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3월 27일 우정총국이 설치되었다. 당시 국왕 고종의 하교(下敎)는 다음과 같다.
“각국과 더불어 통상한 이래로 내외의 교섭이 날로 증가함에 따라 공무와 상업의 통신이 크게 증가하게 되니, 그 통신을 적합하게 전달하지 않으면 멀고 가까운 곳이 일체가 될 수 있도록 서로 소식이 닿을 수 없다. 이에 명령하니, 우정총국을 설립하여 각 항구에 왕래하는 통신을 주관하도록 하고, 국내 우편도 점차 확장하도록 하여 공사(公私)의 이익을 거두도록 하라.”
우리나라 우정총국의 설치는 일본보다는 10여 년 뒤졌으나 청국보다는 빠른 것이었고, 다른 근대문명의 도입에 비하여도 확실히 선진적인 것이었다. 또 설치 목적이 국내 우편보다는 외국과의 통상을 원활하게 하는데 있었다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동시에 이것은 홍영식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의 쾌거이기도 했다. 홍영식은 1880년 수신사(修信使)의 일행이자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서, 일본을 방문하여 우편제도를 시찰했고, 1883년 보빙부사(報聘副使)로서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우정제도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서부연합전신국과 뉴욕우체국을 방문하여 시찰한 바 있었다. 그런 노력이 결실을 거둔 것이었다. 아쉽게도 좌절되고 말았지만, 자발적이고 진취적인 기상을 엿볼 수 있고 동시에 개화의 상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몇 단계의 준비를 거쳐 10월 1일(음력) 업무를 개시했다. 이로써 조선은 근대의 문턱에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전에는 편지를 어떻게 주고받았을까? ‘편지를 쓰는 것이 독서인에게 가장 가까운 일(書札最近儒者事)’이라는 말이 있듯이, 조선시대 사람들은 편지를 많이 썼다. 그런데 편지를 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역참(驛站) 제도가 있었지만, 그것은 국가의 공적인 목적을 위하여 설치된 교통통신기관이었다. 속보법을 익힌 지자군(持字軍)이 편지 전달을 전담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민비의 비밀 연락을 담당했던 이용익(李容翊)의 경우처럼 부호가(富豪家)에 한정된 것이었다. 급할 때는 편지 전달을 위하여 전인(專人)을 고용하기도 했지만, 삯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하여 편지는 주로 인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퇴계 이황의 경우를 보면, 서울에 있는 손자에게 편지를 보내기 위하여 서울 가는 인편을 인근 고을에까지 널리 수소문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인근 고을에서 서울에 갈 일이 있는 사람은 퇴계에게 알려 편지를 부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인편이 있으면 반드시 편지를 쓴다(有便必有書)’는 말도 있었다. 친한 사람의 인근에 사는 사람이 오며 편지를 가져오지 않으면, ‘인편이 오는데 왜 내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까?’ ‘내가 혹 잘못한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의아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우정총국이 설치됨으로써 인편에 의지하지 않고 일반인들도 우편제도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기쁜 소식, 슬픈 소식, 그리운 마음, 유용한 정보 등이 방방곡곡 활발하게 오가고, 우편 망을 통하여 신문과 잡지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지식이 보급되고 전국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지난 130년간 꾸준히 발달해온 우편제도의 역사는 한국 현대사의 발전과 발걸음을 나란히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통신수단이 등장하여 우편제도를 밀어내고 이미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모바일 통신이 그것이다. 20여 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기술들이 구현되어, 엄청난 양의 정보가 동시에 전달되고 확산된다. 130년 전 우정총국의 설치와 맞먹는 엄청난 변화가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동시에, 썼다가 지우기를 거듭하며 좀 더 좋은 편지글을 만들어 보려고 밤새워 애쓰던 일, 그리운 사람에게서 온 편지를 읽는 설렘, 편지지에 빽빽한 아름다운 펜글씨를 읽는 즐거움. 이런 것들은 이제 다시는 맛보지 못할 까마득한 추억 속의 일이 되어 버렸다. 종이로 전하던 마음을 이제는 모바일의 기능과 속도가 대체하게 된 것이다. 끝 간 데 없이 빠르게 나아갈 것으로 보이는 이 변화 속의 사회는 장차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