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일흔 번째 생신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 정말 칠순 잔치 안 하실거예요?” “안 한다고 몇 번을 말해. 멀쩡한 자식이 세 명씩이나 있으면 뭐하누. 한 놈도 결혼을 안 했는데. 사위도 며느리도 없는 칠순잔치는 안 하련다.”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는 강경하게 거절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칠순 생신 전날, 은행에 가서 만기 된 적금을 찾았다. 아버지의 칠순 생신에 맞춰 3년 전에 가입한 적금이었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적금 통장과 찾아온 돈을 봉투에 담아 내밀었다. 아버지는 봉투를 힐끗 보시더니 “돈이 무슨 소용이야.”라며 돌아앉으셨다. 나는 “아버지, 적금통장 한 번 보세요.”라고 말하며 통장을 펼쳐서 아버지의 손에 쥐여 드렸다. 무심코 통장을 보시던 아버지는 문갑 서랍에서 돋보기를 꺼내 쓰시고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든 채 한참 동안 통장을 보셨다. 나는 매달 적금을 송금할 때마다 입금 통장에 표시되는 내용에 짧은 메모를 썼다. 한 번에 7자밖에 쓸 수 없어 매달 조금씩 써야 했다.
‘아버지 칠순, 생신 축하, 드려요 못난 딸, 이라 아버지, 칠순생신까지, 결혼할 수, 있을지 모르겠, 지만 아버지, 칠순생신에도, 혼자여도 섭섭, 해하지 마세요, 언젠가 아버지, 앞에 멋진 남편, 데려올게요, 그때까지 항상, 건강한 모습, 으로 제 곁에, 계셔주세요, 아버지가 계셔, 서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몰라요 무뚝뚝, 하고 재미없는, 저희 키우시느라, 얼마나 고생하, 셨을 지 잘 알, 아요 맏딸인, 제가 더 잘했, 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아버지, 앞으로 더, 잘 할게요, 진심으로 칠순, 생신 축하, 드려요 항상, 건강하세요’
아버지는 돋보기를 벗으시며 말씀하셨다. “꼭 너 같은 딸을 낳아야 할텐데…”
3년 전 적금통장을 만들 때, 언제 시간이 지날까 싶었는데 예순일곱의 아버지는금방 일흔이 되셨고, 적금은 만기가 됐다. 적금통장에 돈이 쌓일수록 시간은 훌쩍 잘도 흘러갔다. 만약 시간도 저축할 수 있는 적금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적금이 있다면 아버지께 만기 없는 적금통장을 만들어 드릴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