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하얀 눈밭으로 이루어진 러시아의 드넓은 벌판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삼두마차. 이 마차에는 두 연인이 타고 있었으니 그들은 다름 아닌 지바고와 라라였다. 러시아 민속악기 발랄라이카와 돔브라의 아름다운 선율이 눈밭을 배경으로 하는 대자연의 화면과 함께 이들의 사랑을 고조시킨 영화 <닥터 지바고>! 낭만적인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잇는 대작 <닥터 지바고>는 러시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파스테르나크의 자전적 소설로, 여기에 등장하는 의사이자 시인인 유리 지바고가 바로 파스테르나크이며, 라라는 그의 애인인 올가를 지칭하고 있다.
세기적 연애 사건의 주인공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그의 아버지는 미술 교수였다. 소설가 톨스토이, 시인 마리아 릴케, 작곡가 라흐마니노프, 그리고 악명 높은 통치자 레닌의 초상화를 그렸을 정도로 그 재능과 명성이 높았다. 여기에 어머니가 피아니스트였던 관계로 파스테르나크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눈을 떴으며 시를 잘 쓰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어머니의 조언에 따라 음악가가 되기로 작정하고 6년간 음악 이론과 작곡을 공부했지만 음악은 결코 그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했다.
결국 음악을 포기하고 대신에 철학 쪽으로 방향을 굳히면서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에 이르는데, 그의 시는 범상치 않아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1913년에는 그의 첫 번째 시집이 나오기에 이른다.
그는 주목받는 서정 시인이었지만 그가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쓰는 순간만큼은 서정과는 거리가 먼 암울한 투쟁과 외로운 결투에 비견될 만큼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했다. 그러기에 오죽하면 그는 시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남겼을까.“ 시는 하나의 나뭇잎을 얼어붙게 하는밤, 두마리 휘파람새의 결투다.”
그가 시상에 파묻혀 지내고 있을 때, 러시아에는 혁명의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도 처음에는 이 혁명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것은 곧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피의 숙청이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현실을 보자 이내 그 환상은 꺾여 버리고 말았다.
이미 러시아에서 명성이 자자한 그로서 긴 침묵 속으로 잠행하는 동안은 집필을 할 수 없다는 자학과 좌절감에 휩싸인 고통의 나날들이었다.
그리고 또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 그는 <노비 미르>(신세계) 잡지사에 우연히 들르게 되는데 당시 그는 한 번의 이혼과 다시 새 가정을 꾸린 가장이었다. 그가 들른 잡지사의 편집자 올가 이빈스키야! 당시 올가는 모스크바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두 번 결혼에 실패했으며 두 아이를 둔 엄마였다.
그러나 사랑은 시대를 초월하고 나이를 초월하고 그 모든 겉치레를 초월한다고 했던가. 이 운명적인 첫 만남은 그들의 생애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끌고 말았으니, 그것은 누구도 끊을 수 없는 그들만의 불타는 사랑이었다. 그들이 첫 만난 1946년은 시인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던 파스테르나크의 나이가 56세였으며 올가는 34세로, 그들은 높고도 두터운 세대차이란 벽을 과감하게 뛰어 넘은 것이다.
‘첫 눈에 반하고 말았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바로 파스테르나크가 그랬다. 그는 올가를 본 즉시 반하고는 며칠 후 자신의 책을 올가에게 선물하기에 이른다. 그 책갈피 속에는 메모가 적힌 연서가 들어있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나의 삶, 나의 천사인 그대여,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올가 역시 그를 사랑하기에 이르고 그들의 사랑이 농익어 갈 때마다 올가는 행복감에 도취돼 주변의 친구들에게 이런 자랑을 하곤 했다.
“그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면 마치 신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즐겁고 아늑해서 좋아.”두 사람, 아니 이제는 연인이 된 이들은 작가와 편집자의 입장이었기에 일을 핑계 삼아 자주 만나기 시작했으며 만날 때마다 사랑의 불꽃은 거침없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파스테르나크는 여러 권의 책을 냈는데, 러시아 당국에서는 그의 작품들이 혁명과 위배된다면서 마침내 그를 제거하고자 그의 연인인 올가를 체포해 시베리아에 유폐시키고 말았다. 당시 파스테르나크는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이렇게울부짖었다.“ 그들은내게서그녀를빼앗아갔고난나의삶의전부인그녀를다시보지못할것이다. 이것은 죽음이다. 아니 그보다 더한 무서운 형벌이다.”
올가는 악명 높은 루 비앙카 감옥에서 밤낮으로 심문을 당하면서도 파스테르나크를 간첩으로 만들려는 음모에 의연하게 버티었다. 그 무서운 심문을 당하면서도 파스테르나크를 지킨 것은 오로지 사랑의 힘이었다. 그러다가 올가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알고 면회를 요청했지만 냉정히 거절당한 채 차디찬 감방에서 유산을 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 당시 파스테르나크는 가난한 올가의 어머니와 두 아이를 돌보면서 줄곧 편지를 보냈는데, 당시 그가 보낸 편지 한구절엔 이런 대목이 들어 있다.
“가만히 응시해도 눈 오는 밤 모든 것이 아물거려 나는 경계를 그을 수 없네. 나 자신과 그대가 어디서 나뉘는지…”
연서라기보다는 만날 수 없는 통한의 한이 묻어나는 가슴 저리는 편지가 아닐 수 없다. 올가는 4년 후에 풀려났으며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파스테르나크와 재회할 수 있었다. 파스테르나크는 감격적인 해후를 통해 착상을 얻어 본격적인 소설 창작에 몰두했으니 바로 이 작품이 <닥터 지바고>였다.
1956년 파스테르나크는 완성된 이 소설을 모스크바의 한 출판사에 선보였으나 단번에 퇴짜를 맞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10월 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을 모욕한 작품이기에 안된다.”그러나 이 소설은 이듬해인 1957년이 탈리아어로 처음 출간되었으며, 1958년에는 영어 등 18개 국어로 번역∙출간되기에 이르고 마침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일대 전기를 맞는다.
파스테르나크는 노벨상수상이 결정되자 스웨덴의 한림원에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굉장히고맙고 감동받았으며, 자랑스럽고 놀랍고 또한 부끄럽습니다.”이런 그가 나흘 뒤 다시 한림원에 급전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내게 주어진 이 분에 넘치는 상을 거절합니다. 나의 자발적인 거절을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말았으면 합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옛 소련인 러시아 당국이 볼셰비키 혁명을 배경으로 다룬 이 소설을 출판금지 시키는 등 금서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파스테르나크를 협박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닥터 지바고>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파스테르나크에게는 일생 일대의 큰 영광이었지만 그와 올가의 사랑에는 치명적인 독약이 되고 말았다.
1960년 파스테르나크가 암으로 사망하자, 당국은 다시 그의 죄상을 물어 올가를 체포했다. 다시 시베리아에 유폐된 올가는 예전의 그 강인한 올가가 아니었다. 사랑의 대상이 있을 때는 목숨을 위협해도 견딜 수 있었지만 사랑의 대상이 사라진 뒤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외롭고 지친, 또 의지가 약한 가련한 한 여인의 모습일 뿐이었다. 올가는 흐루시초프서기장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니“저는 앞으로 당국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겠습니다.”란 내용이었고 그녀는 4년 뒤 풀려났다. 풀려 난 그녀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파스테르나크의 무덤이었다. 그리고 1995년 올가마저 세상을 뜨니, 그들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협박당하지 않는 채 자유로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저 세상에서 재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