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7월을 넘기면서 본격적인 더위가 절정을 이루는 8월, 거의 모든 휴가기간이 이때 몰려 있어 자칫 휴가 갈 곳을 잘못 정하게 되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유명 관광지, 유적지도 예외는 아니다.
그럴 때는 가까운 유적지, 관광지로 눈길을 돌려보는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여름철 문화유적 답사 코스 선정은 겨울철과 마찬가지로 가장 신중해야 하는 법. 지혜로운 선택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정한 곳이 경기도 일대에서 피서와 유적 답사를 겸할 수 있는 강화와 여주 일대.
강화는 우리나라 5대 섬의 하나로 항몽 유적지와 전등사 · 보문사로 유명 하고 화문석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특히 마니산 참성단은 가는 곳마다 문화유적지와 거기에 얽힌 사연으로 가득한 강화도의 볼거리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깊은 곳. 시조 단군이 하강하신 이후 매년 단군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는 이곳은 우리 민족의 기본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주도 강화에 전혀 빠지지 않는 문화유적 답사 코스. 여주 한복판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남한강의 풍광과 수려함은 옛부터 문장가들의 단골 소재로 꼽힐 정도로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는 곳이다.
강화 일대
전등사: 강화에서 가장 큰 절로 알려져 있는 전등사는 고구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된 창건설을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 전등사 정문인 삼랑성문을 거쳐 울창한 나무 아래로 한 참을 걸으면 닿는 대조루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곳을 비껴 서 있는 것이 바로 대웅보 전이다. 다포집의 우아함을 한 껏 뽐내고 있는 이 건물은 창 방 뿌리에 연꽃을, 공포 위 보 머리에 도깨비를, 추녀 밑에는 나체의 여인상을 조각해 놓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대 웅전 왼쪽 옆으로 자리잡은 약사전이 있어 마치 두 채의 대웅전을 보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경내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로는 1880년에 조성한 대웅전의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 법화경 목판 104매, 중국 북송 때 주조한 범종, 고려시대 유물로 보이는 청동물동이, 대웅전에 불을 밝혔던 옥등이 값진 유물로 남아 있다.
석모도 보문사: 강화읍에서 외포리 선착장을 거쳐 배를 타고 10분쯤 가면 닿게 되는 석모도는 서해의 아름다운 정취를 한껏 맛보게 해주는 섬이다. 특히 남해 보리암, 낙산사 홍련암과 함께 우리나라 3 대 관음도량으로 꼽히는 보문사는 반드시 둘러볼 만한 곳. 신라 선덕여왕 4년에 금강산에서 내려온 희정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이곳은 흥미로운 창건설화 한 편이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선덕여왕 4년 4월. 삼산면에 살던 한 어 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졌더니 마치 인형처럼 생긴 돌덩이 22개가 올라왔다. 실망한 어부는 건져 올린 돌덩이를 바다에 던져버리기를 두 차례나 거듭했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책망하면서 내일 다시 건져 올려 명 산에 잘 모셔달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어부는 다음날 22개의 돌을 꿈 속에서처럼 건져 올려 지금의 석굴 부근에 옮 겨 놓았는데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 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경기도 무형 문화재 57호인 지금의 나한 석굴. 어느 때는 보문사에도 둑이 들어 촛대를 비롯한 유기 그릇 일체를 가지고 밤새도록 도망을 갔는데, 새벽에 보니 여전히 보문사 절마당을 뱅뱅 돌고 있더라는 것이다.
갑곶돈대: 강화대교를 건너자 마자 왼편으로 자리잡고 있는 갑곶돈대는 강화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1232년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후, 1270년까지 몽고와의 줄기찬 항전을 계속 하여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던 이곳은 강화의 관문으로 적진을 살필 수 있는 진해루가 있었으며, 물살 건너편의 문수산성 서쪽 성문인 취예루를 마주하고 있었다.
갑곶돈 주변에 자리를 잡은 강화 역사관도 반드시 둘러봐야 할 곳. 석기시대부터 이어 진 선조들의 생활 모습, 팔만 대장경 제작 모습 등의 문화 전시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쳐 운요호 사건에서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는 것에 이르기까지 고려에서 조선 · 근 · 현대에 이르는 강화도의 역사가 펼쳐져 있다.
마니산 참성단: 강화군 화도 면에 자리잡고 있는 마니산은 동쪽 품 안에 유서깊은 정수 사가 있己 산등성이의 사방으로 여러 마을을 아우르고 있다. 이곳의 자랑거리는 역시 참성단. 조성 연대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단군이 제단을 쌓았으니 적어도 4천년이 넘는 유적임에 틀림없는 이제 단은 정상에 오르면 만날 수 있다.
찾아가는 길: 서울에서 48번 국도를 타고 김포를 거쳐 강화대교를 건너면 강화도에 닿게 된다. 대중교통편은 신촌시 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는 강 화행 직행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숙박 및 별미: 강화읍내에 숙박시 설이 많다. 강화호텔 (032-937-5031), 서울장(032-934-2177) 등이 깨끗하다. 강화도의 별미는 뭐니뭐니해도 순무 김치다. 대선장(032-937-1907) 등의 음식점에서 맛 볼 수 있다.
여주일대
고달사터: 절의 전정기였던 고려시대에는 사방 30리가 모두 절의 땅이었고, 수백명의 스님들이 도량에 넘쳤다고 전해지는 고달사는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어 아쉬 움을 주지만, 고려시대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뛰어난 문화재들이 몰려 있어 아쉬운 마음을 조금은 상쇄해 주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잘 생긴 석불대좌, 강렬한 힘을 간직하고 있는 원종대사 부도비의 귀부,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고 있는 원종대사 부도는 모두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빼어난 균형미와 아름다움을 인정받고 있다. 이들 유물들은 하나같이 넘치는 힘과 호방한 기상이 분출 되는 가운데 화려하고 장엄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신륵사: 신륵사는 여주의 대 명사로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 여주 최고의 자랑거리인 곳이다. 뒤편으로는 숲이 우거지고 왼쪽 곁으로는 안벽이, 마당 앞으로는 여강이라 불리는 남 한강이 유유히 흐르는 이 절은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모습이 절경 중의 절경으로 불릴 정도. 특히 나옹선사의 열 반지로 잘 알려져 있는 이곳은 대대적인 규모의 중창불사가 가능했던 이야기가 흥미롭다. 나옹선사가 열반하자 하늘에서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용이 호상하듯 신기한 일이 벌어지면서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는 것이 그것.
빼어난 강변 풍경을 감상하면서 걷다 보면 왼쪽으로 만 나게 되는 것이 구룡루다. 나옹선사가 아홉 마리의 용에게 항복을 빌고 그들을 계도하기 위해 지었다는 전설의 누각이 바로 이곳. 구룡루를 끼고 돌면 맞은 편에 극락보전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아미타불 도량인 신륵사 금당이다. 금당 앞에는 보물 제225 호인, 구름과 용 무늬가 아름 다운 다층석탑이 서 있고, 양 옆으로는 스님들의 선방인 선각당과 고려시대 이후 시인 묵객들이 묵어가며 자연을 노래했던 적묵당이 자리잡고 있다. 강 건너편에서 건너다보는 대웅전 용마루의 모습은 울창 한 숲속에 떠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7점의 보물과 1 점의 볼거리 외에도 더위에 지친 심신을 잠시 맡겨 둘 수 있는 곳이 바로 신륵사다.
영월루와 창리 · 하리 삼층석 탑: 푸른 강물과 신륵사의 전경이 그림처럼 한 눈에 들어 오는 영월루는 신륵사라는 이름을 탄생케 했다는 ‘마암’이라는 바위 언덕에서 있는 고풍스런 누각이다. 여흥 민씨의 시조인 ‘민청도’가 이곳 마암 바위굴에서 나왔다는 전설이 깃든 이곳은 여주팔경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탁 트인 조망이 자랑거리. 또한 영월루 바로 아래에 있는 창리 · 하리 삼층석탑도 볼거리다. 사이좋게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이 두 탑은 각각 고려시대. 신라시대 석탑에 나타나는 특징들을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창리와 하리라는 이름은 각각의 지명에서 있던 탑을 옮겨오면서 그곳의 지명을 그대로 따온데서 유래했다.
찾아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여주인터체인지에서 빠져 나와 여주로 들어가면 된다. 양수리에서 6번 국도를 타고 양평으로 간 뒤, 다시 37번 국도를 타고 여주로 가는 방법도 있다.
숙박 및 별미: 옥천장(0337-85-2476), 대 성장 (0337-85-2309) 등이 비교적 깨끗하다. 여주의 별미는 남한강에서 잡 아올리는 싱싱한 민물회나 매운탕. 벽절궁(0337-85-4203). 미아리 회관 (0337-85-2890)의 매운탕 맛이 일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