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언제나 되풀이된다. 100년 전의 모습이 지금과 다르지 않다. 율곡 이이가 살았던 16세기 조선은 연산군에서 문정왕후 시대에 이르기까지 반세기에 걸친 폭정이 끝나고 사림의 동서 붕당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사회, 경제, 정치적으로 매우 어지러웠고 질서가 없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일제강점기와 군사정권을 거치며 대한민국은 보수와 진보의 날 선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리가 지금 율곡 이이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이유다.
매섭고 단호한 직언
율곡을 찾는 첫걸음은 자운서원이다. 율곡은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어 있는데 자운서원도 그중 하나다.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문성사를 중심으로 강당과 동재, 서재 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강당 양쪽으로 자리한 느티나무가 웅장한 풍광을 자랑한다. 문성사 입구에 자리한 자운서원 묘정비는 우암 송시열이 짓고 곡운 김수증이 쓴 명필을 감상할 수 있어 더욱 뜻깊다.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서 4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난 율곡은 어려서부터 효심과 인자한 성품을 드러냈다. 학문과 덕성을 겸비하고 예술적 재능까지 뛰어났던 사임당은 그에게 어머니
이상의 우상적 존재였다. 하지만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읜 그는 커다란 상실감에 방황을 하게 되고 삼년상이 끝나자 가족에게 말도 없이 속세를 떠나 금강산에서 승려생활을 하게 된다. 1년 뒤 환속하지만 승려 생활은 부끄러움과 상처로 평생 그를 따라다닌 모양이다. 훗날 선조에게 “집으로 돌아와 죽도록 부끄럽고 분함을 느꼈다”며 당시의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환속 후 학업에 매진한 율곡은 아홉 차례나 장원급제를 하지만 선비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다. 성리학이 국가의 근본이던 시대에 그의 가출은 용납하기 어려운 이단 행위였고 큰 불효였기 때문이다. 과거 시험장에선 옆에 앉아 시험 보는 것조차 거부당하기도 했다.
천재 관료, 개혁사상가, 교육가, 효자 등 율곡을 수식하는 많은 말 가운데 가장 앞자리에 두어야 할 말은 아무래도 개혁사상가일 것이다. 그는 조선 사회 안에 도사린 병증을 치유하고자 끊임없이 부딪혔다. 3번에 걸쳐 선조에게 올린 ‘만언봉사(萬言封事)’는 지금 시대에 볼 때도 매섭고 단호하다.
“오늘날의 인심과 세도가 이 지경이 된 것을 보면 전하의 정치와 교화가 훌륭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분발하여 성인이 되시려는 뜻이 없으셨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그럴 것으로 보고는 정심(正心), 성의(誠意)에 대한 말을 듣기 싫은 진부한 말이라고 합니다.” 섬뜩한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백성이 받고 있는 고통을 한 가지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이 (李珥, 1536~1584). 1536년(중종 31) 오늘날 강릉의 명소로 꼽히는 오죽헌에서 아버지 이원수 어머니 사임당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의 저술을 통해 조선 사회의 제도 개혁을 주장했다. 우리나라의 18대 명현(名賢) 가운데 한 명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있다.
자운서원은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조선 광해군 때 지방 유림들에 의해 창건된 서원이다.
주변에는 율곡 선생과 부모의 묘소가 있어 가족묘의 형태를 띠고 있다.
파주는 조선시대 재상들의 유적지를 여러 곳에서 만나는 특별함이 있다. 율곡 선생의 5대 조부가 처음 세웠다는 임진강이 굽어보이는 화석정, 방촌 황희 선생이 여생을 보내려 지은 반구정 등이 가까이 있다.
백성을 먼저 생각한 정치가
율곡의 정치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요즘의 정치가들이 저마다 외치는 민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형이상학을 배격했고 개혁과 실천을 중시했다. 나라가 200년 정도 지나면 “집이 오래되어 서까래가 썩고 기와가 부서지는 것처럼” 붕괴의 길을 걷는다고 보았던 그는 이를 치유하고자 국방, 공물, 군역, 신분 문제 등 많은 분야에서 개혁책을 내놓았다. 율곡은 특히 경제를 강조했는데, 도덕만 강조한 성리학자들과 달리 율곡은 경제가 안정되지 않으면 도덕이 꽃필 수 없다고 봤다. 지역 특산물을 나라에 바치는 공납(貢納)을 쌀로 통일하자는 수미법(收米法), 향약을 운영할 때도 계를 연결시켜 경제적으로 상부상조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제도 등이 그의 대표적 정책이다.
백성들은 이런 그를 존경했고 우러러보았다. 그가 죽었을 때 백성들은 제 발로 찾아와 조문했다.
<선조(宣祖)수정실록>은 율곡이 죽었을 때의 풍경을 이렇게 전한다. “동료 관리들과 성균관 학생, 말단 군졸, 시장 상인, 노비와 하인들까지 달려와 통곡했다. 궁벽한 마을의 백성들도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백성들이 복이 없기도 하다’했다. 발인하는 날 밤에는 횃불이 하늘을 밝히며 수십 리에 걸쳐 끊이지 않았다.” 수정실록은 다시 말한다. “이이는 서울에 집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집안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다. 친구들이 수의를 마련하고 부의를 거두어 장례를 치른 뒤 조그만 집을 사서 가족에게 주었으나 그래도 가족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자원서원에서 나온 걸음은 화석정으로 향한다. 임진강이 굽어 보이는 강가 벼랑에 자리한 정자다. 율곡의 5대 조부인 이명신이 처음 이곳에 정자를 세웠지만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불에 타 사라졌다. 지금의 건물은 1960년대 파주 유림들이 뜻을 모아 다시 세운 것이다. 화석정에서 바라보는 임진강의 물줄기가 유려하다. 맑은 날이면 멀리 개성의 오관산까지 바라보인다. 율곡 역시 수시로 이곳을 찾아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이왕 파주로 나선 걸음, 방촌 황희의 유적도 놓칠 수 없다.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상의 자리에 머물렀던 인물로 무려 20여 년 동안 태종과 세종을 도와 조선의 국가적 기틀을 마련했다. 소신과 원칙을 지키면서도 관용과 배려의 미덕 또한 잃지 않았던 그는 인간적인 재상이자 청백리로 잘 알려졌다.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반구정(伴鷗亭)은 이름 그대로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내려 지었던 정자다. 무려 18년 동안 재임했던 영의정의 자리에서 물러난 황희는 이곳을 오르내리며 소박한 말년을 보냈다.
한나절 가족 여행지로 제격
파주는 한나절 여행지로 좋은 곳이다. 자운서원, 화석정과 함께 헤이리, 보광사, 용미리석불, 임진각평화누리 공원 등을 코스로 엮으면 근사한 여행코스가 탄생한다. 헤이리는 시인이 차를 건네주는 북카페가 있고 한때 FM 라디오를 주름잡았던 디제이가 운영하는 클래식 음악 감상실이 있는 곳이다. 마을 곳곳에 자리한 갤러리를 기웃거리다 보면 마음이 풍성해지는 느낌이다. 헤이리에서 나와 자유로를 계속 따르면 평화누리공원에 닿는다. 이스트 섬의 모아이상을 연상시키는 작품과 수천 개의 바람개비가 사진촬영 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이다. 공원 옆에 자리한 자그마한 놀이동산은 동심을 일깨운다. 보광사도 추천한다. 한겨울의 적요로 가득한 사찰이다. 우리나라에는 보광사라는 이름의 사찰이 많다. 창건 연대가 밝혀진 보광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고찰이 파주 고령산 기슭에 안겨 있는 보광사다. 894년(신라 진성여왕 8년) 왕명에 따라 도선국사가 비보사찰로 창건했다. 보광사 대웅전이 멋있다. 전통 목조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다.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된 공포와 퇴색한 단청이 고풍스러운 멋을 풍긴다. 외벽도 흥미롭다. 다른 사찰과 달리 외벽을 흙벽이 아니라 목판으로 처리했는데 여기에 아름다운 민화풍의 벽화를 그려놓았다. 대웅보전(大雄寶殿) 편액은 영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대웅전 앞에 가만히 서 본다. 계곡의 맑은 물소리, 산사의 풍경소리, 목탁소리, 스님의 독경소리, 향 내음이 어우러진다.보광사 근처에 용미리석불이 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보물 제93호)로 천연암벽을 몸체로 하고 그 위에 목, 얼굴, 갓을 조각해 얹어놓았다. 두 구가 있는데 왼쪽은 미륵불이고 오른쪽은 미륵보살이란다. 미륵은 석가모니불의 뒤를 이어 56억 7000만 년 후에 도솔천으로부터 인간세계로 내려와 석가모니불이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다. 미륵불 곁에 서 있는 미륵보살의 합장이 간절하다. 덧붙이자면, 미륵불이 들고 있는 연꽃의 꽃송이는 언제 떨어져 나갔는지 애당초 알 길이 없고, 어느 적인가 올려놓았다는 어깨 위의 동자상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시간이 난다면 심학산에도 가보자. 심학산은 해발 194m. 주차장에서 정상까지 20분이면 오를 수 있다. 정상까지는 불과 760m 거리이다. 산이라 부르기보다 언덕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당할 듯싶다. 낮은 산이라고 얕보지 말 것. 정상에 오르면 그 느낌은 사뭇 다르다. 북한산 인수봉에 견줘도 뒤지지 않을 전망이 기다리고 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드는 시원한 서쪽 풍광은 비길 만한 상대가 없을 정도다. 동쪽으로는 고양시와 월드컵축구장, 서울과 북한산이 펼쳐지고, 남쪽과 서쪽으로는 한강과 김포, 북쪽으로는 운정신도시와 통일전망대, 그 뒤편으로 임진강까지 조망된다. 한강과 임진강의 합수머리 뒤편으로 보이는 땅은 개성이다. 산의 7부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심학산 둘레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 총 길이 6.8㎞로 2시간이면 한 바퀴 돌 수 있다. 길 폭은 마주 오는 사람과 어깨를 약간 비틀어 지날 정도이다. 높낮이가 심하지 않고, 부드러운 흙길이 깔려 있다.
창건 연대가 밝혀진 ‘보광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고찰이 파주 고령산에 위치한 보광사다.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된 공포와 단청이 고풍스러운 멋을 풍긴다.
경기도 파주 둘러보기
가는 길
자운서원(031-958-1749)은 자유로 당동IC로 나오면 된다. 헤이리(www.heyri.net)는 마을 입구를 1번부터 9번 톨게이트까지 구별해 두었다. 헤이리종합안내소에서 자세한 안내 받을 수 있다. 만약 헤이리에서 어디부터 가야 할지 모르겠다면 7번 게이트로 들어가는 것이 좋다. 한향림갤러리를 비롯해 아트팩토리, 세계민속악기박물관 등 여러 전시관들이 모여 있다. 헤이리 홈페이지에서 각종 쿠폰을 내려받아 사용할 수도 있다.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은 자유로 마정 분기점에서 판문점 방향으로 나가 도로 차단점에서 유턴 후 주차장으로 진입하면 된다. 심학산 둘레길은 자유로 장월IC(파주출판단지)에서 나가 출판단지 쪽으로 가면 된다. 보광사는 경기 고양에서 접근하는 것이 빠르다. 벽제에서 파주시 광탄면 쪽으로 가는 고갯길(367번 지방도)을 넘으면 있다.
먹을거리
오두산막국수(031-941-5237)는 파주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막국수집. 원래 유명한 집이었는데 허영만의 <식객>에 소개되면서 더 유명해졌다. 이 집 막국수는 메밀 함유량이 매우 높다는 것이 특징. 녹두빈대떡도 맛있다. 심학산 자락에 자리한 심학산 장어(031-957-9205)의 장어구이도 유명하다. 뇌조리 국수집(031-946-2945)은 ‘갈쌈국수’로 유명하다.
잔치국수나 비빔국수를 불향이 지그시 배인 돼지고기와 함께 먹는다. 국수 마니아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는 집. 주말이면 50미터 이상씩 줄이 늘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