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혁명 시대에
소통의 의미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이 일상화되고, 전 국민의 90퍼센트 가까운 인구가 스마트폰을 이용하게 된 이 놀라운 통신혁명의 시대에, 소통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일까. 이제 소통은 예전보다 다채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을 비롯한 다양한 통신 방법을 이용해 일대일 소통뿐 아니라 다자간 소통을 하게 되었으며, 즉석에서 안건을 투표로 붙이기도 하고, 여러 개의 채팅방을 만들어 한꺼번에 대화를 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뛰어넘는 ‘인간과 기계 사이의 소통’이 가능해졌다. 사람들은 시력과 체력만 허락한다면, 하루 종일 ‘스몸비(스마트폰 좀비의 줄임말로, 스마트폰에 온종일 집중한 채 외부 세계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을 일컫는다)’가 되어 ‘휴대폰과의 의사소통’에 집중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온라인 게임은 젊은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노년층에게도 인기를 끌게 되었고, 이제 전화를 ‘통화용’으로만 쓰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카메라 시장이 스마트폰의 괄목할 만한 발전으로 위축될 지경이라 하니, 휴대폰은 남녀노소를 위한 멀티미디어가 된 것이다. 휴대전화는 현대인에게 카메라이자 계산기이자 알람이자, 뉴스나 전자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자, 온갖 희로애락이 흘러넘치는 엔터테인먼트 미디어가 되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
마치 블랙홀처럼 스마트폰이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다 한 곳으로 빨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편지나 일기 같은 과거의 소통 행위는 옛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아를 불러일으키면서 전보다 더 간절한 의미를 띠게 되었다. 누군가가 ‘손편지’를 직접 써서 마음을 전하면, 사람들은 일단 문자메시지나 이메일보다는 훨씬 진지하고 심각한 마음으로 글을 읽게 된다. ‘이건 문자메시지나 카카오톡으로 쉽게 전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구나’하는 느낌을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바로 손편지의 마력이다. 또한 컴퓨터나 모바일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어 손글씨를 쓸 일이 거의 없어지다 보니 ‘손글씨’에 대한 향수도 또 하나의 문화상품이 되었다. 캘리그라피를 배우는 데 열정을 느끼는 사람들, 예쁜 노트나 DIY식으로 만든 수첩에 손글씨로 일기나 편지를 쓰는 사람들, 어른들이 ‘컬러링북’에열광하는 것은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시대의 아날로그적 반작용이다. 사람들은 휴대폰을 일상적으로 쓰면서도, 동시에 ‘휴대폰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 손으로 펜이나 종이의 촉감과 온도, 질감을 느낄 수 있는 아날로그적 소통 행위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시대에
우리는
우리나라 정보통신의 역사는 1884년 고종이 신식 우편기관인 우정총국을 설치하라는 전교를 내린 날을 기준으로 했을 때, 아직 150년이 채 되지 않았다. 봉화로 소식을 전달하고, 편지를 전하기 위해서는 몇 날 며칠을 걸어야 했던 시간까지 합치면 훨씬 오랜 기간을 통신의 역사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가 겪은 모바일 통신 혁명이 지난 수백 년간 겪어온 통신의 진화보다 훨씬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사람들은 ‘미디어가 실어나르는 메시지’를 좀 더 효과적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이해하고 분석하고 싶어 한다. 독서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고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사실 ‘문자로 된 텍스트’를 읽는 분량은 예전보다 더 많아졌다고도 볼 수 있다. 심지어 현대인은 문자메시지나 이메일,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예전보다 훨씬 많이 ‘글을 쓰게’ 되었다. 종이로 된 책을 읽는 인구는 줄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글’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통로는 훨씬 넓고 다양해진 셈이다.
그리하여 이 놀라운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시대에, 사람들은 더욱 ‘글을 잘 쓰는 능력’을 동경하게 되었다. 대중 강연에 나설 때마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사람들은 굳이 작가가 되거나 책을 내지 않더라도,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등의 1인 미디어를 통해 자기 자신을 좀 더 멋지게 드러내고 싶어 한다. 전화나 편지로 소식을 전하던 과거의 1대 1 커뮤니케이션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얼굴을 알지 못하는 불특정 다수에게 ‘나만의 개성 있는 이야기’를 방송처럼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시대에 오히려 글쓰기는 ‘자기표현의 미디어’로서 각광받게 된 것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1인 미디어에 너무 공을 들인 나머지 정작 곁에 있는 사람들과 직접 대화하는 일에는 소홀한 경우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연인과 함께할 때도 각자의 휴대폰을 통해 제각각 오락을 즐기는 사람들, 가족끼리 외식에 나와서도 저마다 전화기에 집중한 채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는 사람들, 중요한 회의나 수업에서도 자꾸만 휴대전화로 눈을 돌리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점점 더 ‘사람의 눈을 맞추며 대화하는 가장 근원적인 소통’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휴대전화도 좋고, 컴퓨터도 좋지만, 때로는 그 모든 것이 없어도 우리는 충분히 아름다운 의사소통이 가능한 존재들이라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진정한 소통의 울림
진정한 소통은 ‘메시지의 내용’을 뛰어넘는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문장을 아무리 반복해도 그 애절한 마음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을 때가 있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아도 오직 사소한 몸짓이나 잠깐의 눈빛만으로도 모든 것을 다 이해하는 관계가 있다. 소통은 언어를 통해 주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때로 결정적인 소통은 언어를 넘어선 자리에서 성립되기도 한다. 아무 말을 하지 못하는 갓난아기와 오늘 처음 얼굴을 마주한 엄마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단 한 번의 간절한 소통을 경험하는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더 깊고 간절한 이야기들, 쉽게 기계의 힘을 빌려 소통하지 못하는 것들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작가 리베카 솔닛은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에서 ‘책’이란 그저 사물이 아니라 그 책이 지닌 가능성 전체, 음악의 악보나 씨앗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누군가 정성 들여 읽어주어야만 비로소 이 세상에 제대로 존재할 수 있는 책처럼, 우리의 소통 또한 휴대폰이나 컴퓨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우리의 가슴 속’에 존재한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로는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 때는 상대방의 눈을 보자. 눈빛, 손짓, 발짓, 몸짓. 상대방은 온몸을 통해 당신에게 이미 말을 걸고 있다. 미디어가 ‘시각’이나 ‘언어’ 같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덜 의존할수록, 누군가의 절실한 메시지는 더욱 깊고 커다란 울림으로 우리 마음속에 울려 퍼진다.
작가소개 정여울 작가
소통하는 인간의 심리를 다루는 글을 쓰고 강의를 한다. 저서로는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공부할 권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