나니, 축하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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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노쇠함이 날로 심하여 묵은 병이 때때로 다시 도지려 하니, 걱정과 괴로움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오래 쌓인 노환을 스스로 생각하면 빨리 죽었어야 마땅한데, 어느덧 이렇게 회갑을 넘길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정말 애초에 생각지도 않은 일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정력이 쇠퇴하고 평소의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허송세월한 후 가난한 오두막에서 하는 탄식’②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책장에 가득한 경서와 역사책은 모두 눈 속의 허상일 뿐, 이렇다 할만한 실제적 공부가 없습니다.
때때로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워 죽고 싶을 지경입니다. 이 마음을 공(公)은 반드시 헤아려 아실 것입니다.
작년에 서울에 간 것은 진실로 뜻밖이었습니다. 19년 만에 다시 도성문을 들어가니③,
촌놈의 천한 발길이 닿는 곳마다 서먹서먹했습니다. 대궐문의 뿌연 먼지〔東華軟紅〕④가
어찌 우리 같은 사람의 발아래 물건이겠습니까? 사직서를 올리고 돌아오니 날듯이 기뻤습니다.
지금 들으니, 영의정이 또 나를 작년에 내가 있던 계방(桂坊, 세자익위사)의 그 자리에 추천했다고 합니다.
이것 또한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입니다. 대저 세상 사람이 실상을 따져보지 않고 헛된 명성에 현혹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저들이 나와 전혀 상관이 없으니, 내가 그런 천거를 싫어하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 자리는 정말 실제로 하는 일이 있어, 병든 폐인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몹시 난처하여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이군(李君)은 재기가 비범하여, 용모와 말하는 것만 보고도 속된 젊은이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혼자 복사(復寺)에 기거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기에, 한 달 전에 제집에 데려와 과거공부를 하게 했더니 금방 날개를 떨치며 높이 날아, 사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 말투와 책을 읽고 시를 읊조리는 소리가 공과 서로 흡사하며, 과연 전에 공에게 배운 적이 있다고 하여, 더욱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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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상중에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의 첫머리에 인사말 대신 쓰는 상투적인 표현.
② 제갈량(諸葛亮)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이는 때와 함께 달려가고 뜻은 세월과 더불어 흘러가 버려, 마침내 노쇠하여 가난한 오두막에서 슬피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했다. 《소학》 권5
③ 1772년 5월 안정복이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익찬(翊贊)에 임명되어 서울에 간 것을 말한다. 그 해 7월 그는 병으로 사직서를 올리고 8월에 귀가했다.
④ 소동파(蘇東坡) 시의 주에 “서호의 풍월이 동화의 뿌연 먼지와 진흙만 못하다.〔西湖風月 不如東華軟紅香土〕”라고 한데서 온 말이다. 동화는 송나라 궁성의 동문 이름이다.
그림. 정윤미
작년 계중(界重) 종친이 왔을 때 문안편지 한 통을 써 부쳐야 했으나, 그때 공사(公私)로 사람을 만나느라 틈을 내지 못하여 끝내 부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마음이 짠합니다. 지금 편지를 보니, 이전에 손 박사(孫博士) 편으로 내게 편지를 부쳤고 올해도 그랬다고 하지만, 모두 받지 못하여 안타깝습니다. 이군이 말하길 ‘지난달 서울에 들어가 손 박사와 여러 밤 함께 자며 내 이야기를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편지 이야기는 없었다.’고 합니다. 정말 의아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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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시당(今是堂)⑤의 행장(行狀)을, 전에 공이 말한 바가 있어 여태껏 기다렸습니다.
지금 또 중간에 분실되었으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묘갈명(墓碣銘)은 이군이 돌아갈 때 부치겠습니다.
내가 전에는 영남의 선현(先賢)에 관하여 익히 안다고 생각했고, 또 듣지 못한 것은 공께 들었는데,
덕암공(德岩公, 李碩慶)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그 행장을 읽어보니,
외재(畏齋, 덕암공의 아우 李厚慶)와 복재(復齋, 덕암공의 아들)의 가학의 연원(淵源)이 과연 그 뿌리가 있습니다.
누가 ‘예천에 근원이 없고, 영지에 뿌리가 없다.’⑥고 하겠습니까? 이군의 뜻이 완강하여 물리치기가 어려워 감히 묘갈명을 썼지만, 곧 주제넘은 짓인 것을 깨달으니 몹시 황송스럽습니다.
신묘년(1771)에 서로 헤어질 때, 공이 말하길 ‘관복을 벗고 나면 달리 얽매일 일이 없어 자유로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므로,
가을에 여기 왕림하여 열흘이나 한 달 쯤 놀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 가을부터 연말까지
목을 빼고 기다렸고, 작년 가을에도 또 그렇게 기다렸습니다. 지금 편지를 보니 그 말은 온데간데없고,
단지 ‘말을 타는 일을 감히 할 수 없다.’고만 합니다. 그러면 이승에서는 다시는 만날 기약이 없을 것이라,
망연자실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과리지혐(瓜李之嫌)’⑦ 네 자는 공의 단점입니다.
‘마음에 무턱대고 옳은 것도 없고 무턱대고 옳지 않은 것도 없이, 오직 도의만을 따라야 합니다.’⑧
오이와 오얏 같은 하찮은 물건은 애초에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모르겠습니다. 공의 생각은 어떤지요?
연전에 덕장(德章)이 상을 당했을 때 즉시 조문편지를 써서 은로씨(殷老氏, 安景說) 편에 부쳤는데,
그 후 인편이 여러 번 있었는데도 답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중간에 분실되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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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책을 좋아하는 성벽이 있는 것을 공이 알고 전날에 《용사기(龍蛇記)》〔임진왜란에 관한 기록〕를 보내주어 이미 깊이 감사한데, 지금 또 이 책 세 권을 보내주었습니다. 이런 것은 사가(私家)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깊은 정성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책을 어루만지며 완상하니, 가슴 벅찬 감탄을 이루 형언하기 어렵습니다.
책장에 붙인 표는 공의 글씨인 것 같은데, 구구절절이 합당합니다. 다만 교정하며 가르침을 받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가슴 가득한 회포는 편지로 다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서글픕니다. 어릴 때 잡기(雜技) 노는 것을 보았는데,
종정도(從政圖)⑨에 ‘주서(住書)로서 벼슬을 그만둔 사람’이라고 쓴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 공이 벼슬아치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는 은퇴하여 초야에서 한가하게 지내니, 후세 사람 중에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을 그만둔 사람’이라고 쓰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껄껄. 이만 줄이고 삼가 편지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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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3년 6월 20일 종말(宗末)⑩ 정복(鼎福) 올림.
여기 함께 보내는 편지들을 각처에 전해주기 바랍니다.
⑤ 이광진(李光軫, 1513~1566). 금시당은 호다. 이때 보내온 금시당의 행장을 보고 안정복이 지은 〈금시당묘갈명〉이 《순암집(順菴集)》에 실려 있다.
⑥ 후한(後漢)의 우번(虞翻)이 아우에게 보낸 편지에 “맏이 용(容)의 신부감을 구해야 되는데, 멀리 지체가 낮은 집에서 구하여 아들만 낳게 하면 충분하다. 귀족이라고 하늘이 복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영지(靈芝)에 뿌리가 없고 예천(醴泉)에 근원이 없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⑦ “외밭에서는 신을 고쳐 매지 않고[瓜田不納履], 오얏나무 밑에서는 관을 바로잡지 않는다.[李下不整冠]”고 한 데서 유래한 말로, 이런 행동은 남에게 의심받기 쉽다는 뜻이다.
⑧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천하의 일에 대하여 무턱대고 따르는 것도 없고 무턱대고 꺼리는 것도 없다. 오직 도의만을 따를 뿐이다.’〔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논어 이인(里仁)》
⑨ 오락의 한 가지. 종이에 벼슬 이름을 품계(品階)와 종별에 따라서 써놓고, 다섯모 난 종정도 알을 굴러 나온 끗수에 따라 말을 쓰는데, 최고는 영의정(領議政)을 거쳐 사궤장(賜几杖)으로 끝나고, 나쁜 것은 파직(罷職)에서 사약(賜藥)으로 끝난다.
⑩ 손아래 종친에게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
편지에도 썼듯이, 그동안 인편이 있을 때마다 보낸 편지가 번번이 중간에 분실되었다. 이제 믿을 만한 인편이 있어, 그동안 쌓아두었던 사연을 하나하나 풀어내어 쓴 답장이다. 사연이 다정다감하고 격조가 있는 편지다.
안정복과 안경점은 광주 안씨로 같은 종족이며, 색목은 남인이다. 나이는 안정복이 열 살 위지만 두 사람은 친구처럼 지냈다. 안정복은 이 편지를 쓰기 바로 전 해에 학문으로 인정받아 세손〔정조임금〕을 모시고 교육하는 세자익위사의 익찬이 되어 벼슬살이를 했지만, 그는 애초에 벼슬에 뜻이 없었다. 안경점은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좌랑까지 지낸인물이지만, 편지 끝에 안정복이 재미있게 썼듯이 그도 어렵사리 딴 문과급제를 팽개치고 ‘초야에서 한가하게’ 지내고 있다. 두 사람을 통하여, 노론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시대의 남인 지식인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편지를 통하여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영남남인에 대한 안정복의 애정과 관심이 깊은 것이다. 편지 중에 ‘내가 전에는 영남의 선현(先賢)에 관하여 익히 안다고 생각했고, 또 듣지 못한 것은 공께 들었으나, 덕암공(德岩公, 李碩慶)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라고 쓴 것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또 이 편지에 나오는 밀양과 창녕 부근의 인물들, 즉 금시당, 덕암공, 외재, 복재, 은로 등에 대한 글을 하나씩 다 쓴 것을 《순암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안정복에게 해주고 그들에 대한 글을 부탁한 사람이 바로 안경점이었다. 말하자면, 안정복은 안경점을 통하여 영남남인들과 교류했던 것이다. 편지에 ‘이승에서는 다시 만날 기약이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언참이라도 되었던 것일까? 두 사람은 그렇게 그리워하면서도 ‘신묘년(1771)’ 이후로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밖에 안정복은 안동의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 대구의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1705 ~ 1786) 등과도 교류했다. 노론 집권기에 근기남인과 영남남인의 교류와 단결을 위하여 노력하는 안정복의 모습을 이 편지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안정복이 안경점에게 보낸 편지 원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