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전북 정읍시 고부면 장문리다. ‘고부’는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정읍 사람은 물론이고 나 또한 동학농민의 숭고한 정신을 자연스럽게 가슴에 받아들이며 자랐다.
이곳 고부에는 두승산(斗升山)이 있다.
이 산은 방장산(고창), 봉래산(부안)과 더불어 호남의 ‘삼신산’이라고 불린다.
호남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아오른 두승산은 상생(相生)과 개혁을 표방했던 동학농민혁명의 요람이다. 두승의 두(斗)는 벼의 용량을 재는 그릇이며 승(升)은 쌀의 용량을 재는 그릇으로 이름에 호남평야의 풍요로움이 담겨 있다. 이를 중심으로 펼쳐진 고부평야는 호남 곡창 지대의 주축을 이루었다. 당시의 고부는 이 일대에서 나오는 쌀의 집산지이자, 농경사회의 중심지로서 정읍보다 큰 고을이었다. 일제는
고부가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였다는 사실을 지나쳤을 리 없다. 비록 실패한 혁명이었지만 역사에서 크게 평가받고 있는 이 민중적 거사가 일제의 공격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음을 일제 당국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에게 고부는 반란의 고장이었으며 동학혁명을 ‘동학난(亂)’으로 끌어내리려 했던 저들의 의도를 쉽게 읽을 수 있다. 그 예로 일제강점 후 1914년과 1935년 두 차례에 걸친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고부는 정읍과 부안, 고창 등에 나뉘어 편입됐다가 결국 정읍에 속한 면으로 축소된 점을 들 수 있다.
올해 2014년은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 치하와 해방을 거치면서 줄곧 ‘난(亂)’으로 평가 절하되어 오던 중, 1963년 10월 3일 처음으로 ‘혁명’이란 글귀가 새겨진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정읍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졌으며, 지난해는 이 탑 건립 50주년이었다. 그럼에도 무심한 세월의 흐름과 함께 여전히 역사의 큰 맥으로 조명되지 못하고 곁가지쯤으로 알려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8년 전인 2006년, 동학혁명 발상지이며 고부 관아 자리에 있는 고부초교의 개교 100주년을 맞아 만든
‘고부초교 개교 100주년 기념 나만의 우표’ 발행이 언론에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이 일은 나비효과(1963년 미국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가 창안한 이론으로 아마존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연쇄 작용을 일으켜 중국에서는 태풍이 된다는 뜻)가 되어, 고부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졌다. 결국 <월간 조선>에서 2개월에 걸쳐 집중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취재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동학혁명의 당시 사정과 그 이후 알려지지 않은 사실까지 심도 있게 기사화됐다.
2006년 당시 고부초등학교는 전교생 103명에 7학급인 작은 학교였다. 그러나 이 학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옹골찬 역사의 기운이 느껴진다. 동학혁명의 성지, 고부면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도 그렇고, 혁명의 실마리를 제공했던 탐관오리 조병갑의 고부관아 안에 세워진 학교가 바로 고부초등학교라는 인연도 예사롭지 않았다.
이 학교는 조선시대에 개교한 유서가 깊은 학교이다. 그러나 총동창회가 없었다. 필자가 27년 전 1987년 어머님 성함을 딴 ‘순임장학금’을 주려고 모교를 방문했다. 때맞춰 ‘우인장학금’을 주려고 오신 은사님이자 선배인 우인 은성림 선생님을 만났다. 모교 사랑은 선・후배가 따로 없음을 공감했다. 그때 총동창회의 실마리를 만들기 위해 학교에 보관 중인 전체 졸업생 명단 2부를 복사하여 정읍지역은 은사님이 맡고, 나머지 지역은 필자가 맡아 5년 후 1992년 고부초교 동창명부를 최초로 만들었다. 그러던 중 개교 100주년을 일 년 앞둔 2005년 8월에 창립총회를 가지면서 달라졌다. 동창명부를 바탕으로 일사천리로 총동창회보를 발간하고, 동창 간의 유대와 결속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고부 동학혁명의 역사와 모교 사랑을 도모하기 위한 동창들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그 첫 작품이 다음 해 7월 11일에 발행돼 세간의 화제를 일으킨 ‘고부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나만의 우표’이다. 그 당시 연합뉴스를 시작으로 중앙 일간지에 기사가 실렸다. 주간조선(8월 11일 자)은 시골 초등학교 개교를 기념하는 우표 발행을 기획으로 다루었고 조선일보(8월 15일)는 고부초등학교가 독립운동, 동학혁명의 진원지라는 사실을 크게 부각시켰다. 그런데 기사 중에 오보가 있었다. ‘동학혁명 때 불타버린 관아 자리에 학교가 들어섰다’는 기사였다.
필자는 조선일보를 방문하여 ‘개교 당시 학교가 들어섰던 관아는 불에 타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기에 8월 26일 자에 바로 잡습니다’라는 정정 기사를 받아 냈다.
이후 KBS, MBC, CBS 등 방송에서도 고부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전국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개최된 ‘고부초교 개교 100주년 행사’는 정읍 시민은 물론 출향 인사들까지 큰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짧은 기간 동안 학교 발전의 행사를 위해 모은 금액만도 당시 1억 7천만원, 초등학교 행사에 이렇게 많은 금액이 모금된 것만 보아도 그 열기를 가늠케 했다. 그렇듯 고부에 집중된 관심은 ‘한 장의 개교
100주년 기념 나만의 우표’가 동학혁명의 재조명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다. 화제가 된 우표는 개교 당시와 현재의 학교 전경을 번갈아 중심 사진으로 쓰고 주변부는 보조 사진으로 배치했다. 태극기는 공통으로 들어가 있는데 1906년에 개교한 학교의 설립일이 공교롭게도 광복절이라 이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우표 발행은 정보통신부에서 홍보담당관으로 오랫동안 쌓은 경력을 바탕으로 우표를 추억이 담긴 소통의 매개체라고 생각해 이를 적용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농촌 지역의 초등학교가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는 것만으로도 화제일 법한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전국 최초로 개교기념 나만의 우표 발행’을 하게 되었기에 언론에서 더욱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이 우표 발행의 쾌거는 행사의 성공을 넘어, 고부에 대한 관심을 이끌었다. 또한 일부 언론에서 동학혁명과 당시의 상황에 대해 재조명을 시작하게 된 단초(端初)를 제공하였다.
역사는 힘 있는 자의 논리라고 했던가. 우리 조상의 숭고한 ‘혁명’을 ‘난’으로 폄하한 일제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있다. 작은 시골 초교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에 대한 관심이 나비효과가 되어 다시 재조명하게 된 우리의 정신적 자산 ‘동학농민혁명’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당시 고관대작을 지낸 친일파와 이름 없이 쓰러져간 농민군들 중에서 과연 누가 오늘날 우리에게 가치 있으며, 우리의 역사에 기여 하였는지를 되짚어 봐야 한다. 비록 무명의 주검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가치 있는 교훈을 남겨 준 그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