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여정에서 깨달은
‘긍정의 삶’<미스 리틀 선샤인>
결코 평범하지 않은 가족이 소개된다. 마약을 하다가 양로원에서 쫓겨난 할아버지는 틈만 나면 포르노 잡지를 찾는다. 니체 철학에 빠져든 고교생 아들은 허무주의자의 표정으로 말문을 닫았다. 성공학 강사답게 아버지는 입만 열면 성공을 외치지만 알고 보면 실패 전문가다. 외삼촌이 동맥에 칼을 댄 것은 게이 연인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7살짜리 배불뚝이 막내딸은 턱없이 미스 아메리카만 꿈꾼다. 제정신으로 비치는 사람은 어머니지만 하숙생 같은 식구들을 챙기느라 등골이 휜다.
<미스 리틀 선샤인>의줄거리를한 줄로 간추리면 ‘콩가루 집안 이야기’가 된다. 맷돌은 없어도 부딪칠 때마다 제대로 부서진다. 서로에게 무관심하기는 기본이고 어쩌다 대화라도 나누려면 통역관을 불러들여야 할 지경이다. 가족 개개인의 성격도 괴팍하기 짝이 없거니와 저마다 좌절과 오기, 체념과 허풍을 그림자처럼 끌고 다닌다. 이들은 막내딸의 미인대회 참가를 위해 모처럼 함께 길을 나서는 데, 미니버스를 탄 1박 2일의 여정에서 갖가지 사건과 사고를 겪는다.
낡은 버스가 덜컹거릴 때부터 수상쩍었다. 망가진 클러치와 떨어져 나간 문짝처럼 가족들의 마음은 황폐해진다. 유대감은커녕 상대방을 이해하기조차 거부한다. 가정이란 공동체는 사라지고 이웃보다 낯선 관계로 바뀌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버스를 뒤에서 밀면서 올라타는 곡예까지 벌여야 한다. 불행이란 때맞춰 찾아와 골고루 전해지는 것인가. 휴게소에서 아버지와 아들, 외삼촌 은희 망의 끈이 툭툭 잘리는 소리를 듣는다. 세상의 모든 액운과 자매결연이라도 맺은 것 같은 소동극이 우습고도 눈물겹다.
결말부의 어린이 미인대회는 오늘의 경쟁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어지간한 공포영화는 명함도 못 내밀만큼 머리칼을 쭈뼛하게 만든다. 해피엔딩을 기대한 관객들의 뒤통수를 치면 서마 무리하는 장면이 더없이 유쾌하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길이지만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는 발걸음이 가볍다. 하나가 되기 위한 낙관주의! 공동으로 연출을 맡은 조너선 데이튼과 발레리 페리스는 부부 감독이다. 주책바가지 할아버지의 말씀 한마디는 새겨들을 만하다. “진짜 낙오자는 시도조차 안하고 패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시대가 시대를 껴안은 <오래된정원>
“세상 참 많이 변했습니다. 선생 같은 사람들 덕분이겠죠.”16년 8개월 만에 출옥하는 중년의 오현우(지진희)에게 늙수그레한 간수가 건네는 말이다. 황석영이 펴낸 같은 이름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오래된 정원>은 이미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80년대’와 그시대를 혹독하게 견뎌낸, 이른바‘운동권’의 이야기다. 현우의 1인칭 시점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그가 헤쳐나가는 고난의 시절을 자세히 그렸지만, 영화는 이 부분을 압축해 넘어간다. 풍경과 상흔! 야만의 시대는 칼침을 놓고, 여린 마음은 쑥뜸을 뜬다.
광주항쟁이 일어난 뒤 운동권의 핵심인 현우는 산골로 피신한다. 그곳 미술교사 한윤희(염정아)는 현우를 숨겨주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동료의 안타까운 소식에 서울로 간 현우는 바로 붙잡혀 수감되는데, 기나긴 세월 동안 형법은 윤희에게 단 한 번의 면회도 허락하지 않는다. 세상은 어떻게 얼마나 좋아졌을까. 장기수의 눈엔 어지럽다 못해 구토가 날 정도로 변했다. 궁기가 가득했던 어머니는 땅장사로 떼돈을 벌었고, 깃발을 흔들었던 동지들은 전리품을 챙기지 못한 울분을 토해낸다. 그리고 사랑했던 여인은 영영 만날 수 없다.
현우가 사랑의 흔적을 되짚어가는 과정의 플래시백(과거 장면) 기법이 빼어나다. 가까운 과거와 먼 과거를 넘나들면서 아련하고 몽롱하게 더러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게 시간을 되살린다. 햇살이 부서지는 강가의 나른한 데이트, 갑자기 전기가 나 간방 안에서 총각김치 먹는 소리, 투쟁하는 방법을 놓고 토론할 때의 격렬한 입모양, 불화살로 훅훅 날아간 젊은 육신들. 무엇보다 세상의 중심이자 지렛대인 여성성을 강조한 대목, 특히 두 모녀가 마루에 앉아 담배 연기에 시름을 날려버리는 장면은 관객들의 가슴에 구멍을 새긴다.
80년대는 누구에게는 자랑이고 또 누구에겐 죄의식일 것이다. 임상수 감독은 멜로드라마로 큰 틀을 짜고 운동권을 냉철한 눈길로 바라본다. 섣불리 동조하거나 위로하지 않고 때로는 매섭게 꾸짖기도 한다. 윤희 또한 시대의 가련한 희생양으로 내세우기 보다는 20년 동안 피폐해진 현우의 영혼을 치유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마지막 장면엔 현실과 판타지가 섞이며 묵직한 느낌표를 찍는다. 좁게 보면 아버지와 딸의 해후, 넓게 보면 시대와 시대의 화해로 읽히는 대목이다. 그러니 알겠다, 이데올로기가 녹슨 대못이라면 사랑은 영롱한 보석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