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에 반한, 금지된 사랑
일러스트 하고고
목사 시험에 합격한 횔덜린은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고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은행가 야곱 공타르(Gontard)의 가정교사로 입주하는데, 안주인 주제테(Susette) 공타르 부인에게 첫눈에 반한다. 네 아이의 어머니이지만 여전히 빛나는 미모와 우아한 자태, 다정한 모성애까지 지닌 주제테를 향한 사랑은 활화산처럼 솟구쳤다. 젊고 잘생긴 한 살 연하 가정교사의 촉촉한 눈빛의 의미를 그녀도 모를 수 없었다. 차를 마시고, 눈인사를 나누고, 산책하며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였고, 남편 야곱도 그들의 미묘한 눈빛과 태도를 통해 둘의 관계를 알게 됐다. 주제테는 네 아이를 동반하여 횔덜린과 두 달여 동안 카셀과 베스트팔렌 등지를 여행할 만큼 신뢰했다. 이즈음 횔덜린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제테와의 관계를 “이 비참한 시대에 나눈 영원하고 행복하고 성스러운 우정”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우정 이상의 감정이었음은, 그가 신학교 시절부터 그리스를 배경으로 쓰기 시작한 소설을 통해 확인된다. 횔덜린을 불멸의 작가로 만든 편지체 소설 『휘페리온 Hyperion』은 주제테로 인해 정열적으로 집필하게 됐고, ‘그대가 아니면 누구에게’라는 헌사와 함께 『휘페리온』 2권을 그녀에게 바쳤을 만큼 그 자신의 일부로 읽힌다. 당연히 그녀는 『휘페리온』에서 고대 그리스 정신의 화신인 디오티마(Diotima) 로 지칭되며, 휘페리온이 쓴 편지의 수신자로 등장한다.
“플라톤과 그의 제자 스텔라가 서로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대는 아는가? 그처럼 나는 사랑했었고, 그처럼 나도 사랑받았었다. 오, 나는 행복한 소년이었다! 비슷한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면 그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위대한 한 인간이 자신보다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긴다면 그것은 신적인 일이다. 한 용감한 남자의 가슴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한마디 다정한 말, 정신의 열망으로 들뜨게 만드는 장려함이 숨어 있는 한 번의 미소, 그것은 적지만 많은 것이며, 그 단순한 음절 안에 죽음과 삶을 숨기고 있는 마법의 주문과 같고, 산속 깊은 곳에서 솟아 올라와 대지의 신비에 찬 힘을 그 수정과 같은 방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는 성령의 물과도 같다.”
기쁨이 슬픔으로, 환희가 고통으로
유부녀인 주제테가 그에게 사람들 앞에선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지 말며, 뚫어지게 쳐다봐서도 안되며, 절대로 손을 잡아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숨겨질 수 있는 사랑이 아니었고, 소문은 널리 퍼졌다. 결국 주제테의 남편 야곱은 횔덜린에게 가정교사를 그만두라고 요구했고, 횔덜린은 다른 도시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그는 주제테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그의 고통을 더욱더 가중시키는 일이었다. 아무리 편지를 쓰더라도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고, 그녀의 편지를 아무리 읽어도 그녀는 멀리 있었다. 그리움이 더해진 사랑의 감정은 커져만 갔고, 해소되지 못한 열정에 그의 심정은 무너져갔다.
“나의 사랑하는 이여! 우리가 혼자일 수 없다는 것, 우리 마음속의 사랑은 우리가 살고 있는 한 꺼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온갖 풍요로움 속에서도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어준다.”
“당신이 오래전 나에게서 멀리 있을 때에도 당신은 얼마나 자주 나에게 가까이 존재했으며, 당신의 빛으로 나를 비추시고 따뜻하게 해주셔서 마치 하늘의 빛살이 어루만져주는 얼어붙은 샘물인 양 나의 얼어붙은 가슴은 다시금 녹아 움직였던가요! 나는 나의 행복한 감정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의해서 손상되지 않도록 그것을 지닌 채 별들을 향해 달아났으면 했습니다.”
모든 행복의 밑바닥에는 불안이 깔려 있다. 사랑으로 충만할 때, 더 이상은 이만큼 행복하지 않으리란 두려움으로 도망치고 싶다. 사랑은 부재를 견디는 힘이다. 연인이 손에 잡히지 않아도 그 존재감만으로 충만할 수 있다. 횔덜린은 그녀에게 편지를 쓰면서 사랑을 확인하고 고대 그리스의 신들처럼 영원의 사랑을 확신했다. 횔덜린이 보낸 편지는 모두 소실됐고, 주제테의 편지만이 전해진다. 디오티마가 휘페리온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다.
사랑을 잊지 않으시겠지요?
“나의 휘페리온이여, 당신이 진군하는 도중 저에게 쓴 편지들을 잘 받았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통해서 당신은 저를 강하게 사로잡고 있답니다. 또한 저의 발아래에서 눈물을 흘리던 연약한 젊은이가 이렇게 강한 존재로 변화한 것을 바라보는 일은 사랑의 한가운데 있는 저를 전율케 합니다. 당신은 사랑을 잊지 않으시겠지요? 그렇지만 계속해서 변화해 나가십시오! 제가 뒤따르겠습니다.”
미지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남자가, 제 연인에게 이런 편지를 받는다면 세상의 무지와 무관심은 문제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세상의 부족함을 메우고, 사랑은 마음의 빈틈을 채운다. 사랑으로 충만한 그는 자신의 새로운 미래의 문학을 지속해나갈 것이다. 횔덜린은 진정한 고통은 영감을 불러일으
키며, 자신의 불행 위에 발 딛고 있는 사람은 그만큼 더 높이 서있다며, 그의 대표시 『운명』에서도 ‘모든 환희는 곤경에서 움텄으며 / 고통 가운데서만 나의 가슴이 누렸던 / 가장 사랑스러운 것 / 인간됨이 사랑스러운 매력을 융성한다’고 노래했다. 그것은 오롯이 그의 삶의 내력이었다. 주제테와의 사랑과 이별은 그에게 『휘페리온』을 쓰게 만든 힘이었고,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미친듯이 쓰고 또 썼다. 따라서 시와 소설로 불리기 전, 그의 모든 글은 그녀를 향한 편지였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나는 마치 버팀목이 없는 포도 줄기처럼 자라났으며, 그 야생의 줄기들은 방향을 잃은 채 땅바닥 위에서 뻗어 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고귀한 힘이 활용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소멸되고 마는지를 그대도 알고 있다. 나는 마치 허깨비 불처럼 이리저리 떠돌았으며, 모든 것을 붙잡았고 모든 것에 의해 붙들리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직 한순간뿐, 도움을 받지 못한 힘들은 헛되게도 시들어 버리고 말았다. 나는 모든 것이 나에게 결핍되어 있음을 느꼈으며 나의 목표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와 헤어지고 함부르크, 슈투트가르트, 하우프트빌, 프랑스의 보르도 등을 방랑하던 그는 1802년 주제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벽에 의자를 부수는 파괴적인 행동을 하며 그는 1800년 5월 8일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때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떠났더라면’ 등의 수많은 자책과 후회의 순간들이 결국 그를 정신착란으로 내몰았을까? 『휘페리온』에서 갈파했던 예감이 맞아떨어졌음에 운명의 힘에 몸서리쳤을까? 그의 대표시 『이별』의 저변에는 정신착란 증후가 마치 주제테와 작별하는 방식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헤어지려고 했는가? 그리함이 좋고 현명하다고 생각했는가? / 그렇다면 어찌하여 우리의 헤어짐이 마치 살인이나되듯이 우리를 놀라게 했던가? / 아! 우리는 우리 자신을 거의 알지 못하니 /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의 신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 내 사라져가련다. 어쩌면 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어느 날 / 디오티마여! 그대를 보게 되리, 그러나 그때는 / 소망은 피 흘려 스러지고 축복받은 자들처럼 / 평화롭게, 또한 낯선 자들처럼 우리”
죽음은 작별이 되지 못한다. 죽으면 고통이 끝나고, 살아있어야 작별의 고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목숨은 살아있되, 죽을 때까지 그 고통을 살아내는 것이 횔덜린다운 작별이었다. “나에게 내 청년기의 사랑스러운 나날이 없었더라면 어디로 내가 도망쳐 갈 수 있겠는가?” 주제테가 죽고 6년 후 정신병원에 강제 이송됐던 그는 이듬해 목수인 에른스트 치머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다정한 보살핌을 받으며 시를 쓰면서 36년을 더 살았다. 횔덜린의 작품이 생애와 더불어 알려지면서, 지금은 횔덜린과 주제테를 ‘프랑크푸르트의 로미오와 쥴리엣’으로도 부른다.
참고서적
<횔덜린 시 전집 1, 2> (프리드리히 횔덜린 저, 장영태 옮김, 책세상) <휘페리온>(프리드리히 횔덜린 저, 장영태 옮김, 을유문화사)
*별도로 표시하지 않은 모든 인용은 <휘페리온>입니다.
오늘의 편지 이야기
당신을 눅자치다
2017 대한민국 편지쓰기 공모전
청소년부/자연 <동상> 김민경
내 사람에게
시간이 점점 흘러갈수록 우리 사이에는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시간이 적어지는 것 같아 글로 적어 전해보려고 해요. 잠깐 시간이 괜찮다면 제가 하는 이야기를 마음에 남겨둘 수 있을까요? 태연함이라는 가면을 쓰고 무거워진 어깨와 당신에게 주어진 책임감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지만 글을 읽는 동안 잊어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내 사람인 당신에게 작은 마음, 작은 소리를 모아 응원하고 싶어 글을 쓰게 되었어요.
내가 처음 본 당신의 하늘은 누구보다 밝고 청렴하여 하얗고 파란색으로 덮여있었지만 노을이 질 땐 누구보다 강직하고 관용 있는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덮여있었어요. 하지만 내가 세상에 나와 바라보게 된 하늘은 당신의 하늘과는 달리 우중충한 잿빛으로 물들어버린 하늘이었어요. 당신은 나에게 좋은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당신이 세상에 물들어버리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어릴 때 본 당신은 슈퍼맨처럼 크고 강했으니까요.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닮고 싶어 했던 당신의 하늘은 어느 순간부터 먹구름으로 가득 차버리고 말았어요. 당신 탓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하늘에 있는 잿빛 먹구름은 내가 만든, 나로 인해 만들어진 먹구름이니까요.
당신은 요즘 기댈 곳 없이 비틀거리다가 힘없이 주저앉기도 했을 거예요. 나는 어쩌면 당신에게 부담을 주고 당신의 세상을 헤집어 놓으며 길가에 덩그러니 피어있는 당신이 지켜야 하는 꽃 인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제는 당신의 하늘에 떠 있는 별이 되고 싶어요. 반짝이다가 보이지 않는 이름 모를 별이 아닌 여름밤 무더위를 식혀줄 수는 없어도 잠시나마 더위를 잊을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그런 별. 당신에게 힘을 내라고 강요하지 않아요. 내가 당신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당신에게 태연함이라는 가면을 달라고 하지 않아요. 당신의 옆에서 같이 나눠들 수 있게 해주세요.
상처로 가득한 마음에 자신을 가둬놓고 나로 인해 자신의 세상을 잿빛으로 만든 내 사람아. 내가 당신의 세상을 다시 환한 빛으로 바꾼다는 말은 장담하지 못해요. 당신은 나의 높은 하늘입니다. 영원히 사랑합니다. 내 사람아.
- 당신을 눅자치고 싶은 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