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사치 부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외양을 화려하게 꾸며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삼고, 심지어는 신분의 판단 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한낱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고, 부질없는 짓이다.
족제비 가죽으로 만든 저고리
전림(田霖)이 판윤(判尹)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왕자인 회산군(檜山君)의 집 앞을 지나가다가 말을 멈추고 일하는 사람을 불러 말하였다. “집의 칸 수가 많고 적은 것에는 다 그 법이 따로 있다. 네가 죽기가 싫거든 법에 넘치지 마라. 오늘 저녁에 다시 이 앞을 지나갈 것이다.”
저녁때에 전림이 다시 왕자의 집 앞을 지나자 일하던 사람이 그를 맞이하면서 정중히 말하였다.
“칸수가 많은 것은 뜯고, 긴 것은 끊어서 감히 법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비록 왕자의 신분이었지만 회산군은 법에 따라 집을 지어야 했다.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큰 집은 엄격하게 금하였던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다. <경국대전>에 보면 대군은 60칸, 그 밖의 왕자 및 공주는 50칸, 옹주·종친 및 1·2품 문무관은 40칸, 3품 이하 30칸, 일반 서민은 10칸으로 가옥의 크기를 제한하고 있다. 또한 광채 나는 석재를 쓰지 못하게 하였고, 대들보를 받치는 곳에 꽃이나 나무를 조각하여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중종 무렵에는 지주와 대상들이 1~2백 칸짜리 집을 짓고 중국제 고급 비단옷과 온갖 사치품으로 치장하였다.
이러한 풍조는 당시의 사대부에서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사회의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심지어는 족제비 가죽으로 만든 저고리가 없으면 집안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고, 혼수 준비를 못하여 혼인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휩쓸려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고가의 중국 물품을 사들였고, 금화를 가지고 밀수까지 하는 모리배(謀利輩)도 생겨났다. 정조 2년 6월에는 유당이라는 선비가 상소를 올렸다.
“미관말직의 관원도 밥상이 미어지도록 호화롭게 차려먹고, 가난한 선비의 아내도 한 번의 잔치에 옷이 열 가지나 되고, 시정의 천첩들도 몸에 주옥을 두릅니다. 이 모든 것을 수입하기 위해 금은이 오랑캐와 왜인들에게 빠져나가고, 쌀과 돈이 날마다 주육(酒肉)에 녹아나고 있습니다.”
또한 숙종 때 송시열은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에서“사치 가운데 혼인 비용이 제일 심합니다. 딸 가진 집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빚을 내어 사위 될 사람의 집을 기쁘게 하고, 사위의 집에서는 눈을 흘기며 여자에게 혼수 장만해 오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의 현실과 매우 흡사하다. 결혼을 재산증식의 기회로 삼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아직도 과거의 폐습을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곧고 정결한 월사 이정구의 부인
월사 이정구의 부인은 판서 권극지의 딸로 평소 집안을 검소하게 꾸려 나갔다. 월사 부인은 어느 날 공주(公主)의 집에서 부인들을 초대한 잔치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여러 집안의 부인들이 다투어 사치스럽게 꾸미고 나왔는데, 한 노부인이 거친 베로 짠 옷을 입고 들어왔다. 주인이 그 부인을 맞아들여 상석에 앉게 하였다. 젊은 부녀자들은 그 부인을 손가락질 하고 비웃으며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잔치가 끝난 뒤에 노부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이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다며 만류하자 노부인이 말하였다.
“저의 집 대감은 내의원(內醫院)의 도제조(都提調)로 새벽에 이미 입궐하셨습니다. 큰 아이는 이조판서로 정무를 보러 나갔습니다. 작은 아이는 도승지(都承旨)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이 늙은이가 집에 돌아가야 저녁밥을 지어 보낼 수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크게 놀라며 비로소 그녀가 월사 이정구의 부인임을 알았다.
월사 부인의 검소한 생활 모습에서 부박한 풍조에 휩쓸리지 않은 조선 여인의 곧고 정결한 삶을 읽을 수 있다. 이런 정신이 우리의 현실을 지탱하고, 삶의 품격을 전아(典雅)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잠시‘빌린 것’을 가지고 살아갈 뿐
고려 충숙왕 때의 학자 이곡(李穀)은 그의 문집 <가정집(稼亭集)>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놓았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어느 것이나 빌리지 아니한 것이 없다.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서 높고 부귀한 자리를 가졌고,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 은총과 귀함을 누리며, 아들은 아비로부터, 지어미는 지아비로부터, 비복은 상전으로부터 힘과 권세를 빌려서 가지고 있다. 그 빌린 바가 또한 깊고 많아서 대개는 자기 소유로 하고 끝내 반성할 줄 모르고 있으니, 어찌 미혹(迷惑)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곡의 말대로 인간은 잠시‘빌린 것’을 가지고 살아갈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영원히 소유하려고 발버둥 친다. 아름다운 꽃도, 잘 익은 과실도 때가 되면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 한 생애를 조용히 마감한다. 명예, 권력, 부귀 등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요 잠시 옷깃을 스치는 바람일 뿐이다. 그것을 끝까지 움켜쥐려고 발버둥 칠수록 삶은 더욱 누추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