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와 록산
세상사 많고 많은 사랑 중에 가장 애달프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이라면 단연 시라노의 사랑이 아닐까?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에드먼드 로스탕의 작품 <시라노 드 벨주락>! 이 작품은 17세기 프랑스의 당대를 풍미했던 시인이자 최고의 검술가인 시라노라는 실존 인물을 다룬 낭만 희곡이다.
무엇하나 거칠 것 없이 당당했던 시라노지만 단 하나, 그는 사랑이라는 덫에 걸려 가슴앓이를 하게 된다. 그가 몽매간에 그리면서 사랑했던 여인은 사촌 동생인 록산. 그러나 마음뿐 감히 고백을 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흉물스럽게 큰 코로 인한 외모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이를 알 리 없는 뛰어난 미인인 록산은 권력을 앞세운 드 발베르 자작의 끈질긴 결혼 신청에 골머리를 앓는다. 그러는 사이 록산은 젊은 장교후보생 크리스티앙의 외모에 반해 그를 연모하게 되면서 둘의 사랑은 막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이들의 사랑에 배 아파 하고 가슴에 통증을 일으킨 두 남자가 있었으니 한 사람은 드 발베르 자작이었고, 또한 사람은 시라노였다.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을 향한 록산의 사랑에 마음속으로 울어야 했을 뿐이지만, 드 발베르 자작은 배 아픈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연적을 올가미에 씌워 버리는 음모를 꾸민다. 전쟁터로 크리스티앙을 보내버린 것이다.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은 전쟁터로 가게 되고, 록산은 시라노를 찾아 온다.‘ 아, 이게 정녕 꿈이란 말인가. 사랑하는 록산이 나를 찾아오다니, 그녀가 혹시 내 사랑을 느낀 것일까? ’그러나 혹시나 하는 기대는 역시나 착각이었다.“ 시라노님, 당신은 위대한 검술가니까 전쟁터에서 크리스티앙이 부상을 당하지 않도록 잘 지켜주세요. 꼭 부탁드려요.”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여인에게 연적을 보호해 달라는 이런 부탁을 들어야 한 그로선 얼마나 가슴이 아렸을까?
전쟁터의 아수라장 속에서 시라노는 연적의 보호자가 되는 극단적인 희생을 감수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크리스티앙이 대신하게 하는 방식으로 그녀를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잘생겼지만 교양이 없고 문학적재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열정적인 연애편지를 써준 것이다. 즉, 대필인 셈이다. 크리스티앙의 이름으로 록산에게 보내진 수많은 연애편지 중 시라노의 마음이 담긴 한 대목을 보면 이렇다.
“사랑하는 록산에게 내 마음을 이 편지에 실어 보냅니다. 이제 내 전체가 당신의 손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글은 제 살이고, 잉크는 제 피입니다. 이 편지는 내 자신입니다.”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을 보호하는 한편, 그의 이름으로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연애편지를 록산에게 여러 차례 보낸다.
“록산,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은 오직 사랑이라오. 슬픈 격정으로 가득한 이것은 진정 사랑이라오. 아!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내 행복도 바치겠소. 가끔 멀찌감치 서서 내 희생에서 탄생된 행복이 웃는 것을 잠시 들을 수만 있다면…. 당신이 던지는 눈길은 나에게 새로운 용기를 준다오. 이 어둠 속에서 당신을 향한 그 그리움의 내 영혼을 느끼오? ”
록산은 편지를 받을 때마다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외모에 반했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전쟁터에서 이토록 멋지고 훌륭한 연애편지까지 보내주는 그가 너무도 고맙고 보고 싶어 마침내 그녀는 전쟁터를 향한다. 그리움을 주체하다 못해 달려간 것이다.
그리고 록산과 크리스티앙의 뜨거운 포옹! 이를 한쪽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시라노는 눈길을 돌리는데, 설핏 그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으니 그것은 소리없는 눈물이었다. 록산은 시라노에게 말한다.“ 시라노님, 크리스티앙을 잘 돌봐주셔서 고마워요. 그리고 이젠 확실히 알았어요. 처음엔 단순히 크리스티앙의 외모가 좋아서였지만 그가 보내준 멋지고 황홀한 편지를 통해 그의 진면목을 알게 된 것이에요. 나는 이제 그의 그런 진실함을 사랑해요. 외모 따윈 필요 없어요. 나에게 보내준 편지 속에 담긴 열정, 순수함이라면 설령 그가 혐오스러운 추남이라도 상관없어요.”이말을 들었을때의 시라노심정은 어땠을까?‘ 록산, 사실 그편지는 내가보냈고 나의마음이라오.’한편에선 이런 말을 토하고 싶은 격정이 일지는 않았을까?
록산이 떠나고 다시 전쟁을 치르는 시라노와 크리스티앙. 그러던 어느 날, 크리스티앙은 예의 시라노가 대필한 연애편지를 부치러 가다가 전사하고 만다. 소식을 들은 록산은 다시 전쟁터를 찾아오고 그녀는 자신에게 보낼 편지를 가슴에 안은 채 숨져있는 크리스티앙을 품에 안으면서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록산은 크리스티앙의 그 열렬한 사랑에 감동한 나머지 더 이상의 그 어떤 삶도 영화도 물거품처럼 여기고는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이후 14년 동안 시라노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록산을 찾아가 다정한 말벗이 되어 주기에 이른다. 시라노가 찾아갈 때마다 록산은 피 묻은 크리스티앙의 편지를 읽고 있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편지는 그녀에게 가장 아름다운 보물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다른 패거리 일당과의 다툼에서 크게 부상을 당한 시라노는 피가 흐르는 머리를 감추고자 모자를 쓰고는 밤인데도 불구하고 록산을 찾는다. 어쩌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될 그녀였기에 찾아간 것이다. 이를 알 리 없는 록산은 시라노에게 그 마지막 편지를 건네주면서 읽어 달라고 부탁한다. 시라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힘겨운 상황에서 마지막 온힘을 다해 낭랑하지만 부드럽게 또 때로는 울부짖듯 편지를 읽어 내려간다.
들으면서 감동에 젖던 록산은 흐느끼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든다.‘ 불빛도 없는 이밤에 시라노는 어떻게글자 하나 빼지 않고 읽을 수 있지? ’확실히 이상했다. 핏자국으로 얼룩진데다가 수도 없이 만지고 또 만져서 거의 글자의 형체조차 희미한 편지를 시라노는 거침없이 읽어 내려간 것이다.
록산의 추궁에 시라노는 더 이상 잡아떼지 않고 모든 사실을 밝힌다. 그제서야 알게 된 자신을 향한 시라노의 사랑! 록산의 볼에 그녀의 눈물이 주르르 주르르 쉬임없이 흘러내린다. 마침내 그토록 사랑했던 록산의 가슴에 안겨 숨을 거두는 시라노….
17세기 프랑스의 실존 인물 시라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모티브로 한 5막 운문 희곡 <시라노 드 벨주락>! 자유분방한 철학자이자 풍자 작가에 당대 최고의 검술가였던 시라노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의 주인공‘달타냥’의 모델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시라노의 사랑! 그러나 그 사랑은 그가 록산의 품에서 생을 마침으로써 가장 행복한 사랑으로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