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의 플라토닉 러브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시인 박인환의《목마와 숙녀》에 등장해서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버지니아 울프. 영국의 여류작가 울프는 스물다섯 살에 첫 작품인 <출항>을 통해 문단에 이름을 올린다. 이어 <밤과 낮> <제이콥의 방>이 발표되면서 차츰 그 명성이 빛나기 시작한다.
문학사에서 울프는 흔히 제임스 조이스와 더불어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서술 기법을 발전
시킨 20세기 초의 실험적 작가로 손꼽힌다. 또한 1929년에 집필한 <자기만의 방>이란 작품은 왜 여성이 작가가 되기란 그토록 어려운 것인가를 역사적, 사회적으로 규명한 에세이집으로 출간 당시부터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작품의 주제는 다음의 글에서 명백하게 엿볼 수 있다. '우리가모두1년에5백파운드를 벌고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만 있다면…' 이렇게 표현되는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자유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여성들의 공감대를 얻고 있으며, 바로 이것이 1960년대 말 이후로 페미니즘의 지침서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버지니아 울프 하면 곧잘 우울증과 정신질환으로 대변되는데, 이는 불행했던 가족사에 기인한다. 그녀는 학자이자 비평가인 아버지와 활동적인 어머니를 두었는데, 두 사람 모두 재혼이었다. 각각 딸과 2남1녀의 자녀를 두고 재혼한 부부는 다시 2남2녀를 낳았고, 그 중 셋째가 울프였다.
울프는 자기 생애의 첫 비극은 여섯 살 때부터 시작됐다고 밝히곤 했었는데, 그 비극은 그녀를 평생 옭아맨 무서운 형벌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섯 살 때, 큰 의붓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훗날 그녀는 이렇게 회고하면서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때부터 저는 몸에 대한 혐오감과 수치심을 갖고 말았습니다. 나아가 남녀 간의 성적인 문제라면 무조건 배격하는 마음이 자물쇠처럼 단단히 채워지고 말았지요.' 이 일을 계기로 울프는 말이 없는 소녀 시절을 거쳐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정신과 치료를 받기에 이른다. 당시 그녀는 사람들, 특히 남성과 얼굴을 마주치는 것이 못내 두려웠다. 해서 그녀는 현실 도피의 한 방법으로 집에서만 지내게 되는 일이 많았다. 그때 집에 있던 수많은 책 속에 파묻혀 지냈고 결국 그것이 작가가 되는 토양이 되는 역할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어릴 적의 충격으로 영원히 결혼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울프였지만 단 한 명의 남자 레너드 울프에게만은 마음이 끌렸다. 레너드는 한결같이 변함없는 눈길로, 마음으로 그녀 곁을 지키면서 사랑을 심어 주었다. 버지니아로서는 심히 괴로운 입장이었다. 자신을 이토록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남자가 고마웠지만 그와의 사랑을 지속할 수가, 더더욱 결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버지니아는 수많은 날들을 번민 속에 보내야 했다. 그런 어느 날, 레너드는 울프에게 청혼을 하기에 이르고, 며칠간의 고민 끝에 울프는 레너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레너드! 나를 사랑해 주고 청혼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저도 사랑하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요. 대신에 저와 결혼하기 위해선 두 가지를 약속해 주세요.”
“두 가지뿐만 아니라 백가지 천가지라도 내 꼭 약속을 지키겠소. 무엇인지 말해 보오.”
“하나는 저와 잠자리를 하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제가 작가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당신의 일을 포기해 달라는 것이에요. 레너드 역시 어려운 일이겠죠? ”
건강한 육체를 소유한 레너드에게 결혼해서도 육체관계를 가져선 안 되고, 공무원직을 버리라고 한 것이다. 보통 남정네들 같으면 상당한 고민의 흔적을 보여야 될 일이건만 레너드는 뜸도들이지 않고 바로 오케이를 한다.
“오, 버지니아! 당신과 결혼만 한다면야 어찌 그 두 가지 약속을 지키지 못 하리까. 걱정마시오. 꼭 지키리라.”
이렇게 두 사람은 부부의 인연을 맺고 레너드는 약속대로 자기 일을 포기하고 묵묵히 아내를 위해 무조건적인 헌신과 봉사로 외조에 최선을 다한다. 사실 혈기왕성한 남성으로서 결혼을했으면서도 육체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큰 불행이자 아픔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사회적인 지위, 명예도 헌신짝 버리듯이 내던진다는 문제 역시 결코 쉽지 않은 일일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난제를 레너드는 약속했으며 또한 이를 충실히 이행했다. 레너드는 약속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아내가 작품 활동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출판사를 운영해 정신적, 경제적으로 그녀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묵묵히 그녀를 위한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한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지고지순한 사랑도 영원하지 않다고 했던가? 에로스가 아닌 플라토닉으로 철갑처럼 튼튼하게 무장된 이들의 사랑에도 점차 희뿌연 안개가 끼기 시작하고 말았으니,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빌미가 된 것이었다. 독일군의 침공은 유태인인 레너드에게 커다란 위협이었으며, 갈수록 치열해진 전쟁은시골집으로 피신해 있는 버지니아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하기에이른 것이다. 남편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한동안 잊었던 정신질환이 급속도로 재발되면서 그녀는 자신의 생이 곧 끝나가고 있음을예감한것이다.
그녀는 자살하기 직전, 남편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겼는데, 그러니까 이 편지는 연서인 동시에 애틋함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서 띄운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의 연서이기도 하다.
'레너드 울프! 흐르는 저 강물을 바라보며 당신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봅니다. 저 버지니아는 당신과 결혼하면서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을한 번도 후회해 본 을 것이라면서 험담을 하겠지요. 이 유서는당신이 엉뚱한 구설수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기도합니다. …(중략) …
레너드 울프! 당신이 청혼했을 때, 제가 두가지를 요구했고 당신은 고맙게도 저와의 약속을 훌륭하게 지켰습니다. 레너드, 참으로 고맙습니다. 저는지난 30년 동안 남성중심의 이 사회와 오로지 글로써 부단히 싸웠습니다. 유럽이 세계2차대전으로 빨려들 때, 모든 남성이 전쟁을 옹호하였고, 안타깝게도 당신마저 참전론자가 돼 있었습니다. 저는 생명을 잉태해 본 적은 없지만 모성적 자애로움으로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지금 온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파묻혀 있습니다. 제 작가로서의 역할은 여기서중단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1941년 자살하기까지 소설 9편과 평론, 희곡, 에세이를 남긴영국의 여류작가 버지니아 울프. 그녀가 바라본 흐르는 강물은 템즈강이었다. 그녀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이슬을 머금은 촉촉한 초원을 가로질러서 강으로 나간 다음, 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넣었고 그리고는 강물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다.
에로스가 개입되지 않은 오직 플라토닉만으로 부부의 사랑을 쌓아 올린 레너드와 버지니아. 이들부부의 사랑이야말로 금세기 최고의 플라토닉 러브의 전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