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모습, 우체국 이모저모
1946년 10월호
<우정의 노래> 그 처음으로
체신가사 - 김기림
명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아마도 이 가사는 오늘날 <우정의 노래>의 조상 격이 되지 않을까 싶다. 1930년대 등단하였으며, 한국 모더니즘 문학을 이끌던 9인회 중 한 명이었던 김기림 시인이 작사한 이 노래는 당시 광복과 더불어 체신인이 보여 주어야 할 모습을 노래 로 표현하고 있다.
1969년 5월호
우체국 창구 운영의 가이드? 창구사무시범
중앙우체국 창구사무시범 소개 - 기획관리실 1960~70년대 우체국 창구는 늘 사람이 붐볐다. 그만큼 고객들을 빨리, 그리고 친절하게 응대하는 것은 우체국이 당면한 숙제였다. 1969년 4월 30일 체신부장관을 비롯하여 부내 간부, 시내 우체국장 등 70여 명이 중앙우체국에 모였는데, 우체국 창구 시범 운영을 참관하기 위해서였다. 관련 기사에서는 예시 등을 통해 어떻게 손님을 응대해야 하는지와 창구 배치, 서식 등 과 관련한 여러 가지 개선 방안들을 안내하여 타 우체국이 참고 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69년 9월호
달나라 옥토끼에게 편지를!
달 탐험 업적 전시회 - 우주우체국
저 멀리 달을 보며, ‘저기엔 누가 살고 있을까? 계수나무와 옥토끼가 정말 있을까?’ 하고 생각 하던 시절부터 달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까지도 달 여행은 많은 이들의 꿈이자 도전이었다. 1969년 7월 우주선 ‘아폴로 11호’의 달 여행으로 마침내 그 꿈은 이뤄졌다. 인간이 달에 첫발을 내디뎠던, 그 역사적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그해 8월 시청 앞 덕수궁 돌담길에서는 달 탐험 업적전시회가 열렸고, 전시회 입구에는 우주우체국이 설치되었다.
달나라에 편지를 보내고 싶은 아이들이 잔뜩 몰려서일까? 사진 속 우주우체국은 만원이다.
1969년 12월호
우체국 창구에서 바라본 연말연시 모습
창구에서 엿본 세모경기 - 본지기자
40여 년 전 연말 풍경은 어땠을까? 명동 한복판에 위치한 서울중앙우체국은 연말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 중 하나였다. 연하우편물과 성탄절 물량이 많았던 것도 있지만, 당시 서울에 하나밖
에 없는 야간 창구 운영국이었기 때문에 밤에도 창구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에 반해
서울국제우체국은 연말이라 하더라도 평소와 별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이유를 보니 당시 동경 올림
픽이 개최되고 난 바로 뒤라 이미 많은 물품이 오고 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1970년 3월호
2017년의 직장탐방 ‘우체국사람들’
1970년의 직장탐방은?
직장탐방 - 서울마포우체국
1969년 12월 새롭게 개국한 마포우체국을 방문하여 취재한 기사이다. 2015년 7월 마포우체국은 재건축 공사로 도화동(공덕역 인근)에서 마포동(마포역 인근)으로 잠시 이전하였는데, 재건축 전 세워진 건물이 바로 이 직장탐방 취재 직전에 건립되었다.
당시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로 세워졌던 (이후 5층으로 증축되었다) 마포우체국의 모습과 주요 특징을 기사를 통해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당시 마포우체국의 업무 내용과 우체국장의 이야기도 엿볼 수 있다.
1973년 12월호
아이들에게 집배원의 모습이란?
제1회 고마운 집배원 아저씨 글짓기 현상 모집
1973년 체신부 우정국에서는 집배원의 노고 를 사회적으로 인식시키고 그들의 공공봉사 정신을 강화하는 동시에, 어린이들에게 우편 사업의 사회성 및 공공성을 인식시키고자 소년한국일보사와 함께 ‘고마운 집배원 아저씨’ 글짓기 대회를 개최하였다. 제1회 글짓기 대회에서는 경북 금릉 아천국민학교 5학년 이던 이종모 군이 ‘날마다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으로 1등을 수상하였다.
1973년 1월호, 1973년 8월호
1973년 새해 첫날, 그리고 그해 여름
1973년 특별했던 우체국의 모습들 (우편배달 출발, 임시출장소)
이 사진 속 풍경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지만 또 볼 수 없는 풍경이기도 하다. 좌측의 풍경은 새해 첫 우편배달의 모습이다. 오늘날에도 새해 첫날이 되면 매스컴이나 온라인 뉴스 등을 통해 집배원들이 다 함께 배달 현장으로 출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사진은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느낌을 전해 준다. 우선 큰 행사장에 있을 법한 대형 현수막과 만국기 등이 눈에 띄며. 양옆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박수를 치고 있는 모습도 낯선 풍경이다.
두 번째 사진은 여름철이면 휴양지에 설치되었던 임시우체국의 모습이다. 해수욕장 바로 옆에서 우체국을 이용하기 위해 수영복을 입고 줄을 선 사람들의 풍경이 재미있다. 최근에도 각종 행사장 등에서
임시우체국을 만날 수 있지만 해수욕장에 건물형태의 임시우체국이 설치되는 경우는 드물고 보통은 이동우체국으로 만날 수 있다.
1976년 1월호
편지는 기차를 타고
철마와 함께 달린다 - 편집실
한때 가장 빠른 우편물 운송 수단이었던 철도 우편이 사라진 지도 10여 년이 훌쩍 지났다. 1904년 경부선 철도가 만들어지면서 처음 시작된 철도우편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운송속도와 운송량이 큰 폭으로 증가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우편물 전용 화차를 연결하여 배달 시간을 크게 단축하였다. 그러다 1973년에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철도 우편 전용 열차가 탄생하게 되면서 철도 우편의 새 장을 열게 되었다. 1976년 1월에 실린 철도 우편 체험기 내용을 보면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1990년 7월호
제비가 찾아왔어요
체신 제비 찾아온 강남 제비
1990년 7월 사보에 재미있는 사진이 실렸다. 인천 가좌동 우편취급소 간판에 제비가 둥지를 틀고
있는 모습이었다. 제비 심벌마크 바로 위의 둥지 속에서 아기 제비들이 울어대고 있는 모습이 눈길
을 끈다.
그때 그 모습, 우체국 예체능
1963년 5월호
체신야구단이 결성되다
체신야구단결단식
체신부의 야구단은 일본 강점기에 최초 창단되었다가 해산되었다. 그러다 독립 후 다시 부활하여 실업야구 경기에 출전하는 등 활발히 활동을 하였으나 6·25 한국전쟁으로 또다시 해산하게 되었다. 이후 1963년 국가적으로 체육활동을 장려하고 나서자, 전국 각지의 체신부직원 중 선수를 모집하여 결단식을 하게 되었는데, 이 기사는 그때 결성된 야구단의 이야기이다.
1970년 4월호
체신관서 등산대회
제1회 체신관서 등산대회
1970년 4월 19일 안양에서 제1회 체신관서 등산대회가 열렸다. 체신부 내 등산 애호가들이 300명 이상 참가하는 등 큰 행사로 열렸으며, 남자부, 여자부 구분하여 경기를 펼쳤다. 당시 남자부는 동대문우체국이, 여자부는 체신부 저금보험관리국이 우승하였다.
1970년 6월호
낚시대회에 참가한 체신부 강태공들
1970년 춘계 낚시대회
1970년 5월 17일 경기도 용인시(당시 용인군)에서 체신부 주최 춘계 낚시대회가 열렸으며 100여 명의 태공들이 출전한 사진이 사보에 실렸다. 당시 체신부차관이 함께 참가하여 열띤 경기를 펼쳤던 모습이 사진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1970년 6월호
전국통신경기대회
제12회 전국통신경기대회
오늘날에는 바코드리더기로 등기라벨을 읽고 우편물이 지역별로 자동 분류가 되지만, 예전에는 우편 소인을 얼마나 빨리 찍는지, 얼마나 빨리 분류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으며, 그에 따라 지역우체국마다 우편업무의 달인이 있었을 것이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체신사업 종사자들의 업무 능력을 겨루는 전국통신경기 대회는 바로 그런 달인들을 위한 대회였다. 당시 체신지에 실린 제12회 전국통신경기대회 사진을 보면 우편물 압인 겨루기, 우편물 구분 경기, 우편물 배달 속도 경기, 시내 전화번호 안내 경기 등 이색적인 종목이 많았다.
1979년 11·12월호
체신부 체육대회
1979년 체신부 체육대회
1979년 10월 19일 체신부 간부, 노조 간부 및 본부 전 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체신부 체육대회가 열렸다. 배구, 축구, 줄다리기, 달리기, 릴레이 경주 등 열띤 경기를 펼치는 모습이 생생하다.
그때 그 모습, 사보 속 이 사람
우체국사보에 연재한 당대 최고의 소설가들
1954년 7월호
《얄개전》의 원작자 조흔파 작가, 《집배부의 사랑》을 연재하다20~30대에게는 낯설겠지만, 1970년대에 개봉한 얄개시리즈 영화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끌던 문화콘텐츠였다. 이 영화들의 원작은 1950년대 《학원》이라는 학생 잡지에 연재된 소설가 조흔파의 《얄개전》이라고 한다. 조흔파는 당시 명랑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하여 시대를 풍미했는데, 우체국사보에도 그가 연재한 소설이 있었다. 바로 1954년 연재된 《집배부의 사랑》이다. 집배원 전삼룡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내용으로 명랑소설만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다. 이야기 외에도 한 가지 더 눈여겨 볼 것이 있는데 소설과 함께 기재된 삽화이다. 그림체가 눈에 많이 익은데, 수십 년간 교과서 삽화를 그려온 김태형 화백이 해당 삽화를 그렸다.
1972년 1월호
《고래사냥》의 원작자 최인호 작가, 《새로운 출발》을 연재하다1972년 1월 사보에 새롭게 실린 연재소설 《새로운 출발》은 많은 독자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 소설의 작가는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않았지만 소설 제목처럼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었던 것 같다. 1963년 고등학교 시절 한국일보 신춘문예 입선으로 등단하였으며, 대학원생 때 우체국사보에 이 소설을 기고했던 작가는 이후 당대 최고의 소설가로서 한국 현대문학의 큰 축으로 자리매김한다. 바로 《별들의 고향》 시리즈, 《바보들의 행진》, 《불새》,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상도》, 《해신》의 각본 또는 원작을 쓴 소설가 최인호다. 우체국사보에는 1972년 1월부터 9월까지 9회에 걸쳐 《새로운 출발》을 기고하였다.
1979년 12월호
최초의 여자 집배원
여자 집배원 1호, 김인숙 씨
여성 최초 집배원이 된 김인숙 씨는 1978년 당시 수원체신청(현 경인지방우정청)에서 공모한 집배원 시험에 여성으로는 최초로 합격하여 1979년 11월 정식 채용되었다. 당시 집배원은 남성만의 직업으로 여겨지던 때라 여성 집배원의 탄생은 전국의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김인숙 씨를 취재한 이 칼럼에서도 체력적으로 힘이 드는 집배원 업무를 여성이 과연 잘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표했던 내용이 많다. 하지만 당시 채용을 진행했던 남인천우체국 정덕용 국장이나 김인숙 집배원의 답변에서 그 의문점은 쉽게 해소된다.
1988년 1월호
도시로 간 처녀를 찾습니다.
이달의 만난 사람, 중매집배원 정태화 씨
농촌에서 젊은이들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귀농이니 전원생활 붐이니 해도 그 숫자가 많지 않을뿐더러, 그조차도 대부분 어느 정도 도시생활을 거친 40대 이후가 많기 때문에 미혼 남녀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런 현상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80년대 산업화가 한창이었던 그 시기에도 농촌에서의 결혼 문제는 매우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중매집배원이라고 알려진 직원이 있어 화제였다. 횡성 우천우체국에 근무하던 정태화 집배원이 그 주인공이었는데 1968년 근무를 시작한 이래로 60여 쌍을 주선했다는 기사를 만날 수 있다. 서로 간에 정이 많았던 시골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크게 이슈가 될 만한 일이었다.
그때 그 모습, 사보에 담긴 세상
1952년 8월호
6·25 서울탈출기
나는 한강을 이렇게 건넜다 - H기자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7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은 분단국가이다. 공포가 서린 전
쟁의 기억을 가진 사람보다 전쟁을 겪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아진 오늘날, 전쟁이란 단어가 주는 두
려움이 예전보다 옅어졌음은 이해할 순 있지만 결코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1952년 당시 《체
신문화》에 실린 <나는 한강을 이렇게 건넜다>를 읽어보면 당시 체신문화 H기자가 서울을 탈출하던
상황을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 현장에 있었다면, 또 그런 상황이 되풀이된다
면 과연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1955년 3월호
생활의 일부가 된 커피, 1955년에는?
1955년 커피가 대중에게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당시 커피를 바라보는 관점은, 생활속 깊이 자리잡은 오늘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전쟁이 막 끝난 1955년, 커피는 대중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이 접할 수 있었던 차의 한 종류였다. 조선 말기부터 ‘잠 오지 않는 약’으로 알려져 오던 것이 1950년대 들어서 일부 다방에서 마실 수 있고, 가정에서도 자랑삼아 차로 내놓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을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커피가 한국인의 체질과 맞지 않고 무미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칼럼에서는 커피의 유래, 커피에 맞는 체질, 맛있게 끓이는 법 등을 안내하고 있다.
1967년 7월호
집을 산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어렵다!?
월급쟁이도 집을 가질 수 있다 - 편집부월급을 가지고 집을 살 수 있을지 없을지 궁금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당시 사보 편집부에서 작성한 이 기사에서는 그 해 설립된 한국주택금고에서 주택자금을 저금리로 대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내하고 있는데, 월급쟁이라도 집을 살 수 있다는 것이 핵심 포인트였다. 전체 인구의 26%가 무주택 가구라는 통계를 설명하면서, 그들 중 월 7천 원 정도를 2년간 부담할 수 있는 자라면 60만 원을 융자 받아 20평짜리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주택 마련 대출상품이 있어 대수로운 내용일까 싶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뉴스였을 것이다.
1964년 9월호, 1973년 4월호
여성을 위한 칼럼
여성코너 - 늦봄과 한여름에 유행할 綿레스를 장식한 로맨틱한 우체국사보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 중반까지 여성만을 위한 다양한 코너를 선보였다. 해당 코너는 매년 ‘여성쌀롱’, ‘여성코너’, ‘여성의 벤취’, ‘여성들차지’ 등 이름과 성격이 조금씩 바뀌긴 했지만, 대개 여성들의 관심사에 초점을 맞춘 내용을 게재하였다. 현 사회·문화적 시점에서 볼 때는 성적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한 칼럼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내용이었을 것이다. 또한 여성 근무자가 많던 우체국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던 당시 편집부의 마음이 담겨 있기도 하다. 아래의 칼럼에서는 파리 디자이너들이 제시한 레이스 장식의 로맨틱한 무드 패션이 인기가 끌 것이란 내용과 속옷을 다림질해야 하는 이유, 잔주름을 없애는 방법 등을 설명하고 있다.
1970년 1월호
1970년대, 전기자동차가 거리를 누비고 로켓으로 미국에 우편물을 보낸다?
70년대의 과학세계
당시 한국일보 심승택 과학부장이 기고한 <10년을 내다보는 70년대 과학세계>에는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70~80년대에 실현된 것도 많지만 최근에 와서야 실현된 것은 물론, 지금 보기에도 이것이 과연 현실 가능한지 의문점이 드는 내용도 있다. 예를 들어 최근 상용화가 되고 있는 전기자동차가 언급이 되어 있는데 기사에서는 70년대에 실용화를 목표로 개발하고 있었다고 한다. 최대 난관인 배터리만 해결되면 쉽게 거리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 부분이 해결되고 실용화되기까지는 4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또한 다소 황당한 내용도 있는데 바로 로켓 우편이다. 국제간 우편을 항공 우편과 더불어 로켓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했는데, 실제로 1950년대 말 미국 우정공사에서 제기한 아이디어였고 해당 공사에서 관련 실험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로켓을 통해 빠른 우편물 배송에 대한 장밋빛 꿈을 꿨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는 안정성 및 경제성이 맞지 않아 실현되지 못했다.
1973년 11월호
1973년, 거실이 집 안으로 들어오다.
독자를 위한 가이드 - 새로운 생활방식과 주거의 개량 ‘독자를 위한 가이드’는 수집, 바둑, 낚시, 등산 등 취미 활동이나 요리, 주택 등 일상생활과 관련하여 조언을 해주는 코너였는데, 그중 눈에 띄는 것이 바로 ‘리빙룸’ 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말로는 보통 거실이라 칭하는 ‘리빙룸’이 언제부터 집안에 당연하게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중화가 되기 시작한 건 1970년대쯤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전에는 대청마루나 안방이 ‘리빙룸’의 역할을 대신하긴 했지만 외국의 ‘리빙룸’ 기능을 완벽히 대체하진 못했다. 1950~60년대부터 새로 지어지는 현대식 주택에는 보통 ‘리빙룸’ 이 설치되어 신식 주택의 특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이 칼럼에서는 ‘리빙룸’을 만들 때 주의할 점 등을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