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붕괴는 사우디 탓?
“소련 붕괴의 시작은 1985년 9월 1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 사우디의 석유장관 아메드 야마니가 급진적으로 바뀐 OPEC의 석유 정책을 공표했다. (…) 6개월 뒤 사우디의 석유 생산량은 4배로 늘었고 국제 유가는 곤두박질쳤다. 소련으로선 매년 200억 달러의 손실을 보게 된 것인데 이는 유지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소련 해체 선언 당시 러시아 공화국(RSFSR)의 경제재정 장관으로, 보리스 옐친 대통령 하에서 러시아의 시장경제 전략을 설계한 예고르 가이다르의 말이다. 가이다르가 ‘소련 붕괴의 시작일’로 명명한 1985년 그날은 사우디의 야마니 장관이 영국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사우디는 OPEC의 공시가격을 밑도는 가격으로 원유를 팔기로 결정했다” 고 밝힌 날이다. 야마니 장관은 “다음 해에는 유가가 지금(배럴당 28달러)보다 10달러나 낮은 18달러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해 비OPEC 산유국들을 경악시켰다. 배럴당 20달러조차 안 되는 유가는 당시로선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실제 다음 해 벌어진 일은 이보다 더했다.
OPEC 발(發) 유가 폭락 사태는 공식적으로 1985년 12월부터 1986년 7월까지 진행됐는데, ‘석유로 먹고살던’ 소련으로선 이 8개월이 운명을 뒤바꾼 순간이었다. 당시 소련은 동독 등 동유럽 위성국가에 값싼 석유를 지원하며 영향력을 유지했고, 석유와 가스를 수출해 번 돈으로 호주· 캐나다·미국 등에서 상당량의 곡물을 수입했다.
소련이 미국에서 수입하는 곡물의 양이 얼마나 많았던지 지미 카터가 중단시켰던 ‘대(對)소련 곡물 수출’을 후임인 로널드 레이건이 대선 기간 ‘농업 공약’으로 내세워 관철시켰을 정도였다.
1986년 3월 유가는 배럴당 9.6달러까지 추락했다. 직격탄을 맞은 소련은 석유를 팔아도 수입 곡물 대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결국 서구로부터 막대한 금액을 차입했고 동유럽 국가와 연방 공화국을 향한 소련의 영향력도 점차 줄었다. 대표적인 친미국가인 사우디의 결정이 소련의 경제위기까지 초래한 것에 대해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먼은 다음과 같이 확신한다. ‘사우디의 유가인하 결정은 소련 붕괴를 위한 미국의 아이디어였다.’ (2014년 10월 14일 뉴욕타임스 토마스 프리드먼 칼럼 ‘A Pump War’)사실 1980년대 OPEC의 신경을 건드렸던 건 영국이었다. 1970년대 초 북해유전을 개발, 브렌트유를 수출한 영국은 1985년 OPEC의 공시가보다 더 싼 가격으로 현물시장에서 석유를 팔았다. 석유 수입국들은 브렌트유로 몰렸다. 결국 OPEC이 점유율 확대를 위해 가격을 인하하고 원유 증산을 결정한 게 1985년의 일이다. 유가 폭락에 고심하던 영국은 미국을 앞세워 OPEC과 협상에 나섰고 유가는 1986년 7월 이후에야 반등했다. 바다에 해양구조물을 설치하고 석유를 끌어올리는 영국과 맨 땅에 시추기만 꽂고 석유를 뽑아내는 OPEC은 애초부터 체급이 맞지 않았다.
국제유가변동(WTI 기준, 1946년 1월~2017년 5월)
‘터닝포인트’ 80달러
2011~2013년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로 치솟았고 다른 나라들은 극지방과 심해에 묻힌 석유를 탐사·개발하기 시작했다. 채굴비용은 많이 들지만 유가가 워낙 높다 보니 채굴만 하면 생산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 게 있었다. 예컨대 브라질은 앞바다에서 대규모 심해유전을 발견하며 신흥 석유 강국으로 떠올랐다. 미국은 셰일오일·가스에 주목했다. 암반에 막혀 지표면 근처로 올라오지 못하고 지하 셰일층(진흙 퇴적층)에 머물러 있는 석유와 가스를 말하는데, 지하 깊숙이 있는 데다 채굴방식이 까다로워 생산단가가 높다.
고유가는 에너지 업계의 기술개발을 촉진시킨다. ‘터닝포인트’가 되는 지점은 배럴당 80달러. 한국은행은 국제 유가가 80달러 이상의 고유가를 유지하는 시기에 채굴방식 등 기술혁신이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셰일오일 업계도 이 시기에 ‘수압파쇄’ 기술을 개발했다. 물을 고압으로 분사해 셰일오일을 막고 있는 지하 암반을 파쇄하는 기법이다. 생산비용은 낮아졌고 셰일오일 생산량은 2010년 일평균 60만 배럴 수준에서 2014년 400만 배럴 수준까지 증가했다. OPEC은 2014년 하반기부터 미 셰일오일 업체를 상대로 ‘전쟁’에 나섰다. 1985년 영국을 상대로 썼던 전략을 그대로 이용했다. OPEC의 생산단가(배럴당 20~30달러)가 미국 셰일오일(배럴당 50~70달러)보다 낮다 보니, OPEC의 공급량 확대 조치는 셰일오일 업체들의 수익성을 악화시켰다. 때마침 중국의 석유 수요까지 줄면서 유가 하락으로 다수의 미 셰일오일 업체가 도산했다. WBH 에너지(2015년 1월), 듄 에너지(2015년 3월), 퀵실버 리소스(2015년 3월), 삼손 리소스(2015년 8월) 등이 재무안정성 악화로 파산을 신청했다.
‘7자매’와 OPEC
OPEC의 희생양이 된 영국이나 미국으로선 억울하겠지만, 사실 OPEC의 행위는 과거 영·미가 벌였던 일이기도 하다. 지금의 OPEC처럼 전 세계 원유 공급을 독점해 유가를 좌지우지했던 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성장한 ①스탠더드오일 뉴저지, ②스탠더드오일 뉴욕, ③스탠더드오일 캘리포니아 등 ‘록펠러의 후예들’과 ④텍사코, ⑤ 걸프오일(이상 미국), ⑥로열더치쉘, ⑦BP(이상 영국) 등 ‘7자매(7sisters)’가 즐겨 사용하던 수법이었다. 이후 ①과 ② 는 엑손모빌, ③, ④, ⑤는 쉐브론이 된다.
지금이야 ‘벤치마크 원유(미국산 서부텍사스유, 북해산 브렌트유, 중동 두바이유)’가 미국 뉴욕상품거래소나 영국 런던국제석유거래소 등에서 선물·현물 형태로 거래되는 등 원유의 시장가격이 존재하지만, 1970년대 이전만 해도 영·미 출신 7자매에 의해 ‘공시가격’이 결정됐다. 7자매에 반기를 든 이는 사우디 국영석유기업 아람코(Aramco)의 야마니였다. 그는 1967년 3차 중동전쟁 이후 중동의 석유수출국을 규합해 단체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고, 1973년 4차 중동전쟁 때는 사우디의 석유장관이 됐다. 야마니는 오합지졸 OPEC 회원국들을 이끌고 미국을 상대로 석유수출중단 조치를 취하는 등 세를 과시했다. 공시가격 결정은 OPEC의 몫이 됐다. (OPEC도 1986년 유가 폭락 및 현물 시장 발달로 시장에 그 기능을 넘겨줬다.이후 OPEC은 생산쿼터 조절을 통한 간접적인 가격통제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미국과 사우디의 밀월 관계가 시작된다. 1974년 미국과 사우디는 석유를 미 달러로만 구입하도록 하는 데 합의했다. 이 조치로 미 달러는 기축통화로서 입지를 구축하게 됐다. 지난해에는 미국과 사우디의 ‘1974년 밀약’이 공개됐는데, 사우디가 석유 수출로 벌어들인 오일 달러로 미 국채를 구입하고, 미국이 사우디 왕실의 안녕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OPEC 내에서 사우디(무슬림 수니파)는 증산을 주장하며 점유율 확대에 초점을 맞췄다. 증산으로 유가가 낮게 유지되면 서방의 경제성장을 돕고 석유를 수출하는 소련에 오일머니가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미국의 이해가 반영된 셈이다. 반면 OPEC 내 ‘맞수’ 이란(무슬림 시아파)은 고유가 유지를 주장했다. 두 세력의 주도권 다툼은 사우디의 승리로 끝난다. 이쯤 되면 토마스 프리드먼이 1985년 OPEC의 결정을 소련을 붕괴시키기 위한 미국과 사우디의 합작으로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사실 유가는 ‘경제의 영역’이라기보다는 다양한 변수와 지정학적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국제정치의 영역’ 에 더 가깝다. 2014년 사우디와 미국의 ‘유가 전쟁’ 역시 ‘주요 타깃’인지, ‘부수적인 피해자’인지 모를 또 다른 피해자들을 만들었는데 바로 이란과 러시아였다. 사우디로선 유가를 낮춰 이란의 돈줄을 막고,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권(시아파)을 후원하는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었다. 미국으로선 석유 수출로 테러 자금을 마련하는 국제 테러조직 이슬람 국가(IS)의 수입원을 막는 효과가 있다.
‘2차 석유전쟁’ 싱겁게 끝난 까닭
최근의 유가 상황은 고려해야 할 변수가 몇 가지 더 늘었다. 2014년 자신들이 주도한 저유가로 재정적자 피해를 본 사우디는 지난해 처음으로 175억 달러(약 19조 원) 규모의 국채를 발행해 구멍 난 재정을 메웠다. 결국 작년 말 사우디(제2위 산유국)를 포함한 13개 OPEC 회원국과 러시아(제1위 산유국) 등 11개 비OPEC 산유국이 모여 올해 1월부터 6개월간 하루 180만 배럴씩 산유량을 줄이기로 합의했다.
반면 2014년 사우디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일부 미 셰일업체들은 생산성을 크게 높였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40달러로 떨어져도 이익을 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미 노스다코다주 북서쪽 촌동네 ‘바켄’ 등 셰일오일·가스가 생산되는 미국 내 7개 지역에는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다시 모이고 있다. “다시 위대한 미국을 만들자”며 부르짖는 트럼프 미 대통령이 주목하는 대목이다.올해 미국의 셰일오일 생산량은 급증했다. 5월에는 사상 최고치인 하루 930만 배럴 수준으로 치솟았다. 이 때문에 OPEC과 비OPEC 산유국의 감산 합의는 무용지물이 됐다. 일각에서는 2014년에 이어 사우디와 미국이 ‘2차 석유전쟁’을 벌이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쟁’은 시작도 않고 싱겁게 끝났는데, 이는 사우디와 러시아 등이 ‘2014년과 같은 일을 또다시 벌였다가는 공멸할지 모른다’는 판단에 석유감산 조치를 내년 3월까지 연장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유가 하락 공포를 이미 경험한 미국의 셰일오일업체들도 마냥 증산을 하지는 못할 것이란 기대감도 있었다.사우디로서는 국영석유기업 아람코가 내년에 상장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유가를 최대한 잡아둘 필요도 있었다. 현재 사우디는 석유중심경제에서 벗어나는 내용의 ‘사우디 비전 2030’ 계획을 시행 중이다. 아람코 상장 역시 2030 계획의 일부다. 트럼프 정부와 굳이 대립각을 세울 필요가 없다는 판단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가와 한국경제
미 셰일오일 등장으로 배럴당 100달러 밑 저유가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좋은 일일까? 적어도 주유소 기름값이 리터당 평균 1,300~1,500원대에 묶여있는 건 미국의 셰일오일이 국제 유가 상승을 막아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유가로 중동의 건설물량 발주가 줄면서 국내 건설업체들의 수익률은 악화하고 있다. 조선업도 드릴쉽, 플랜트 등 주문이 줄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저유가가 이어지면서 굳이 해양 시추를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사우디와 러시아의 감산 연장 결정에 유가가 상승하기 시작했지만, 조선이나 건설업은 ‘최악은 면했다’는 정도다. 저유가일 때 원유를 구입한 정유사 정도만 유가 상승 차익을 기대 중이다. 현대경제연구원에서는 지난 3월 말 낸 보고서에서 한국 경제에 고유가(유가 등 원자재가격 상승), 고환율(원화 강세), 고금리 등 3고 상황이 올 경우, “지금과 같이 내수 침체가 지속되고 수출 경기 회복세가 미약하며 특히 가계부채 문제 등 경제의 건전성이 취약한 상황에서는 ‘3고’가 내수와 수출 모두의 회복을 저해하는 요인이 돼 한국 경제에 큰 위험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누가 적군인지, 누가 아군인지 모를 21세기 ‘석유전쟁’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닌 이유다.
작가소개 이재덕 기자
경향신문 기자. 기획재정부, 공정거래위원회, 농림축산식품부, 한국은행, 시중은행, 카드사 등에 출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