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느 보봐르의 거침없는 사랑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이자 지적이고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였던 시몬느 보봐르.
곧잘‘현대여성운동의 대모’라 불리게 된 것은 그녀가 1949년에 발표한 <제2의 성>이란 책을 통해서다. 이 책에서 그녀는 여성의 열등함이란 오랜 세월 동안 남성의 지배 체제가 만들어낸 허상임을 토로한 것이다. 그 결과 거대한 남성 중심 세계에 경종을 울리는 효과를 가져왔는데, 그녀의 페미니즘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해 주는 대표적인 예라면 그 유명한 이말이아닐까?“ 여성은태어나는것이아니라만들어지는것이다.”
보봐르 하면 무엇보다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으로 유명하다. 그들의 사랑은 사르트르가 25세, 보봐르가 22세 때 바야흐로 계약결혼으로 절정을 치닫는다. 사르트르의 제안에 따라 2년간의 기간을 둔 이 계약결혼은 서면으로는 존재하지 않은 구두상의 합의였을 뿐이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으며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한다는, 당시로서는 세간의 이목을 단번에 집중시켜 버린 파격적인 계약결혼이었다.
이 결혼의 또 하나 흥미를 끄는 점이라면 서로에게 타인을 사랑할 자유를 주되 모든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조항이다. 보봐르는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으로 맺어진 유부녀였지만 그녀는 또 다른 일탈의 사랑을 보란 듯이 행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상대는 연하에다가 계약상이나마 남편인 사르트르의 제자였던 것이다. 그녀는 보스트란 이름의 당시 파리 대학생이 었던 젊은 연인에게 이런 편지를 띄우기도 했었다.
“내 사랑 보스트. 당신은 내게 편지를 보냈어요. 나는 당신의 감정을 강하게 느낀답니다. 내일 만나요. 안녕, 내 사랑.”
보봐르는 이런 사실을 계약 조항에 따라 하나도 숨기지 않고 편지를 통해 사르트르에게 털어 놓는다. 당시 이런 내용을 알게 된 사르트르의 심사는 어땠을까? 아무리 사랑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다 했어도 결코 편할 리만은 없었지 않았나 싶다. 아니면 그 시기엔 사르트르에게도 다른 여성이 있어서 그냥 무덤덤하게 여겨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계약 기간을 넘기고도 그들의 계약결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상태로 이어졌다. 이후 실존주의가 세계를 풍미하던 1947년, 보봐르는 사르트르와 함께 미국으로 강연 여행을 떠난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9세였고, 이 여행에서 그녀는 평생에 한두 번 필이 꽂히는 강렬한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 만다. 미국 시카고에서 미국인 소설가 넬슨 앨그렌을 만나 말 그대로 첫 눈에 반해 버리는 운명 같은 사랑을 경험해 버린 것이다. 그에게 매혹당한 보봐르는 이렇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다시는 오지 않을 줄 알았던 사랑의 모험과 은밀한 유혹의 시선, 나는 당신의 포로예요.”
앨그렌이 1949년 퓰리처상을 수상하기 2년 전에 만난 이들의 사랑은, 아니 정확하게 말해 앨그렌을 향한 보봐르의 불타는 사랑은 만난 지 석 달 만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낼 정도에 이른다.
“앨그렌, 비행기의 둥근 창에 이마를 대고 푸른 바다 위에서 한참을 울었답니다. 그러나 부드러운 눈물, 우리 사랑의 눈물이었어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계약상에서나마 엄연히 존재하는 남편 사르트르와 같이 여행을 하는 중에이렇듯 뜨거운 사랑을 분출시킨 보봐르. 그녀가 미국 여행에서 귀국했을 때, 그녀의 손가락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당연히 앨그렌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징표였다. 평소 반지 끼는 여성을 무척 싫어했던 그녀가 반지를 끼었다는 것은 그녀의 친구들에게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앨그렌을 향한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날부터 앨그렌에게 사랑의 연서를 수도 없이 띄우기 시작하는데, 그녀가 쓴 편지의 몇 대목을 살펴보자.
“1947년 6월 25일. 사랑하는 넬슨, 당신이 저에 대해서 마음이 불편하다는 건 견딜 없는 일일 거예요. 행여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제게 말을 해주세요.”
“1947년8월13일. 앨그렌, 당신은 저에게 이런말을 했었지요‘. 보봐르, 우리는 더 많은 걸 공유하게 될것이며 결혼한 사람들보다 더 많이 사랑할 것이오.’맞아요. 앨그렌, 앞으로도 우리 서로 더 많은 사랑을 나누도록 해요.” “1947년 10월 30일. 편지 한 통을 부치고 나면 그 즉시 저는 너무나 박탐감을 느껴서 또 한 통을 쓰지 않으면 안돼요. 사랑해요, 앨그렌. 내일 또 편지를 보낼게요.”
“1947년 12월 16일. 사랑해요, 내 사랑. 저는 여든 살까지 살려 했으나 당신이 일흔 일곱 살에 사망할 것이므로 전 당신의 팔 안에서 78세에 죽고 싶어요.”
이렇게 해서 1947년부터 1964년까지 그녀가 앨그렌에게 띄운 세기적 연애편지는 무려 304통! 일상적 사랑을 꿈꾸는 내용과 함께 당시의 사회상 등도 포함돼 있지만 다음과 같은 직설적이고도 어찌 보면 섬뜩하기까지 할 정도의 내용이 담긴 편지도 있다. 좋게 해석하면 한 남자를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일 수 있지만, 한편으론 광적인 집착성 같은 사랑을 거침없이 펼친 시몬느 보봐르.
그럼 보봐르와 사르트르의 사랑은 어떻게 됐을까? 17년간 지속되던 이들의 계약결혼은 1964년 보봐르가 회고록 <사물의 힘>에서 앨그렌과의 사랑을 공개한 뒤에 파국을 맞고 만다. 결국 그들의 사랑은 완전한 자유가 아닌 구속이었던 셈이라고나 할까? 사르트르는 보봐르와의 계약결혼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었다.“ 나의 생애에는 하나의 필연적인 사랑이 존재하며 그것은 바로 보봐르와의 사랑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많은 우연적인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나처럼 보봐르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사르
트르의 말처럼 보봐르 역시 그와의 사랑을 필연적으로 여겼는지, 앨그렌을 향한 그토록 지극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르트르를 떠날 수 없었다.
앨그렌에게 편지를 보낼 때, 파리 근교 들판의 야생화를 꺾어 동봉하는 소녀적 감성에, 앨그렌의 편지가 도착했을까봐 계단을 뛰어오르고, 우편 파업에 혹시라도 편지를 보낼 수 없게 될까봐 초조해하고, 연인에게 제발 꿈에 좀 나타나라고 호소 겸 협박하는 등 이렇듯 안달복달의 거침없이 파격적인 사랑을 갈구했던 여자 보봐르. 그녀가 이토록 주변의 악평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사랑을 거침없이 행할수있었던것은 그녀가 남긴 다음의 말이 모든것을 증명하고도 남지않을까?“ 내 가장 소중한 작품은 내인
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