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와 명예의 세습
미국의 대도시 할렘가에서는 강력 사건이 발생해도 경찰이 늑장 대응을 하는 게 일상적이지만, 상류층의 고급 주택가에는 빠르고 편리한 치안 서비스가 실시간으로 제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돈이 없으면 의료 보험에도 가입하지 못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때문에 저소득층은 태어나서 살아남기도 어렵지만, 돈 많은 미국인들은 의료 기술의 혜택으로 자연 수명을 늘려가고 있다.
또한‘가난한 사람의 질병’으로도 불리는 비만 계층은 저소득층이 밀집해 있는 미국의 남부 지역에 몰려 있다. 반면 미국의 고소득층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며 미국 동부지역의 대도시에서 따로 몰려 산다. 부잣집 자녀는 공부를 못해도 집안이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명문 대학에 진학해 부와 명예를 세습할 수 있다.
합리적인 사회로 알려진 미국에서 우리의 시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니 계수(소득 불평등 지수)나 비만 지수, 절대 빈곤층 비율 등을 살펴보면 미국이 우리보다 훨씬 심각한 양극화 사회임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는 한국의 전문가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미국 사회에서는 양극화가 전혀 이슈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양극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 미국인들 사이에는 양극화가 시장경제 체제의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점에 암묵적인 동의가 이뤄진 상태다.
이런 동의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미국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노동자들이 파업과 분규를 통해 소득 불평등을 해결하고자 했다. 이 시기에 미국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서 불렀던 노동가요는 우리의 노동가요와 너무나 유사해 한국인들이 깜짝 놀라곤 한다. 미국 사회는 이런 과정을 통해 양극화를 막기 위한 제도와 법령을 도입했지만 양극화의 추세를 막지는 못했다. 결국 미국인들은 시행착오를 통해 자본주의 시
장경제에서 소수가 다수의 부를 차지하게 되는 ‘부익부 빈익빈’이 피할 수 없는 현상임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양극화의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 해결하고자 노력
이제 미국의 보통 사람들은 양극화의 구조적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성취동기를 가진 미국인들이 노력하는 것을 보면 정말 무서울 정도다.
특히 그들은 미국 사회가 제공하는 기회의 평등을 이용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국의 어느 음악도가 정말 재능이 뛰어나다면 그에게는 음악가로 성공할 기회가 충분히 보장된다. 그가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공공기관이나 후원단체가 음악 기기와 연습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음악도가 돈이 없어 음악 공부를 못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양극화를 놓고 엇갈린 예측과 시각이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다. 국가의 최고 책임자가 나서서 양극화 해소를 주요 정책으로 내세웠고, 이를 위한 여러 제도와 지원책이 만들어지고 있다. 또한 여러 전문가들이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이런 노력의 근간에는 양극화가 바람직하지 않으며 제도나 정책에 의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깔려 있다. 물론 양극화는 바람직하지 않다. 양극화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사회 발전을 저해한다.
그렇지만 양극화가 장래에 해소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사실상 결론이 나 있는 상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감정상의 당위나 기호의 차원을 떠나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미래를 얼마나 객관적으로 예측하느냐의 문제이다. 지난 시대를 돌아보면 참으로 많은 예측과 전망이 빗나갔음을 알 수 있다.
1980년대에 일본은 자신들의 GNP(국민총생산)가 2000년이 되면 세계 최고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일본은 1990년대 부터 ‘잃어버린 10년’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최근에야 어렵게 회생의 전망을 보이고 있다. 만약 일본이 애초에 인구 구조의 변화에 따른 소비 감소와 과잉 노동력의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했더라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한때‘미국의 자부심’이었던 GM(제너럴모터스)의 몰락이 시사하는 바 역시 적지 않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GM에 근무하는 것은 미국인들에게 꿈이자 영광이었다. 종신 고용을 비롯한 파격적 복지 제도, 흑인을 임원으로 승진시키는 적극적 소수자우대정책은 GM을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제 GM은 신용 등급이 정크 본드로 떨어진 상태이고 외국계 기업으로부터 인수합병(M&A) 제의를 받는 굴욕을 감수하고 있다. 파격적인 복지 제도의 혜택자가 늘어나면 결국 그것이 기업에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다가 몰락을 자초한 것이다.
감정이나 당위는 우리가 정작 봐야 할 것을 외면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대가는 예외 없이 가혹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가오는 미래를 가능한 정확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직시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