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 선생과 서영은 님
연애 수단을 뛰어넘는 문학적 가치
아닌 게 아니라 우리나라 옛 선비들의 다양한 문집류를 보면 그 역시나 상당 부분이 서간체 형식으로 된 문장이었다. 현존하는 한문 서간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동문선》에 수록된 신라의 녹진이 쓴 <상각간김충공서>한 편과 그 유명한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쓴 <답절서주사공사[答浙西周司空書]> 등 32편이 있다. 그 중 <답절서주사공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적 특성을 보이는 최초의 서신, 다시 말해 연애편지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비록 연애편지 형식이긴 하나 이 서신은 연애를 위한 수단을 넘어 문학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는데, 괴테의 대표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톱스타 배용준이 나와서 한 때 화제를 모았던 영화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의 원작인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객> 등이 연애편지 형식을 빌린 대표적인 고전소설들이다.
이토록 오래전부터 문학의 장르로 자리를 굳힐 만큼 후한 대접을 받아 왔던 연애편지! 그럼 시각을 달리해서 작가들이 직접 쓴 연애편지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될까?
한국 유명 작가들의 연애편지
서구에서는 진즉부터 작가의 연애편지가 문학의 한 장르로 구실을 해오고 있지만 아쉽게 도 한국 사회에서는 어둠 저편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스캔들이나 관음증 차원의 기피 문서 내지는 기피 문학으로 치부돼 온 것이다.
그러던 것이 몇 해 전, 한국 유명 작가들의 연애편지가 책으로 발간되면서 그나마 작가들의 연애편지는 이제 비로소 문학으로서의 존재를 희미하게나마 알리게 된 셈이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녀도> <역마> <바위> <사반의 십자가> 등 한국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고(故) 김동리 선생. 선생은 경북 경주 출신으로 우리의 시적 감수성을 한껏 일깨운 시인 박목월 님의 고향 선배이자 문단 3년 선배이기도 하다. 경주의 불국사 앞「김동리∙박목월 문학관」에 가면 김동리 선생의 무녀와 등신불을 볼 수 있고, 박목월 님의 시를 접할 수가 있는데, 이왕 경주를 들른 김에 학창 시절 한 올 한 올 바느질을 엮듯이 눈을 감고 외웠던 그 시 한 수의 흥취에 잠시 젖어봄도 좋을 듯싶다.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길 /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
점으로 변해서 홀홀히 사라지는 나그네의 마음을 여백으로 남겨둔 채 다시 김동리 선생의 얘기를
풀어보자.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선생은 자신보다 한참 연하인 고운 임 서영은과 애틋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 <안쪽으로의 여행> <그녀의 여자> <꿈길에서 꿈길로> 등을 집필한 소설가 서영은.
선생은 나이 차이에서 오는 조바심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도 사랑해서 잠시라도 곁에 없으면 불안해서 그랬을까? 항상 그녀가 옆에 있어야 안심을 했다는데, 때로는 그녀가 다른 남자를 사귀고 있다고 오해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랑은 질투를 동반한다’라는 말이 실감나는 사랑을 한 셈이다.
“20년 동안 연애했고, 4년간 같이 살았고, 5년간의 투병을 함께했다. 선생과 함께 한 그 오랜 30년 세월 동안 유일하게 선생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언젠가 서영은 님이 고백한 연애편지 사건 대목이다. 사연인즉슨 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겨울, 서영은 님의 대문 앞 눈 속에 선생의 편지가 들어있었던 것인데 다름 아닌 연애편지였다. 그 편지에 나오는 한 대목을 보자.
“오늘도 영을 생각했다. 그리움에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
아마 서영은의‘영’을 애칭으로 불렀던 것 같다. 이 한 줄에서 알 수 있듯이 선생은 평소에도 항상 서영은 님을 사랑했으며 혹여 그 사랑이 날아갈까 깨질새라 노심초사하는—사랑하면서 행복하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가슴이 에이는 고통 역시 무척 컸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리고 그 편지에는 플라타너스 잎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유치할 수도 있지만 플라토닉 러브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진다.
선생께서 그토록 오매불망 사랑했던 여인 서영은! 그럼 서영은 님의 선생에 대한 사랑은 어떤 크기였을까? 이 편지와 관련해 그녀는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당시 나는 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일 관계상 남성 작가들을 많이 만났다. 그러다 보니 선생께서 질투를 많이 하셨지만 나는 이조시대 여자였다.”
사랑과 정절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이조시대 여자였다는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몇 해 전 이순을 넘긴 서영은 님이 문우 김지원 님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마음의 눈이 귀신을 닮아가서, 누가 척하면 속아 넘어가기는커녕 다시 속아 넘어가는 척을 하니, 어느 때는 그 노회함이 지긋지긋해진다오. 사랑을 해보고 싶어도 자신에게서나 상대에게서나 그런 척이 빤히 들여다보이니 무슨 수로 그 젖은 장작더미에 불을 지필 수 있으리오.”
나이가 들어감에 따른, 사랑의 허망함과 공허함을 마치 독백처럼 쓸쓸하게 내뱉은 심정을 엿볼 수 있다. 그러기에 사랑은 젊은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요 전유물이라는 말이 새삼 피부에 와 닿는 듯싶기도 하다.
김동리 선생께서 서영은 님에게 보낸 연애편지에는 또 이런 글이 등장한다.
“영! 하루에도 열 번씩 너를 생각 한다.”
얼마나 그 사랑의 크기가 넓고 깊으면 하루에 열 번씩이나 생각을 하는 걸까?
아니 서영은 님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부족하지는 않았을까? 언젠가 유행을 탔던 이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
모름지기 사랑은 이런 것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생각하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지는 법인 것이다. 하늘나라에 계신 선생께서는 어제도 또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서영은 님을 그리면서 이렇게 읊고 계시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오늘도 영을 생각했다. 그리움에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 영, 하루에도 열 번 씩 너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