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역사는 이렇게 탄생되었다_달은... 해가 꾸는 꿈(1992)
박찬욱 감독의 데뷔작이 뭐였더라? 단번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학 졸업 후 이장호 감독의 연출부로 일했던 그는 이때의 인연으로 곽재용 감독의 데뷔작 <비오는 날의 수채화>(1989)의 조감독을 맡으며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1992년, 당시 요즘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던 가수 이승철이 주연한 영화 <달은... 해가 꾸는 꿈>으로 감독 데뷔를 한다. 제목부터 뭔가 ‘의미심장’ 그 이상의 ‘오글거림’이 담긴 이 영화는 반짝 ‘이승철 효과’를 보나 싶더니 저조한 흥행 성적으로 재빨리 대중과 이별했다. 스물아홉 청년 박찬욱의 패기와 괴벽만을 확인할 수 있었던 흑역사의 탄생.
삼세판의 기적을 쏘다_공동경비구역 JSA(2000)
흥행과 비평 모두 실패한 데뷔작 이후 박찬욱은 잠시 연출자의 무게를 내려놓고 영화평론가의 길을 걷기도 했다. 그러다 내놓은 1997년의 두 번째 장편영화 <3인조>도 흥행 참패. 회생 불가능의 기로에 서서 절망할 법도 한데 하늘이 도운 건지 이 무렵 박찬욱은 <공동경비구역 JSA>의 감독을 제안받는다. 드라마작가 박상연의 소설 를 각색한 시나리오를 보고 매료된 박찬욱은 이 영화를 완성했고 결국 대성공을 거두면서 단숨에 인기 감독으로 급부상했다. 남북한 병사들의 우정을 통해 대한민국의 분단 현실을 그려낸 이 영화는 가슴 아픈 비극을 다루면서도 틈틈이 터지는 유머와 섬세한 카메라워크로 큰 사랑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분단 역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 중 수작으로 손꼽힌다. 한두 번 넘어졌다고 세 번째 또 넘어지라는 법은 없는 법. 삼세판의 기적을 쏘며 박찬욱은 비상했다.
그렇게 세계적인 감독이 되다_올드보이(2003)
삼세판의 기적을 쏜 박찬욱은 ‘국내 최초 하드보일드 영화’ <복수는 나의 것>(2002)과 옴니버스 영화 <여섯 개의 시선>(2003)을 통해 해외에서도 주목받는 감독이 되었다. 어느덧 제작자의 입김에서 자유로워져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되는’ 감독이 된 박찬욱. 그의 B급 감성은 일본 만화가 미네기시 노부아키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올드보이>를 연출하며 정점을 찍었다. ‘오대수’라는 이름에 걸맞게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다가 딸의 생일날 영문도 모른 채 15년의 감금 생활을 시작한 남자와 그를 가둘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남자. 그리고 이들 사이에 놓인 한 여자가 죽어서도 풀지 못 하는 비밀을 놓고 처절하게 피를 튀기며 싸운다. ‘15년’, ‘추적’, ‘비밀’이라는 키워드 외 자세한 줄거리도 공개하지 않고 완성된 이 영화는 어쨌든 동물이지만 그래도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보여주었다.
<복수는 나의 것>으로 복수극의 서막을 열었다면 이 영화를 통해 두꺼운 장막을 거둬낸 셈. 박찬욱은 이 영화로 제57회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명감독으로 거듭났다. 그렇게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 영화감독 하나를 얻은 것이다.
통쾌한 복수극으로 하얗게 불태우다_친절한 금자씨(2005)
<올드보이>로 인기와 명성을 모두 거머쥔 박찬욱은 더욱 속도를 냈다. 이제 여성판 복수극을 이야기할 때가 됐다고 판단하여 치밀하게 준비하기 시작한 것. 당대 최고의 스타 이영애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 <친절한 금자씨>는 누구라도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미모의 범죄자 ‘금자’가 그토록 복수하고 싶었던 이유, 복수해야만 하는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세기의 명대사 “너나 잘 하세요”를 탄생시킨 이 영화는 치밀한 스토리라인과 화려한 미장센, 드라마틱한 효과를 더해주는 OST까지 가세하여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박찬욱의 복수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이 영화는 복수하려는 사람은 살고 당해야 하는 사람은 죽는 결말로, 완벽한 응징에 성공하여 더욱 통쾌하다. 잔인한 복수의 도구로 칼이든 총이든 가리지 않고 나오는 이 영화에서 완벽한 복수를 마무리 짓는 도구는 의외로 어린이 가위 한 자루. 그만큼 이 영화는 복수해야 하는 사람이 설령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해도 끝까지 성공할 기회를 주는, 기승전결이탄탄한 영화였다. 박찬욱은 물론이고 배우들이 연기한 영화 속 캐릭터도 모두가 하얗게 불태웠던 장렬한 복수극이다.
늘 새롭고 여전히 짜릿한 거장의 미래
박찬욱이 졸업한 서강대학교에는 지금도 영화과가 없다. 철학을 전공했던 그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을 보고 영화 예술의 매력에 흠뻑 빠져 영화 관련 원서를 읽어가며 영화인의 꿈을 키웠다. 가지 않은 길을 걷는 데 두려움이 없던 그는 영화과가 없는 학교에서 영화 동아리를 만들어 토론하고 직접 영화를 만들면서 꿈을 향해 한 발짝씩 다가갔다. 복수 3부작 이후에도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박쥐>(2009) 등의 화제작을 내놓으며 끝없이 진화한 그는 2013년 할리우드에 입성하여 니콜 키드먼 주연의 <스토커>를 연출했다. 2016년에는 일제강점기 귀족 아가씨를 둘러싼 음모와 반전을 그린 스릴러 <아가씨>로 또 다시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20여 년 동안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꾼이면서도 자신의 색깔을 버리지 않는 천생 영화인, 박찬욱. 늘 새롭고 여전히 짜릿해서 더욱 기다려지는 그의 차기작은 영국 BBC의 드라마 <더 리틀 드러머 걸(The Little Drummer Girl)>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