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연설로 전쟁의 영웅이 되다
처칠이 처음 수상이 되던 1940년, 영국 내각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히틀러와 맞서서 싸울 것인가, 평화협정을 맺을 것인가’였다. 처칠은 전쟁을, 외무장관 출신의 핼리팩스는 협정을 주장했다. 프랑스 덩케르크에서 영국군이 무사히 철수하기 힘들 것이란 전망이 제기되면서, 상황은 처칠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정신을 더욱 가다듬고 우리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우리 제국과 연방을 천 년 더 이어 후세들이 이 순간을 두고 ‘그때가 바로 그들의 최상의 순간이었노라’라고 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처칠의 설득에도 핵심 각료들은 전쟁에 회의적이었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처칠은 25명의 일반 각료들 앞에 섰다.
일러스트 하고고
“만일 제가 단 한 순간이라도 협상을 하거나 항복하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분명히 말하거니와, 여러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저를 이 자리에서 작살내도 좋습니다. 만일 오래된 우리 섬나라의 역사가 종말을 고한다면, 그날은 바로 우리 모두 땅 위에 쓰러져 그 위에 흐르는 우리의 피로 익사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연설이 아니다. 조국에 대한 그의 사랑이 담긴 뜨거운 러브레터였다. 일반 각료들은 애국심으로 복받쳐 올랐고, 여론은 급속히 처칠에게로 기울었다. 지금까지도 최고라고 손꼽히는 불멸의 연설 앞에 핼리팩스도 더 이상 반대의견을 내기 어려워졌다.
“설령 유럽의 대다수 지역과 많은 선진국이 게슈타포와 그 혐오스런 나치 통치 조직에 넘어가더라도 우리는 낙담하지도, 좌절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해낼 것입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 것이고, 바다와 대양에서 싸울 것이며, 하늘에서 싸울 것이고, 우리 섬나라를 지켜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안에서 싸울 것이고, 상륙 지점에서도 싸울 것이며, 들판에서, 거리에서, 언덕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몇몇 의원들은 눈물을 흘렸다. 이 연설은 영국 국민들을 향해 쓴 애국심과 자긍심을 불태우는 편지였고,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 연합군의 승리였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쓴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문은 겉치레로 가득한 코미디 대본 같다.
전쟁을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12월 7일 저녁에 황제 폐하께서 … 일본 병력이 사전 경고도 없이 말레이시아 연안에 상륙하려 했고 싱가포르와 홍콩을 폭격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셨습니다. 황제께서는 영국 안에 황제가 주도하는 행정부의 이름으로 두 국가(영국-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임을 도쿄 주재 영국 대사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 정부 귀하에게 통보할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저는 충분한 고려 끝에 기꺼이 그 지시를 따를 것이라 알려 드리는 바입니다.”
심금을 울리는 연설의 주인공이 쓴 것치고는 황당할 정도로 흐리멍덩한 글이다. 말과 글의 불일치처럼, 그는 히틀러로부터 조국을 지킨 영웅이었지만 동시에 인도를 비롯한 식민지를 잃게 했고 대영제국을 몰락시킨 원인 제공자이기도 했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자기다움을 내세웠고, 때론 파렴치할 정도로 뻔뻔한 말도 서슴없이 했으며, 새벽까지 열정적으로 일하면서 직원들은 잠을 재우지 않을 정도로 가혹하게 대했던 처칠이 ‘지킬 앤 하이드’처럼 행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처럼 유명해지고 싶다
“여기 사람 모두 아버지의 사인을 받고 싶어하는데 여러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도록 몇 개 써서 보내 주시겠습니까?” 어린 처칠은 귀족의 후손으로 정치인이 된 아버지가 자랑스러웠고, 아버지처럼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속내를 23세에 참전한 전쟁터에서 놀랄 만큼 솔직하게 어머니에게 전한다. 부상당한 병사를 안전한 곳으로 옮겼지만 누구도 알아봐주지 않았다며, “관객만 있다면 그 어떤 무모한 행동이나숭고한 행동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관객이 없다면 다릅니다 (…) 만일 제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인가를 하기로 결정한다면 어머니도 이를 널리 알려야 할 것이고, 제가 행할 비범한 일들을 지지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제 이름을 떨치려고 애썼고, 전쟁터가 그에게는 최적의 장소였다. 적에 생포되었다가(함께 탈옥하기로 한 동료를 남겨두고 혼자) 탈출한 자신의 이야기를 언론에 보냈고, 그렇게 얻은 명성을 밑천 삼아 정치에 입문했다. 30대 초반에 자서전을 발표할 정도로 자신만만했지만, 사실 그는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컸기 때문에 유명해지려고 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즉 과도한 명예욕은 부성 콤플렉스 탓이었다.
좋은 아버지와 울보 남편
“지금도 우리의 사랑스러운 막둥이를 잃던 때의 슬픈 장면들이눈앞을 스쳐 지나간다오. 불쌍한 아가, 그때의 일은 마치누군가가 건드리거나 일상이라는 반창고가 떨어지면 어김없이 아파오는 벌어진 상처와 같다오.”
세 살도 안 된 딸이 뇌수막염으로 죽고 몇 달 뒤, 처칠이 아내에게 쓴 편지다. 그는 어린 아이들과 모래성 쌓기나 고릴라쫓기 놀이를 했고, 침대에서 <보물섬> 등을 읽어주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자식들이 성장한 후에도 처칠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받지 못했던 온정을 베풀었다. 그가 쓴 편지의 가장 많은 부분은 가족의 활동과 건강에 관한 것일 정도로 그는 가정적인 아버지였고, 그의 모든 자녀들은 아버지를 존경하는 내용의 책을 썼다. 특히 처칠의 전쟁 회고록이 비판받을 때 딸 사라는 “아버지는 최고의 역사가, 최고의 언론가, 최고의 시인이십니다. 아버지가 쓴 이 책은 당신의 심장과 모든 지식에서 나온 것이니만큼, 스스로 일어서거나 쓰러지게 놓아두세요. 하지만 결국은 일어설 것입니다.” 라며 옹호했다. 좋은 아버지 처칠은 좋은 남편이었을까? 두 역할을 모두 훌륭하게 해내는 유명인은 극히 드물다. 큰 권력을 가진 남자는 많은 여자들과의 쾌락을 탐닉하느라 나쁜 남편이 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처칠은 10살 연하의 클레멘타인과 만난 지 5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렸고, 5명의 아이를 낳아 50년을 서로에게 헌신하며 함께 살았다. 1차 세계대전 중에 처칠은 프랑스 전선에서 복무했는데, 젊은 아내는 남편에게 다음에는 꼭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며, 언젠가는 사랑이 식어 편안한 우정만 남지 않겠냐며 애틋한 편지를 보냈고, 처칠의 답장은 더없이 달콤했다.
“나의 사랑, 내게 ‘우정’이란 단어를 쓰지 마시오. 난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당신을 더욱 사랑하고 있고 당신과 당신의 아름다움을 갈망하고 있다오. 내 소중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여, 차라리 다른 세계나 환경에 태어나 당신을 새롭게 만나서 내 모든 사랑과 위대한 로맨스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하오.”
오해를 통해 이해는 깊어진다
“내 상냥한 고양이에게. 당신을 떠올릴 때마다 키스를 보내오. 당신 심장 박동 소리는 종종 내 안에서도 느낄 수 있는 듯하오. 신께서 보살피시어 당신이 안전하고 건강하기를. 나 대신 우리 새끼 고양이들에게도 키스를 전해주오. 내 소중한 사랑을 담아 – W.”
불굴의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정치인으로만 알려진 처칠. 편지를 통해 그는 언제나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과 탐욕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종종 눈물을 보이기도 하던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호전적인 것으로 유명한 정치가가 모순되다 싶을 정도로 세속의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지녔다고 생각하니, 그가 더욱 위대해 보인다. 윈스턴 처칠의 편지는 그의 가장 진솔한 모습을 그려낸 자화상이 아닐까.
오늘의 편지이야기
여보! 사랑해요
2017 대한민국 편지쓰기 공모전
대학·일반부 <장려상> 이미선
뒤척이다 잠이 깨 일어나 앉았습니다. 옆에서 자는 당신을 무심코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깊이 패여 있는 갈매기 모양의 주름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세 마리가 줄지어 날아가는 듯 뚜렷하게 보입니다. 얼굴에서 지나간 당신의 세월이 느껴집니다. 또한 투박한 손이 당신의 삶을 대변해주는 듯 했습니다.
20여 년 전 나는 당신을 만나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죠. 그러나 삶이 평탄치만은 않았지요. 경제적으로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지요. 흔히 사람들은 아이를 키우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지적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며 참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세상의 벽도 실감했지요. 그럴 때마다 나는 눈물로 이야기를 대신했습니다. 그렇게 견디며 늘 힘들다고 투정을 부려도 당신은 무던히 받아주었지요.
한때는 당신이 아이의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와 아이를 힘들게 할 때마다 원망도 하고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 적도 있어요. 이제야 고백하는데 당신이 욱한 마음에 아이를 함부로 대하거나 때릴 때에는 정말로 막다른 생각도 한 적이 있답니다. 그러다가 티 없이 해맑게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졌답니다. 그때는 ‘당신도 아프겠구나’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고, 이해를 못 하는 당신이 원망스럽기만 했어요. 그런데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어쩜 나는 당신의 아픔을 외면해버렸는지도 모르겠어요. 내 아픔이 더 크게 보여 당신을 제대로 들여다볼 생각조차 못한 거죠.
내가 건강하게 낳아주지 못해 아이가 아픈 것 같아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았던 지난 세월, 그래도 당신은 나를 원망하지 않더군요. 그것만으로도 고마웠어요.
어느 날 당신이 나에게 아이에 대해 너무 몰랐다며 자기반성을 하는데 그제야 내가 조금씩 숨이 쉬어지더라고요. 그렇게 지금도 아이의 현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는 당신, 노력해가는 당신을 보며 요즘은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간답니다.
여보! 우리 지금처럼만 하면 언젠가는 마음속까지 밝게 웃는 날이 있겠지요. 앞으로는 당신 자신도 돌아보며 건강도 챙기고 즐겁게 살아가 봅시다. 우리 집의 대들보요 기둥인 당신 힘내요. 내 인생의 반쪽인 당신이 있어 든든해요. 평소에 자주 하지 못한 말, 서신을 통해 전합니다. “여보! 진심으로 사랑해요.”
- 당신의 아내 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