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운 우체통
창 밖을 수놓는 예쁜 나뭇잎들이 형형색색의 옷으로 단장하는 걸 보니 새삼 가을이 왔음을 느낄 수 있는
계절입니다. 바스락 바스락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붉은 나뭇잎도 당신의 숭고한 사랑이 탐나나 봅니다.
아빠, 안녕하세요?
아빠라고 부르기에는 이제 너무 커버린, 아버지라고 하기에는 아직 어린 첫째 딸 현경이에요. 그래도 저는 늘 아빠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듯이 느껴지니 그냥 아빠라고 부를게요. 어릴 때부터 맏딸이어서 그랬는지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제가 늘 아빠 편이어서 엄마가 속상해 하셨던 생각이 나요. 어딜 가든 아빠 곁에는 엄마가 아니라 저였잖아요. 아빠가 두 팔을 벌려서 만들어 주시는 그늘이, 잠자리에서 소곤소곤 읽어주신 얇은 동화책이 몹시 그리워지네요. 표현하고 싶지만 차마 말할 수 없는, 전해드리고 싶지만 차마 다가가기 쑥스러운 걸 보니 저도 이제 사춘기가 온 것일까요? 시집 갈 때까지 아빠의 친구가 되어드리겠다고 했던 약속을 요즘 들어 자꾸 지켜드리지 못하는 것 같아 죄송해요. 하지만 아빠는 알고 계시죠? 제가 사랑하는 아빠는 넥타이와 양복 차림의 멋진 신사가 아닌, 크고 이름난 회사의 높은 직책을 맡으신 분이 아닌, 지금 그 모습 그대로의 아빠라는 것을요. 비록 큰 회사도 아니고, 유명한 사람도 아니지만 제겐 아빠라는 두 글자만으로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아빠는 이미 알고 계시지요?
요즘 들어 부쩍 아빠와 함께 있는 게 부끄럽게 느껴졌던 것, 아빠를 화풀이 상대라고만 생각했던 것, 정말 죄송하고 부끄럽게 여겨져요. 내가 물어도 대답을 못해 주시는 아빠가, 누군가 아빠의 직업을 물을 때면 언 제나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아빠가, 친구들이 아빠 이야기를 할 때면 늘 나로 하여금 그 자리를 피하게 만 들었던 분이셨기에 난 아빠의 존재가 부끄럽고 창피했던 적이 있었어요. 늘 우리 딸이 최고라고 하셨던 아 빠께 제가 정말 너무했죠?
아빠가 책가방에 몰래 넣어주신 용돈을 보고도 모른 척했던, 책상 위에서 잠든 저에게 따뜻한 이불을 덮어주실 때도 눈뜨지 않았던 제가 밉지 않으신가요?
'자식은 전부 도둑놈' 이라는 옛말이 요즘처럼 부끄럽게 가슴에 와 닿은 적이 없어요. 아빠 곁이 아닌 친구들 옆에 서있는 제가, 아빠의 그늘이 아닌 사회의 그늘에서 행동했던 시간이 많아져 갈수록 당신의 사랑도 점점 불빛을 잃어 가는가 합니다. 하지만 저는 사회의 구성원이기 이전에 아빠의 하나뿐인 딸이고, 한 친구의 동반자이기 전에 아빠의 친구라는 점이 더욱 자랑스럽게 느껴집니다.
창가에 새어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보다도, 빛을 받으며 하얗게 부서지는 높은 파도보다도 더욱 숭고한 당신의 사랑을 이제야 감히 알아 가는 듯합니다. 늘 아빠가 '너에게 준 사랑, 보다 크고 값진 사랑을 수많은 어려운 이들에게 두 배로 나누어 주거라.' 하셨던 말씀, 이제야 조금씩 실감이 나는 듯해요. 하지만 제게 주 신 그 사랑이 너무도 크고 소중하기에 감히 누군가에게 나누어 준다는 건 아직 잘 이해가 가지 않아요.
몇 년 전 우리나라에 찾아든 IMF의 영향으로 축 쳐진 아빠 어깨의 짐을 이젠 제가 함께 짊어지고 싶어요. 주글주글 주름진 와이셔츠가 아닌 깔끔하고 단정한 차림의 아빠야말로 우리나라 최고의 택시기사 님이신 걸요.
아빠, 이젠 아빠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서 천년이고 만년이고 함께 해 드릴게요. 비가 올 때 우산을 씌어 주시기보다 우산을 펴는 방법을 알게 해주신 아빠의 얼굴에 이젠 제가 편안한 그늘을 드리워 드릴 게요. 밝고 화려하게 타오르는 등불은 아니지만, 영원토록 밝혀질 등불을 들고 언제까지나 제 옆에 동행해 주다가도 가끔은 제가 너무 힘들고 지쳐 돌아볼까봐 마음 졸이며 바라봐 주실 아빠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외치고 싶습니다. 마음 속에서만 맴돌았던, 턱까지 올라오다 삼키고 말았던 말을 오랜만에 아빠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며 말씀드리고 싶어요. '아빠, 존경하고 사랑합니다.'라고요.
2002. 10. 15.
영원한 아빠 편이 되어드릴 큰 딸, 현경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