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우정 130년 인터뷰
체신지 편집장으로 첫발을 내디뎠던 때가 언제였나요?
이기열 선생
1973년이고요. 당시 작은 출판사에 다니고 있다가 체성회에서 체신부 관보인 <체신>지 편집장을 채용하는 공고를 보고 입사하게 됐어요. 당시 월 급여가 일반 회사보다 많이 낮아 오래 다닐 생각은 없었는데, 결국 1997년 정년퇴직까지 25년간 체신부와 정보통신부 또 전국 우체국을 돌며 수많은 우정인을 만났네요.
첫번째 인터뷰 혹은 기억에 남는 우정인이 있을까요?
이기열 선생
1976년 초여름이었는데 취재를 나갔어요. 당시 취재칼럼 제목이 ‘80리 길의 고된 여로’였어요. 서울시내 집배원의 하루 일과를 시작부터 끝까지 밀착 취재하는 콘셉트였는데, 그때 집배원을 김광희 씨로 기억합니다. 집배원은 20kg이 넘는 가방을 메고 하루 종일 영등포 골목길을 뛰었어요. 당시 오토바이는 없었고 골목길이 좁아서 자전거도 불편했어요. 하루 이동거리가 대략 80리였죠. 30km가 넘는 거리를 걷고 뛴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죠. 고되지만 자기 일에 대한 긍지와 맡은 바 일을 꼭 해야 한다는 성실함이나 책임감이 느껴져서 근 40년이 지난 일이지만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어요.
130년 우정역사가 근현대사에 있어서 갖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이기열 선생
한국우정의 시작인 우정총국은 대한민국 최초 신식 행정제도를 상징합니다. 우리나라 신식 행정제도의 출발이었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이전 행정제도는 백성을 위한 행정제도가 아니라 통치자를 위한 것이었어요. 통치를 편하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죠. 그런 의미에서 백성을 위한 행정제도 즉 한국우정의 시작과 함께 우리나라의 보편적서비스도 출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초의 제도’라서 최초로 도입한 제도의 형태나 기술도 많았어요. 이 모든 것이 우정사뿐만 아니라 한국사에 있어서도 매우 큰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우정가족의 남다른 특징이 있을까요?
이기열 선생
제가 보기에 우정가족은 사업에 대한 자부심이 크고 성실하며 착한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글 못 읽는 사람들이 없지만 과거에는 문맹률이 높은 편이었죠. 편지라는 게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하다 보니 당시 체신인들은 체신사업을 문화사업이라고 했어요. 현재 직원들에게 우정사업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면 일부분 이런 분위기가 남아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보편적서비스를 실천하는 정통성에 대한 자부심과 통신이라는 첨단기술로 항상 앞서가는 이미지에 대한 자부심도 물론 컸습니다. 또 늘 비판하고 대립하기보다는 수용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아무래도 소통과 보편적서비스라는 사업적 특징 때문인지 제가 만난 우정가족 대부분이 착했습니다.
한국우정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기열 선생
이제 한국우정이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야하는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전 개인적으로 미래사회에는 서비스산업이 국민에게 박수를 받고 재밌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해 왔습니다. 과거에는 권력기관을 소위 대세라고 했지만 앞으로는 우정사업본부와 같은 서비스기관이 국민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을 것입니다. 13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곁에 있어 그 소중함을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정가족의 자부심을 지키고 키워 주어야 합니다. 현재는 대체통신수단의 발달로 우정사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대체통신이 갖지 못한 우정사업의 속성은 감성과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지털소통의 부작용을 치유하는 우정사업의 문화적요소를 되찾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