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흐른다
연둣빛부터 짙푸른 녹음까지 지금이 아니고선 볼 수 없는 다양한 초록빛의 향연을 강원도 영월에서 만끽할 수 있다. 카르스트 지형, 감압곡류하천, 하안단구지형, 남한강 최대 광산지역 등 다양한 자연 환경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유명해서 20여 개의 박물관이 산재해 있다.
또 단종의 유배지여서 단종에 관한 축제도 열리고 영화 <라디오 스타>의 영화 촬영지를 따라 가는 여행도 할 수 있다. 영월은 어떤 관심사를 갖더라도 누구나 만족할 만한 매력이 있다.
강원지방우정청 우편분류과에서 근무하는 강석기 씨는 이번 여행지를 영월로 택했다. 강원도에 살면서 모처럼의 여행지를 강원도로 정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지난 해 강원지방우정청에서 발행한 <강원지역 산간오지 집배원 탐방기>의 취재를 위해 열두 명의 집배원들과 강원도 곳곳을 누볐지만 여전히 많은 매력을 지닌 강원도를 좀 더 알고 싶어서라고 한다. 게다가 직장 동료이자 아내인 예금영업과의 김옥희 씨와 연애시절 함께 자주 만나던 곳이 영월이라 더 의미가 깊다고 했다. 당시 태백이 근무지였던 강석기 씨와 철원이 근무지였던 김옥희 씨는 2007년 입사 동기로 만나게 되었는데, 이후에 안 사실이었지만 같은 대학을 나온 선후배였단다. 인연은 이렇게 만나는 것인가 보다. 당시 둘의 근무지 그 중간 지점이었던 이곳 영월은 이제는 두 사람에겐 추억을 상기시키고 21개월 된 딸 혜은이와 뱃속의 아이에게는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줄 여행이 될 터였다.
신선도 잠시 쉬었다 가는 곳
지리학을 전공해 학부 졸업논문을 쓰기 위해 영월을 자주 찾았던 강석기 씨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는 요선정. 영월 10경 중 하나이지만 많이 알려진 곳은 아니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한산한 것이 요선정을 가는 길목 또한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느낌이 묻어난다. 가는 내내 들리는 것이라곤 바람 소리와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그리고 새들의 지저귐뿐. 먼저 보이는 것은 높게 솟은 무릉리 마애여래좌상. 높이 3.5 미터의 물방울 모양의 바위에 얼굴은 양각인데 몸은 음각으로 새긴 독특한 형태의 석불로 그 생김새의 투박함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행여 넘어질 새라 바위와 불상 사이에 누군가 괴어 놓은 짱돌이 귀엽다. 불상의 뒤로 돌아가 보니 아득한 절벽 아래로 굽이쳐 흐르는 주천강과 탁 트인 정경이 과히 신선이 좋아했을 만하다.
요선암은 ‘신선을 맞이하는 바위’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문예가 봉래(蓬萊) 양사언이 평창군수 시절, 이곳의 아름다움에 반해 선녀탕 위의 바위에 요선암이라는 글씨를 새겨놓은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요선암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만든 돌개구멍은 오랜 세월에 걸쳐 하천에 의해 운반되던 자갈 등이 오목한 화강암에 들어가 소용돌이와 함께 회전하면서 기반암을 마모시켜 원형이나 타원형으로 구멍을 내서 생긴 것인데 자연이 빚어 놓은 곡선이 참으로 기묘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구멍에 고인 물에 올챙이도 보이고 흐르는 강물엔 송사리 떼도 보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위를 쓰다듬으며 멀리서 들려오는 미륵암의 풍경소리를 듣자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세월의 흐름이 만들어낸 작은 한반도
다시 기운을 내서 찾아간 곳은 선암마을 한반도지형 탐방로. 역시 영월 10경 중 하나이지만 앞서 갔던 요선정과 달리 KBS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의 촬영지로도 유명해 주차장부터 이미 차들로 꽉 차 있었다. 전망대까지 잘 조성된 서강길(왕복 약 2km)과 샛길(왕복 약 1.6km) 중 샛길을 따라 걸어본다. 왕복 30분 정도 소요되는 통행로에서도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은 어르신들과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 등 많은 방문객을 만날 수 있었다.
전망대로 가는 길 왼편엔 이곳을 다녀간 방문객들이 하나씩 쌓은 돌탑들이 나란히 있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돌을 하나씩 올릴 때 마다 그들은 무슨 염원을 담았을까 잠시 상상해본다. 전망대에 다다르니 정말 신기하게도 한반도를 꼭 닮은 지형이 눈앞에 보인다. 국가지정 명승 제75호로 지정된 이곳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모습을 강이 대신하여 흐르고 동고서저 지형까지 우리나라의 모습을 꼭 닮았다. 저 멀리 부드러운 능선의 산을 따라 흐르는 강물 위로 뗏목체험을 하는 사람들이보인다.
소박한 정이 오가는 5일장
영월에는 아직도 4, 9일마다 5일장이 열린다. 늦은 오후에 도착해 이미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간 터여서 둘러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다른 지역의 5일장에비해 규모가 큰 편은 아닌데다 화려하진 않지만 갖가지 해산물, 과일, 야채 등 신선식품부터 생활용품까지 그야말로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는 장터다. 영월대교를 따라 선 장터의 초입엔 오디오 드라마를 틀어 놓았는데 높게 솟은 봉래산과 산을 감싸고 유유히 흐르는 동강변에서 지금껏 자리를 지켜온 5일장과 그곳을 지키는 장돌뱅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방문객들은 옛 이야기를 들으며 금강정까지 장돌뱅이가 걸었던 길을 따라 가 본다.
갓 튀겨낸 수제어묵을 맛보며 소박하게 선 시장을 둘러보는데 나른한 오후 다 함께 손을 모아 다시 한 번 파이팅을 다지는 상인들에게서 이곳을 지켜온 자부심과 활력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