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지방의 두번째 문화유적 답사 코스는 정읍과 순창지역이다. 정읍과 순창은 노령산맥 주능선을 사이에 두고 각각 서쪽과 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전라북도 전체에서 보면 서부 평야지대와 동부 산지의 경계 지점쯤에 위치한 산지와 구릉, 평야가 적당히 펼쳐진 고장이다.
빼어난 단풍과 풍광을 자랑하는 내장산과 강천산, 섬진강의 상류를 흐르는 맑은 물로 대표 되는 이곳의 뛰어난 자연 환경은 시원한 감칠맛과 독특한 향기가 매혹적인 복분자술, 매콤하면서도 입안에 쩍쩍 달라붙는 듯한 순창의 고추장을 낳는 밑거름이다. 또한 유서 깊은 고적들과 들판 여기저기에서 발견할수 있는 당산나무, 남근석, 돌 장승들은 오랜 전통을 지닌 공동체문화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수확의 기쁨으로 들뜬 너른 들녘과 함께 깊어져 가는 가을, 이 모든 것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연의 위대함과 사람살이의 꿋꿋함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나면 한없이 겸손해지고 풍요로워 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읍일대
행상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백제 여인의 정념으로 빚어진「정읍사」의 고장 정읍은 땅을 한 자만 파도 물을 길어올릴 수 있을 만큼 지하수가 넉넉해서 고을 이름에 ‘井’자가 붙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들판과 구릉, 산지를 고루 갖추고 일찍이 인근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정읍에는 그 역사와 사람살이의 모습들을 한자락씩 간직한 유적들이 많다.
우리나라 제일의 가을 경치로 손꼽히는 내장산에 자리잡은 내장사, 최치원의 발자취가 어린 피향정, 그리고 호남 부잣집의 알뜰한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는 김동수 고가 등은 아릿한 정감과 함께 이 땅에 붙박고 살아 온 사람들의 삶의 내음을 생생하게 전해줄 것이다.
내장사를 싸고 있는 단풍
내장사: 연꽃처럼 벌어진 내장산 연봉의 한가운데에 푹 안겨, 내장산이 계절마다 전해주는 자연 경관을 맘껏 누리는 자리에 위치한 내장사는 백제 무왕 37년(636년)에 영은조사가 영은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절이다. 그 후 조선 명종 22년(1566년)에 회묵대사가 중건하여 이름을 지금의 내장사로 고쳤다고 한다. 현재 내장사에 남아 있는 절 집들은 1950년대 이후에 다시 지어진 것들로 조신하고 포근한 분위기를 전해주며, 근래에 세운 석등과 조성중인 석탑 이외에도 영조 44년(17文년)에 제작된 조선 시대의 동종(전북 유형문화재 제49호)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내장사 하면 열에 아홉은 단풍을 먼저 떠올린다. 절 입구에서 뒤편의 서래봉에 이르는 대협곡에 단풍이 물들 때의 아름다움은 가히 일품이다. 특히 내장산의 11월 초순은 때깔 고운 단풍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절정의 시기이다. 또한 천연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사시사철 늘푸른 굴거리나무 군락, 겨울이면 흰 눈 속에서 더욱 빛나는 비자나무 숲은 청정함도 빼 놓을 수 없는 내장산의 자랑거리이다.
피향정: 호남 제일의 정자로 불리는 피향정은 납작한 읍내집 들이 늘어선 태인면 태창리, 1번과 30번 국도가 만나는 길 모 서리에 위치하고 있다. 자못 와글와글한 주변 분위기 속에서도 혼자 덩실하게 서서 한적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정자는 신라 시대에 태산군수를 지내던 최치원이 와서 연못가를 거닐며 풍월을 읊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정자의 앞에는 피향정, 뒤에는 호남제일정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이곳은 처음 건립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지금 의 건물은 조선 현종 때 지어진 것을 두차례 중수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4면이 모두 트여 있고 빙 둘러서 난간이 처져 있다. 또한 정자 뒤에는 연못이 하나 있는데, 꽤 넓은 못 위에 가득 들어찬 연잎은 보는 사람의 눈을 시원하게 할 정도이다.
한편 칠보면 무성리에는 우리 나라 유학자의 효시로 불리는 고운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무성서원이 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도 살아 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사적 제166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동수 고가: 지금의 집주인 김동수씨의 6대조 김명관(1755 〜1822년)이 18세기 후반에 지은 이 집은 건물 대부분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당시의 가옥 구조와 살림의 형태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양지바른터에 자리잡은 이 집은 영남지역의 집중형과는 달리 네개의 마당을 중심으로 구획되어 호남 상류 주택의 대표적인 분산형 배치를 특징으로 하고 있고 전체적으로 간결한 느낌을 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26호로 지정된 이 집은 양반집의 격식이나 법도, 위엄보다는 오밀조밀하고 알뜰한 살림살이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집이다. 부엌과 광, 찬방으로 쓰이는 마루방 등 안 채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노라면 더욱 그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한 10년에 걸쳐 지었다는 집답게 집 전체와 집채 하나 하나의 공간 구성은 독창적이고도 탁월하여 살림집으로서 거의 빈틈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찾아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정주 IC를 이용한다. 내장사는 정주시청에서 29번 국도를 타고 순창 가는 길로 가다가 단풍주유소 앞 삼거리에서 792번 지방도를 따라 5.8km 가면 내장산 관광단지에 닿게 된다. 피향정은 시청 앞에서 전주 방향 1번 국도를 타고 13km 가면 30번 국도와 만나는 길 태인지서 맞은 편에 있다. 피향정에서 30번 국도를 타고 산내 쪽으로 9.3km 가면 만나는 행단삼거리에서 708번 지방도를 따라 좌회전해 산외 방향으로 2.5km 가면 오공리 신배마을에 닿는데 신배교 못미쳐 난 왼쪽 시멘트둑길을 따라 0.6km 더 들어가면 김동수 고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대중 교통을 이용할 경우 정주로 가는 기차와 고속버스가 수시로 있다.
숙박 및 별미: 내장산 내에 내장산관광호텔 (0681-535-4131)과 부흥산장 등 여관이 즐비하다. 정주시에도 숙박시설이 다수 있다. 가을에는 미리 예약을 하고 가는 편이 고생을 덜 수 있다.
별미로는 깊고 그윽한 내장산에서 자란 산채의 맛을 볼 수 있는 산채정식이 유명하다. 내장산 초입의 전주식당(0681-31 -8078) 이 권할 만하다.
순창일대
알싸하고 매콤한 맛 고추장의 대명사로 알려진 순창은 적성강 등 섬진강 상류에 위치한 하천들과 강천산 등 뛰어난 산들이 있어 물이 맑고 풍광이 좋기로 유명한 고장이다. 특히 강천산은 순창의 군립공원으로 사철 아름다운 수십리 계곡과 맑은 물, 신라 때 창건된 강천사를 안고 있다.
군데군데 펼쳐진 얼마간의 들에는 남근석과 입석, 장승 등 마을 공동체문화의 유적이 두드러진다. 이 지방의 토양과 기후 에서 자란 콩과 특유의 수질이 빚어낸 순창고추장은 예전부터 왕에게 진상될 만큼 독특하고 뛰어난 맛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곳에서 흉내낼 수 없는 이 장맛의 비결은 바로 순창의 자연 환경이다. 순창을 둘러보고 난 후 임실로 잠시 발길을 돌려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큰 용암리 석등을 둘러보는 것도 권할 만하다.
강천사: 강천산 입구에서 잔잔한 숲길로 이어지는 수십리 계곡을 끼고 두세차례 다리를 건너며 산을 향해 들어서다 보 면 어느덧 강천사에 이른다. 지금은 몇명의 비구니가 지키는 작은 절이지만 신라 진성여왕 1 년(887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긴 내력을 가진 이 절은 몇 차례 전란으로 불탔다가 다시 재건한 끈질긴 힘을 가진 절이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모두 한국전쟁 이후 다시 지은 것들이지만 옛맛을 간직한 오층석탑 (전북 유형문화재 제92호)만은 절의 내력을 고스란히 담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세가 가장 번성했던 충숙왕 3년(1316 년)에 덕현선사가 강천사를 중건하면서 세운 이 탑은 700년이 조금 못되는 세월과 수차의 전란 속에 지금은 지붕돌들이 많이 파손되었지만 강천사의 오랜 역사를 말없이 웅변해 주고 있다. 절에 이르는 강천사 계곡길은 숲 사이로 부는 맑은 바람에 몸을 맡기고 산죽의 푸른 빛, 바닥의 자갈을 말갛게 비쳐내는 투명한 계곡물로 눈과 귀를 씻으며 걷는 행복한 산책길이다.
특히 강천산과 산성산 사이를 흐르는 강천계곡은 호남의 소금 강이라 불릴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이곳에서 빼놓지 않고 꼭 가볼 곳이 현수교이다.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강천 산의 단풍과 계곡의 맑은 물은 수려한 강천산의 가을 정취를 한층 더해줄 것이다.
임실 용암리 석등
임실 용암리 석등: 용암리 북창보건진료소 골목에 위치한 용암리 석등은 일명 광명등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석등으로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지는 않지만 찾아온 노력을 충분히 보상해줄 정도인 이 석등은 높이 5.18m 로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또한 이 석등은 그 규모에 걸맞게 주변 시골집들의 지붕보다 더 높아서 마을 앞길에서부터 벌써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 한다.
통일신라 후기의 전라도 지방 석등 양식을 따른 고려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석등은 화사석에는 4면에만 화창을 뚫는 전형 양식과 달리 8면에 모두 화창이 있고, 전체적으로 상대석 이상의 각 부분이 간석에 비해 좀 큰 듯 느껴져서 균형미가 없어 보이지만 보기에 불편할정도는 아니다. 또한 이 등에 불이 켜져 팔방으로 빛줄기를 뻗어나간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그 장엄함에 압도당할 정도이다.
이 석등이 있는 곳에는 중기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데 석등 주변에는 주초석과 계단, 난간석, 축대 등 옛 중기사 터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돌계단 위의 한 민가 형태의 건물엔 중기사터에서 1900년 경 출토된 석불좌상과 철불좌상 및 연화좌대(전북 유형문화재 제82호) 2기가 모셔져 있어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져버린 절에 대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찾아가는 길: 광주를 기점으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순창 IC를 이용한다. 순창읍에서 담양 방면 24번 국도를 타고 2.8km 가면 나타나는 강천주유소 앞에 서 793번 지방도를 따라 우회전 해 팔덕을 지나 3.2km 더 가면 왼쪽으로 저수지가 보인다. 이 저수지가 끝나는 곳에서 좌회전 해 0.7km 더 들어가면 강천사 입구 주차장에 닿게 된다.
용암리 석등은 순창에서 27번과 30번 국도를 이용해 임실로 간 뒤 전주로 가는 17번 국도를 따라 4km 간 후 관촌역 앞에서 708번 지방도로를 따라 좌회전 한다. 5.2km 더 가면 신평이 나오는데 여기서 임실 가는 군도로를 따라 3km 더 가면 용암리에 닿는다. 대중교통은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하루 3회 운행하는 순창행 버스를 이용한다.
숙박 및 별미: 터미널 앞에 금수장(0674-53-3960), 고추장 골목 부근에 금산여관(0674-53-2735) 등 숙박업소가 다수 있다.
별미로는 한정식을 꼽을 수 있다. 이 지역의 특산물인 순창 고추장과 장아찌를 이용한 맛있고 푸짐한 한정식은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순창 전통 5일장터 (장날 1 • 6일)의 고추장 골목에 있는 할머니고추장장아찌집(0674-52-1312) 등의 순창 고추장 전문업소에 가면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