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엿보기
허름한 옷차림을 한 중년의 남성이 지하철역의 복권 판매 부스에서 즉석복권을 사고 있다. 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그리고는 지금 막 산 복권을 색이 바랜 역사의 타일에 대고 오백원짜리 동전을 꺼내 조심스럽게 긁기 시작한다. 입술이 바짝 마르는지 두어 번 혀로 입술을 문지른다. 몇 장인가의 즉석복권을 긁어대던 남자는 몇 장을 떼어내 옆에 있던 어린 아들에게 건넨다. 이제 중년의 남성과 그의 어린 아들은 나란히 서서 복권을 긁어댄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희망의 전부이라는 듯 아주 열심이다.
급성장중인 도박사업
IMF가 절정에 달했던 즈음에 보게 된 어느 지하철 역사에서의 풍경이다. 하지만 이제 저런 풍경은 순진한 경우에 속한다. 경마를 비롯한 경륜, 경정, 카지노, 복권이라는 우리나라의 5대 도박산업은 국가 기간산업화하고 있다는 오명을 살만큼 날로 번창중이다. 여기에 실제 도박 행위가 이뤄지고 있다고 판단되는 성인오락실, 사설 경마, 인터넷 도박까지 포함되면 국민 전체가 도박에 빠져 있지 않나 생각될 정도다. 몇몇 연예인이나 경제인들이 해외 원정 도박을 다녔다는 케케묵은 사실은 이제 별다른 뉴스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2002년 말 현재 재정경제부와 문화관광부가 국회에 제출한 도박산업 재정 수입 현황은 현재 우리 도박산업의 크기를 가늠하게 해준다. 2002년도 도박산업 매출 추산액은 모두 11조 5,500억원으로 경마가 7조 8,000억원, 경륜과 경정이 2조 2,500억원, 카지노 4,900억원, 복권 1조 22억 원이다. 1999년도의 도박산업 매출액이 4조 4,400억원이 었던 것에 비하면 3년 사이에 2배 이상이 늘어났다. 여기에 매출액이 집계되지 않은 여타의 도박산업들까지 포함 시키면 우리나라 도박산업 매출 총액은 한국의 최대 수출 품목인 반도체 수출 총액과 맞먹는다는 결과가 나온다.
개인이 받는 유혹, 지자체가 받는 유혹
'도박공화국' 이라는 오명에 걸맞게 그 국민들은 '대박 증후군' 이라는 신종 질병에 찌들어 있다. 그러니까 나도 한 건만 크게 올리게 되면 얼마든지 지금의 상태를 벗어 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이 만연돼 있는 것이다. 희망이 없는 곳에 도박이 번창한다고 했던가. 희망이 있는 사람은 도박이라는 허망한 확률 게임에 자신을 걸지는 않는다. 어느 외국의 학자는 인생을 바꿀 만한 확률이 찾아올 가능성을 '골프를 치다가 벼락을 맞은 사람이 응급실에서 방울뱀에게 물려 죽을 가능성' 이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확률에 자신을 맡기는 도박 중독 인구가 300만명을 넘어섰다는 통계 자료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치솟는 집값이 주는 상실감, 부의 불균형으로 인한 열패감, 천민자본주의 악습의 잔재 등 다양한 요소가 개인을 압박한 결과이다. 300만명이라는 수치는 우리나라 성인 인구의 약 10%. 따라서 성인 10명 중 1명은 바로 도박에 빠져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개인의 사정에 덧붙여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행정편의주의도 도박산업을 부추기고 있다. 중앙집권적인 조세 체제와 수도권에 극심하게 집중돼 있는 경제는 지자체의 숨통을 죄었고, 지자체는 이러한 돈 가뭄을 탈출하는 경로로 도박산업을 이용하는 것이다. 경기도의 경우, 2001년 과천의 경주마권세로만 4,415억원을 걷어들인 이후 하남에는 경정장을, 광명에는 경륜장을 유치하려 하고 있다. 부산시는 아시아경기대회 승마장을 경마장으로, 금정사이클경기장을 경륜장으로 삼을 계획을 갖고 있고, 대전시 또한 경륜장을 만들기로 했다. 또한 전남 구례와 화순군, 경기도 영종도, 충남의 태안군 안면도 등은 카지노 유치를 하겠다고 나서 전국이 도박의 장으로 급변신 중이다.
도박은 질병인가, 범죄인가
이처럼 도박산업이 기승을 부리면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바로 국민들이다. 회사에 소홀해 실직을 당하는 경우, 빚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되고 사회적 낙오자가 되는 경우, 가정 생활의 파탄은 물론 돈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등 도박은 개인을 사회의 어두운 쪽으로 몰아간다. 하지만 도박을 무조건 범죄로만 보는 것 또한 잘못된 상황 판단이다. 도박을 하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신이나 가정 또는 직업에 피해를 미치는 도박 행위는 하나의 질병이다. 그리고 도박산업을 통해 세수를 확보한 정부와 이의 혜택을 보는 국민들 전체가 그 질병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만약에 도박산업을 필요악으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면, 이로 인한 도박중독자의 양산을 막는 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현재 정선 카지노 측에서 운영하는 도박중독센터를 비롯해 다양한 도박중독자들의 사회 복귀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할 것이고, 도박 산업에서 얻어지는 이익의 일정 부분을 도박 예방을 위한 지원에 쓰도록 법제화시켜야 할 것이다. 개인들은 대박증 후군에서 벗어나 욕심을 부리지 않는 레저로 이를 이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며, 정부는 이들이 건전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희망을 제시해 주어야 할 것이다.
'술은 일신을 망치고, 색(色)은 집안을 망치며, 도박은 고을을 망친다'고 했다. 도박은 개인과 사회를 동시에 망가뜨리는 질병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질병의 치명적인 유혹에 노출돼 있다. 이 유혹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방법의 모색. 새롭게 시작되는 한 해의 벽두에 우리들이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