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의 그림 이야기를 읽다 보면 동시대 어느 화가들이 경쟁관계였다거나, 반대로 서로 친밀하게 교류했다거나, 미술 사조를 탄생시켰다거나 하는 등의 이야기를 접하곤 한다. 그러나 김홍도와 신윤복이 서로 긴밀한 교류를 하며 예술을 논했다거나 반대로 경쟁했다는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고, 다만 신윤복의 초기 작품들이 김홍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정도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사실 김홍도와 신윤복은 열세 살 차이가 나는 동시대의 화가들일 뿐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없음이 약간 아쉽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풍속화의 대가로 등장하는 그 둘의 닮은 듯 다름이 더욱 궁금하다.
김홍도 VS 신윤복
김홍도 서당
신윤복 달밤의 밀회
닮은 듯 다른 듯 그림 그리는 두 사람
김홍도와 신윤복은 둘 다 중인 출신이다. 조선시대의 중인들 대다수는 역관(통역, 번역), 운관(책 편찬), 율관(법률), 화원(화가)이었다. 지금은 모두 대우받고 부러움을 사는 직업이지만 그 당시에는 크게 대우받지 못하는 현실이었다. 김홍도는 어린 나이에 당시 내로라하는 평론가이자 시, 글씨, 그림에 두루 뛰어난 문인화가 강세황의 제자로 들어갔다. 강세황의 제자가 된 것이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린 제자 김홍도의 재능과 어진 성품에 매료된 그는 모든 학문과 예술을 두루두루 계승하며, 평생 스승과 제자 이상의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했다.
신윤복 가야금 소리 들으며
신윤복 단오풍정
김홍도가 도화서 화원이 된 것도 강세황의 천거였다. 화원이 된 김홍도는 정조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여러 해 벼슬을 하고, 나라의 행사가 있을 때 기록화를 그리고, 문맹의 백성을 계몽하기 위해 ‘오륜행실’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했다. 또 정조는 김홍도에게 금강산 전경을 그려오는 일과 일본에 가서 대마도 지도를 그려오는 일을 맡기기도 했다. 이처럼 김홍도는 그를 만나는 사람들이 계층과 나이 상관없이 모두 좋아하게 만드는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키가 크고 용모가 훌륭했으며, 악기도 잘 다루고 시, 글씨에 두루 뛰어날 정도로 깊은 학식도 갖추었다.
한편, 신윤복은 할아버지, 삼촌, 아버지 신한평에 이르기까지 도화서 화원 집안이었다. 그의 조상으로는 세조 때 대제학을 지낸 신숙주와 문장가 신말주가 있다. 그 양반가문이 중인이 된 것은 그의 8대조가 서자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신윤복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접했을 그림 그리는 집안분위기와 선대로부터 흐르는 선천적인 기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격적인 그림 주제 때문에 세상은 신윤복의 그림을 인정하지 않았고, 특정 마니아에게만 거래되었을 뿐이다. 지금도 선정적인 작품은 예술이냐 외설이냐 논란이 분분하니, 조선시대 신윤복의 은밀한 소재의 작품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논란의 여지를 준 것은 뻔한 일이다.
김홍도 벼타작
김홍도 씨름
붓끝에서 나오는 활발하고 진솔한 표현
김홍도는 산수화, 풍속화, 인물화, 신선화, 불화에 모두 능했지만 산수화와 풍속화가 특히 칭송 받는다. 산수화에는 서양에서 들어 온 새로운 사조를 과감히 시도, 색채의 짙고 옅은 농담을 이용해 훈염기법 즉 공기원근법을 시도했다. 그가 주로 묘사한 대상은 사회 각층을 망라한 농·상·공의 생활정서였다. 등장인물은 아이와 어른 그 나이도 다양하게 등장하며 모두 활기차고 긍정적인 표정들로 등장한다. 화면 전체구성은 배경을 표현하지 않았으며 인물들 위주로 확대해 묘사하고 있다.
한편, 신윤복의 경우는 남종화풍의 산수화와 영모에 뛰어난 화가였다. 그의 풍속화는 특정 계층의 젊은 인물을 대상으로 조선여인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낸 미인도나 또 기생들과 어울리고 있는 한량 선비 등 남녀 사이의 은밀한 애정관계와 그들의 풍류를 주로 담고 있다. 인물들의 의복 묘사는 화려하고 색 조화가 멋스러워 오늘날 조선시대의 의복연구에도 일조할 정도다. 화면 전체구성은 배경과 인물들이 짜임새 있는 구성을 이룰 만큼 철저하며 그림 전반에 걸쳐 동선이 매우 역동적이다.
김홍도는 살아생전에 인정받아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여유롭게 작품활동을 할 수 있었고, 신윤복은 살아 있는 동안 작품성이 주목받을 사이도 없이 천박하다 하여 어려움이 많았다.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만의 독창적인 작품성을 인정받은 화가로 기록되어 있다. 화가의 평가는 오래 걸린다. 화가가 미술 사조를 바꿀만한 의미 있는 작업을 했느냐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화가들에게 살아가는 시대적 환경은 매우 중요한 그림 요소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정치·경제·사회 전반적인 상황이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김홍도와 신윤복이 살던 시대는 나라의 살림이 정치·경제가 안정적이어서 태평성대였다. 조선시대의 최고의 부흥기로 불리는 영·정조 시대다. 게다가 영조임금과 정조임금은 학문과 예술에 관심이 많아 적극적으로 후원했기 때문에 화가들도 많이 배출되고 다양한 작품들이 이 시대에 창작되었다.
풍속화의 두 대가, 김홍도와 신윤복은 그 시대의 여러 모습을 각각의 시각과 창작기법으로 표현했다. 그들의 가치를 우열로 논하기 이전에 우리나라의 빛나는 화가라는 점은 인정해야 하겠다.
김홍도(金弘道, 1745~?)
조선시대의 화가. 산수화, 인물화, 신선화, 불화, 풍속화에 모두 능했고, 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기법도 서양에서 들어온 새로운 사조를 과감히 시도했는데, 색채의 농담과 명암으로 원근감을 나타낸 훈염기법을사용했다.
신윤복(申潤福, 1758~?)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 3대 풍속화가로 회자된다. 그는 풍속화뿐 아니라 남종화풍의 산수와 영모(翎毛) 등에도 뛰어난 직업화가로서 남녀 사이의 은은한 정을 잘 묘사한 풍속도를 많이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