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일을 해야만 사명감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나는 왜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열심히 돌을 다듬고 있던 석공 세 사람. 땀 흘리고 먼지를 마시며 일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지나던 행인이 물었다. “당신들은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세 석공은 각기 달리 대답했다. 첫 번째 사람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열심히 돌을 다듬고 있는데 보면 모르슈? 아이고 내 팔자야”라며 투덜댔고, 두 번째 사람은 무표정한 얼굴로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밥벌이를 하고 있소”라고 했다. 세 번째 석공은 아주 만족스런 얼굴로 “크리스토퍼 렌 경의 대성전 건축에 참여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자신의 일에 상당한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이 이야기는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이 설계한 영국의 세인트폴 대성당의 건축 예화다. 석공에게 질문한 행인은 바로 크리스토퍼 렌이었다. 세 번째 석공의 말을 듣고 더욱 책임감을 느낀 렌은 건축물을 완벽하게 만들어 위대한 역사로 남게 했다. 이처럼 똑같은 일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행복의 크기는 달라지고, 스스로 동기부여가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감동을 주게 된다.
일은 고통이 아닌 신이 주신 선물이다
사람은 일을 통해 끊임없이 존재감을 확인받고, 태초부터 지금까지 동식물을 기르며 다스리는 일을 이어왔다. 이로 인해 뿌린 대로 거두는 수고를 몸소 체험하고 공동체를 지켜왔다. 그러는 동안 자신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꼈을 텐데 이게 바로 우리가 일을 멈추지 않고 꾸준히 이어온 실낱같은 희망이 된다. 그런데 위 이야기에서 이런 상황을 가정해보면 어떨까? 완공 일자를 맞춰야 하는 세 사람이 뙤약볕 아래에서 쉼 없이 육체노동을 하고 있다. 물 한 모금 마실 시간도, 화장실에 갈 여유도 없고 점심도 허겁지겁 급히 먹어야 하는 나날의 연속.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세 번째 석공 같은 사람을 기대할 수 있을까? 99% 이상 첫 번째나 두 번째 석공의 모습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처럼 극한 상황에 내몰릴수록 주어진 일을 ‘고통’으로 여기게 된다. 이럴 때 세 번째 석공 같은 사람이 많아지길 기대하는 것은 건축 담당자의 이기심일 뿐이다. 사람을 배려하는 복지가 마련된 곳에서만 우리는 세 번째 석공이 많아지길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일을 고통으로 느끼는 원인은 ‘부정적인 직업관’과 ‘최소한의 배려가 없는 근무 환경’이다. 스스로 세 번째 석공이 되고 싶다면 일을 통해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긍정적인 직업관’을 갖고, 기업은 이런 직원들의 직업관이 유지·강화될 수 있는 ‘제도적 차원의 배려’를 해야 한다. 모두 행복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도 변화를 요구할 수도 없다. 함께 노력하는 만큼 변화의 폭은 커진다.
불평꾼 ‘직장인’이 아닌 행복한 ‘직업인’이 되자
마땅히 다른 할 일을 찾지 못해 억지로 일하는 ‘불평꾼’은 주어진 일 외엔 절대로 더 하지 않으려고 해서 모두를 답답하게 한다. 일을 ‘직업’이 아닌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직장’으로만 여기는 이들은 ‘퇴근 이후의 삶을 나의 진짜 삶’이라고 생각하며 일요일 밤마다 불안해하고 월요일 아침마다 불행해진다. 소명의식을 갖고 일하는 ‘직업인’의 삶을 지향해보자. 이들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와 당위성을 꾸준히 질문한다. 그 의미와 이유를 찾는 순간 놀라운 몰입과 실행력의 엔진이 가동되기 시작한다. 세 번째 석공이 그랬듯, 일에 대한 강력한 에너지가 자기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는 내가 속한 조직에서 불평꾼, 직장인 또는 직업인 중 어떤 모습으로 일하고 있을까? ‘오늘 하루도 당신 거예요!’라는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의 클로징 인사처럼, 하루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행복한 직업인들이 우리 사회에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