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재
이모나 삼촌뻘이 될 만한 나이의 손위 다섯 남매 가운데 막내였던 나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나는 제일 큰 오빠를 ‘큰큰오빠’라고 불렀는데, 큰큰오빠의 사랑은 그 중에도 각별했다. 스물이 다 된 나이에 생긴 동생이라 무척 새삼스럽고 안쓰러웠는지 오빠는 나를 목말을 태우고‘하얀 아카시아 꽃잎이 날리는 향긋한 동구 밖 과수원길’을 누비고 다니며 딸처럼 아껴주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큰큰오빠가 결혼을 하겠다고 집에 알려왔다. 오빠에겐 만혼이었고, 그때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아버지께서 사업 실패로 남기고 가신 가난이 꽤 오래 우리 가족을 시달리게 했던 무렵이라 우리 집에서는 오빠의 색시가 될 아가씨에게 변변한 금가락지 하나도 해 줄 여력이 없었다. 늘 아버지 같이 자상했던 오빠의 결혼에 멋진 선물을 준비하고 싶었지만 내게는 돈이 없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 어느 잡지사의 글 공모 광고를 보게 되었고, 나는 망설임 없이 응모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1등을 하면 유명한 회사의 남녀 손목시계 세트를 준다는 것 때문이었다. 무척 진실한 마음으로 글을 써서 보냈고, 얼마 후 잡지사로부터 내가 쓴 글이 1등을 했다는 믿기지 않는 연락이 왔다. 결혼식이 가까워진 어느 날 저녁 식사 후에, 꼭꼭 숨겨두었던 그 물건을 꺼내 큰오빠에게 건네며 “큰큰오빠, 결혼 선물!”하며 방긋 웃었다. 드디어 나의 횡재만큼이나 찬란히 빛나는‘남녀 손목시계 세트’가 그 정체를 드러냈다. 식구들은 모두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보았고, 나는 차근히 내막을 설명했다. 우리 가족은 많이 기뻐했고 아주 많이 울었다. 철부지 같았던 막내가 가난의 불편을 이겨 나가는 모습이 가슴을 아릿하게 한 탓이었을 게다.
서릿발 같은 머리카락과 제법 깊어진 주름살이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하는 큰큰오빠 부부는 지금까지도 그 시계를 갖고 있다. 시계를 차고 외출이라도 하는 날이면“허허, 우리 막내가 선물해준 시계가 얼마나 좋은 건지 아직시간도 잘 맞고 끄떡없네!”하며 오빠는 종종 농담 반 자랑 반인 전화를 걸어온다.
큰오빠는 훗날, 아버지 없이 치르게 된 나의 결혼식을 가슴 아파하면서 그 보잘 것 없는 시계보다 더 많은 정신적·물질적인 것들을 내게 주었고, 그때도 오빠는‘그 시계는 단지 시계가 아니고 막내 여동생의 소중한 마음이었다.’고 얘기를 하고 또 하였다. 열여덟살에 건넨 조그만 행운하나로 평생 동안 사랑받으며 살수있는 막내동생이 되는 큰 횡재를 얻었으니 나는 참으로 행운아다.
아름다워 마땅한 모든 것들에 꽃이 돋는 시절이다. 생각난 김에 남편에게 말해 조만간 큰오빠네 부부와 이 푸른시절 속으로 오붓하게 나들이라도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