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 쏘는 맛과 향을 자랑하는 돌산 갓김치
돌산 갓김치는 조선시대 나랏님의 수랏상에 오를 만큼 유명했지만, 섬전역에서 재배되었던 것은 아니고 섬내의 세구지마을 등 일부 지역에서만 재배되었다. 그때는 잎이 자주빛인 재래종갓이었다.
돌산 갓이 유명해지기까지에는 한 독농가의 숨은 노력이 담겨 있었다. 돌산면 우두리 출신인 이삼근씨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일제 시대 일본에 들어가 오랫동안 생활했다는 사실뿐 그의 전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어느 농장에서 고용인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러한 사람이 1960년대 초에 귀국해 고향에서 시작한 일이 농장 일이었다. 주로 매화나무 · 복숭아나무 등 과일나무 심기와 갓 재배였다. 그는 과일나무 묘목을 만들어 집집마다 한두 그루씩 나누어 주며 나무 심기를 권장하는 한편, 그 자신은 일본에서 들여온 매실 종자를 가지고 알이 굵고 향이 좋은 매실을 생산했다. 또한 일본에서 가져온 갓 종자와 재래종 갓 종자를 교배해 개량종갓을 재배하는 한편 마을 사람들에게 그 재배법을 전수했다.
“그 무렵 돌산에서는 텃밭에서 채소로 갓을 가꾸는 것밖에는 집단재배는 하지 않았는 데, 일본에서 귀국한 이삼근씨가 일찍이 과학영농에 눈을 떠 일본 갓과 재래종 갓 종자를 교배시켜 잡종 갓을 만들면서 그의 고향 동네인 세구지마을에서는 갓 재배를 많이 했어 요. 그가 재배한 갓은 초장이 길고 향이 많이 나며, 재래종에 비해 맛이 순했어요. 교배종은 2〜3년 지나면 퇴화하기 때문에 다시 일 본에서 종자를 들여와 새로운 품종을 만들곤 했죠. 그런데 그분이 돌아가시고 나자 종자 갱신이 안되니까 돌산 갓이 퇴화돼 버렸어요. 그 뒤에 나온 갓은 일본 종자를 가져다 그대로 심은 거죠.”
돌산농협 전무 오홍우씨의 말이었다.
1980년 정부는 인구 2만 이상인 면을 읍으로 승격시키는 조치를 단행했는데, 이때 돌산면이 돌산읍으로 승격했다. 그 무렵 정부는 1면 1특색사업이라 하여 면마다 고유의 특산품을 선정해 집중적으로 생산하도록 권장했는데, 돌산읍은 그 대상으로 갓과 고들빼기를 선정했다. 이에 따라 고들빼기와 함께 갓이 돌산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판로는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갓김치는 남도지방에서만 알려져 있어 타지 사람들은 잘 몰랐고, 따라서 돌산 갓김치의 명성도 그렇게 높지 않았다. 때문에 상거래가 개별적으로 이루어져 영세성을 면치 못하는데, 갓 재배량은 날로 늘어 안정적인 수급을 기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번에는 돌산농협이 총대를 멨다. 그에 앞서 전라남도는 1991년 돌산읍 우두리 일대를 갓 특산단 지로 지정했고, 이에 따라 농촌지도소가 우량 종자의 공급과 기술교육을 담당하고, 돌산농협이 갓김치 생산과 판매를 담당하기로 했다.
농협의 사업은 금융사업 · 구매사업 · 판매 사업 셋으로 나뉘는데, 돌산농협은 갓김치를 대상으로 새로운 구매사업과 판매사업을 동시에 시작하기로 했던 것이다. 즉, 농가와의 계약재배로 갓을 생산케 하고, 그것을 수매하여 갓김치로 가공한 다음 농협이 책임지고 판매하는 갓김치 가공사업을 시작했다.
다시 오홍우 전무의 말을 들어보자.
“돌산 갓을 여수시장에 내놓으면 서로 사려고 할 정도로 이름이 나있는데, 그것에 대해 알려진게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돌산 갓에 관한 옛날 문헌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별 소득이 없었어요. 그저 나랏님 진상품이란 사실만 알았지 그 이상은 몰랐어요.
돌산 갓이 분명히 좋은 상품이 될 텐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하고 고심하다가 김치공장을 만들어 판매에 나서기로 결정했던 겁니다. 돌산은 대부분이 산지여서 논밭이 적은데다 섬지방은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에 다른 작물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유일한 특산품이라 할 수 있는 갓을 농민들과 계약재배를 시켜 생산케 한 다음 농협이 책임지고 수매하여 판매사업까지 겸하기로 했던 거죠.”
그리하여 1992년 죽포리의 1천여평 부지에 각종 기계시설과 저온창고, 냉동차 등을 갖 춘 갓김치 가공공장을 준공하고 1일 2톤의 갓김치를 생산하고 있다. 물론 원료인 갓은 관내의 농민들에게 공급받고 있다. 처음에는 200여 농가와 계약재배를 하여 수매했으나 재배 농가가 750여개로 늘어나고 영농조합이 형성됨에 따라 영농조합 조합원들로부터 직접 구입하고 있다.
돌산농협에서 생산한 갓김치는 처음 농협과 대리점을 통해 전국에 선보였다. 그런데 그것의 상품성 때문인지 내놓자마자 TV 방송을 타게 되었고, 그러자 여천우체국에서 즉시 전화가 걸려왔다. 우편주문판매용 상품으로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돌산농협의 입장에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어 즉시 계약을 맺었다.
재래종 갓은 구세대용, 돌산 갓은 신세대용
갓은 겨자과의 1년생 채소로 겨자와는 사촌간이다. 줄기와 잎을 식용으로 쓰며, 씨는 겨자와 같이 쓰이나 매운 맛이 적고 향기가 있다. 갓은 한자로 개(茶)라 하고, 그 씨앗을 개자(茶子)라 한다. 그 ‘개자’가 ‘겨자’로 탈 바꿈한 것이므로 둘은 같은 조상에서 갈라진 사촌간쯤 된다고 하겠다.
흔히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의 상징으로 자주 쓰였던 겨자는 성경뿐 아니라 불경에서도 자주 등장했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겨자가 철학적으로 자주 인용되었던 것은 예로부터 그곳에서 갓 재배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남방에는 키가 50척이나 되는 갓나무와 열매가 계란만한 것도 있다고 했다.
갓의 대표적인 특성은 톡 쏘는 매운 맛이다. 이는 갓 속에 시니그린(sinigrin)이라는 성분이 들어있기 때문인데, 겨자가 매운 것도 겨자 속에 이 성분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성분은 항암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옛글에 “매실이라는 말만 들어도 침이 나고, 갓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고 했는데, 옛날 갓은 지금보다 한결 매웠던 것 같다.
갓이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특성은 강한 살균력이다. 무와 배추에도 어느 정도의 살균력은 있지만, 갓의 경우 미생물의 성장을 억 제하는 살균력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일반 김치에 비해 덜 시어진다.
김치용으로 쓰이는 갓은 따뜻한 남쪽지방에서 잘 자라는데, 여수 돌산 갓이 가장 유명하다. 개량종인 돌산 갓은 육지에서 자라는 재래종 갓과 여러 면에서 구별이 된다. 우선 크기가 다르다. 돌산 갓은 길이가 30cm 정도로 재래종에 비해 두 배나 크다. 그러다 보니 섬유질이 연하면서도 독특한 향을 지니고 있다. 때문인지 돌산 갓은 부드럽다. 재래종의 경우, 눈물이 날 정도로 자극성이 강해 숙성 되지 않으면 먹기 어려운데, 돌산 갓은 그대로 먹어도 맵지 않다. 때문에 어떤 주민은 재래종 갓이 톡 쏘는 맛을 좋아하는 구세대용이라면 돌산 갓은 순한 맛을 좋아하는 신세 대용이라고 단정했다.
돌산에서 갓 농사가 잘되는 이유를 그곳 사람들은 기후와 토질 때문이라 설명한다.
“이곳의 기후는 온난다습한 해양성기후라 할 수 있죠. 겨울에 눈이 한번 내릴까 말까 한 따뜻한 날씨로 육지와는 4〜5도 차이가 납니다. 그러니까 겨울에도 갓이 새파랗게 잘 자라죠. 또한 돌산 가운데서도 갓 농사가 잘 되는 우두리 일대는 황토 땅이면서도 물빠짐이 좋다고 해요. 일반적으로 황토 땅은 물빠짐이 좋지 않는데 그 땅은 잘 빠진다고 합니다. 그런 땅에서 나는 갓이 진짜 갓이죠.,,
1년에 네번 정도 재배하는 돌산 갓은 재배 시기가 따로 없다. 겨울에도 노지 재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재배 기간은 평균 2개월로 60일 정도 자란 갓이 김치를 담그는데 가장 알맞으나. 요즘은 40〜45일이 지나면 수확한다. 그러나 좀더 자라야 향이 좋아지며 너무 일찍 수확하면 향이 없어 김치 맛이 떨어진다. 60일 이상 자라면 꽃이 피고 시들어 버리 므로 수확하는 시기를 놓쳐서는 안된다.
갓 재배에 있어 가장 주의해야 할 사항은 비와 온도이다. 장마철에 3〜4일 비가 내리면 잎이 흐물흐물해지다 녹아 버린다. 또한 온도에도 민감해 일교차가 심하면 미처 크기도 전에 꽃이 피고 시들어 버린다. 화학비료를 쓰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무더운 여름에 비료를 많이 주면 잎 뒷면에 흰 반점이 생겨 상품 가치를 잃게 된다. 때문에 주로 퇴비를 쓰는데 요즘은 해충이 달라붙는 것을 막기위해 파종과 함께 망사를 씌운다.
멸치액젓으로 담근 갓김치가 일품
돌산 갓김치를 담그는 법은 일반 배추김치를 담그는 법과 비슷하다. 주재료인 갓외에 멸치액젓 · 고추가루 · 소금 · 마늘 · 생강 · 파 · 참깨 등 여러가지 양념이 골고루 들어간다. 양념들을 잘 버무리기 위해 찹쌀풀을 쓴다. 그곳 사람들은 그들 재료 중 멸치액젓 쓰는 것을 가장 큰 자랑거리로 생각한다.
‘‘돌산 갓김치가 맛있는 데는 젓갈의 영향도 큽니다. 중부지방에서는 김치 담글 때 새우젓을 쓰는데, 여수 등 남도지방에서는 멸치액젓을 씁니다. 확실히 맛이 다르죠. 돌산농협에서는 멸치액젓을 직접 담그는데, 멸치 중에서도 잔 멸치인 정어리로 담급니다. 기름기가 많은 멸치죠. 그것도 보리가 노릇노릇 익을 무렵에 잡은 정어리가 기름기가 많기 때문에 그때 잡은 멸치로 담근 액젓을 최고로 치죠.'
갓 특유의 향긋한 냄새와 매콤하면서도 쌉쌀한 맛을 풍기는 돌산 갓김치는 알칼리성 식품으로 각종 무기질이나 비타민이 소량이 지만 골고루 들어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숙성할수록 맛과 향이 깊어지는 돌산 갓 김치는 혈중 콜레스테롤을 감소시켜 성인병을 예방하고 빈혈을 막아주며 허약 체질을 강화시켜 준다고 한다.
일반 갓김치와는 달리 돌산 갓김치는 담근 즉시 먹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익어야 제 맛이 난다. 일반적으로 갓김치는 담근 후 4〜7일 사이에 가장 맛이 떨어지며 15일 후쯤에 맛이 있다. 4도 이하에서 보관하면 60일 이상 저장해도 맛이 변하지 않으며, 제대로 보관하면 6개월까지 먹을 수 있다.
“갓김치 색깔이 노랗게 변하면 고객들은 변질된 것으로 생각하고 반품하는데, 저희들은 그것을 먹습니다. 비닐 봉지에 들어있는 갓김치가 숙성되면 부풀어오르니까 변질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때부터 맛이 나죠.”
백속을 청소해주는 광양 매실 농축액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주고 잘 데 없는 사람은 재워 주어라.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지 받아주어라.”
시집온 지 3일만인 며느리 홍쌍리씨에게 시아버지 김오천씨가 한 말이었다. 이어 덧붙 이는 말은 “돈에 매달리면 인간이 망가진다. 돈 대신 인간의 울타리를 쌓도록 노력해라.”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철학의 소유자인 시아버지 김오천씨는 어떤 사람일까?
섬진마을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김오천씨는 주린 배를 채우고 싶어 열일곱살인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일은 탄광 광부, 타고난 성실함으로 밤낮없이 일을 했다. 또 글을 모르는 것이 한이었으므로 광부 생활을 하면서 야간학교를 다 녔다. 그러나 연필과 종이를 살 돈도 아까웠고 글을 써볼 시간도 부족했으므로 탄광에서 꼬챙이로 글을 끄적거리곤 했다.
13년 동안 뼈빠지게 일한 다음 귀국하면서 사온 것이 매화나무와 밤나무 5천 그루씩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돌밭이나 다름없는 야산에 심었다.
주위에서는 뜨악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과일나무 심기를 계속했다. 또한 묘목을 이웃에 나누어주며 같이 심기를 권했다. 주민들의 반응은 소 귀에 경 읽기였다. 나무를 심다 돈이 부족하면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을 했고 거기서 번 돈으로 신품종 묘목을 사왔다. 그 러한 일본행은 해방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매실이 좋은 열매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을 통해 그 사실을 알았고,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을 알았다. 배가 아플 때 매 실 즙을 마시면 금세 나았고, 상처가 난 데 그것을 바르면 곧잘 나았다. 아니,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매실에는 그 이상의 신비한 효능이 있는 것 같았다. 때문에 언젠가는 우리나라에서도 매실의 진가를 인정해주는 날이 올 것이라는 신념에서 매화나무 심기를 계속했던 것이다.
“매화나무꽃이 너무 좋았어요”
밤나무와 매화나무 단지를 조성하는 일도 힘들었지만, 과일을 파는 일은 더욱 힘들었다. 김오천씨는 밤과 매실을 통통배에 싣고 부산에 내다 팔았다. 그때 단골로 드나든 집이 과일가게를 겸하고 있는 건어물상이었는데, 그 집에서 일하고 있는 처녀가 바로 홍쌍리씨였다. 밀양 처녀가 부산의 숙부 집에서 가게 일을 돕고 있었던 것이다.
숙부의 중매로 김오천씨의 아들 김달웅씨와 혼인이 이루어졌다. 1965년의 일이었다. 막상 시집이라고 찾아가 보니 대도시에서 살 던 처녀가 살 곳이 아니었다. 광양땅에서 손 꼽히는 부자라는데, 집은 쓰러져가는 초가집 이었고 먹는 밥은 보리밥이었으며, 신혼초부터 수십명이나 되는 일꾼들의 밥을 해 나르는 게 일과였다. 보리를 갈아 보리밥을 짓는 일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 꼬장꼬장한 시어머니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힘든데, 게다가 말까지 잘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울었다. 보리를 찧느라고 울었고 밥을 푸느라고 울었다. 지렁이가 꿈틀대는 밭이 싫어 울었고 시어머니의 말씀이 고까워 울었다. 그러면서 몰래 도망갈 생각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화꽃이 그렇게 좋았다.
아무튼 시골을 탈출할 생각을 굳히고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시아버지에게 도시에 나가 살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시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먹던 밥상을 마당으로 내던졌다. 한참을 지나 똑같은 청을 했는데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첫아들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작정 집을 나섰다. 깜깜한 밤중에 집을 나섰지만 갈 곳이 없었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집으로 돌아가자 아들을 안고 있는 남편 곁에서 뭔가 타고 있었다. 다이너마이트 도화선이 었다. “마누라가 자식 버리고 남편 팽개치고 도망쳤는데, 더 이상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 남편의 중얼거림이었다. 그 뒤로 두번 다시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농사 일에 마음을 붙이려 애섰다. 일벌레인 시아버지가 좋은 스승이 되었다. 김오천씨는 평생을 나무 키우는 일에 매달린 사람이었다. 한뼘 한뼘 늘린 산과 밭이 45만 평이나 되었으니 그의 집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는 농사 일을 힘들어하는 며느리에게 “네가 잘 가꾸면 네 아들대에 가서는 크게 성공할 것이다."라는 말을 곧 잘 했다. 또 “나무 밑에서 살다가 나무 밑에서 죽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틈이 날때마다 “어려운 산을 넘으면 평지가 나오는 법이다.”라며 며느리를 달랬다.
그의 마을에서 하동까지는 10리 길이다. 나무를 잘 키우기 위해 김오천씨는 매일 하동으로 오줌을 푸러 다녔다. 남에게 냄새를 풍기는 실례가 싫어 낮시간을 피하다 보니 자연히 새벽시간을 택했다. 청매실농원의 나 무들은 그런 오줌으로 키웠다. 그 무거운 똥 장군을 지고 십리 길을 왕래했다는 이야기는 며느리의 가슴에 대못이 되어 박혔다. ‘내가 아무리 힘들여 일한다 한들 어찌 아버지가 하신 만큼 할 수 있으리오?’
땅과 결혼하기로 작심해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고,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그 집안에도 시련의 시기가 왔다. 1975년 일본에서 온 숙부와 함께 경기도 남양에서 광산업을 하던 남편이 망하는 바람에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45만평의 땅을 정리하고 나니 비탈진 골짜기 1만 5천평이 남았다. 화병을 얻은 남편은 술로 소일했다. 시아버지는 연로했기 때문에 총대를 멜 사람은 그 집안 안주인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땅과 결혼했다 그 동안 깊은 정을 주지 못했던 땅을 제대로 일구기로 마음 먹었다. 손바닥이 발바닥이 되도록 산비탈에 엎드려 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그처럼 징그럽던 지렁이나 거머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거름은 물론 퇴비를 쓰는데, 퇴비도 한 가지 종류만을 주는 게 아니고 우분과 돈분, 계분, 어분 등을 돌려가며 두었다.
땅과 결혼하면서 여자이기를 포기했다. 옷은 미제 작업복으로 갈아 입고 머리는 남자 처럼 짧게 깎았다. 촌에서는 새벽에 여자가 놉을 얻으러 다니면 부정탄다고 해서 내다보지도 않았다. 그러한 주민들을 향해 자신을 여자로 보지 말아달라고 하소연했다. 일꾼을 쓰긴 하지만 점심을 제공할 처지가 못되자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 일했고, 어떤 사람은 주인의 도시락을 하나 더 싸오기도 했다.
나무를 심는 과정에서 어떤 나무를 심느냐는 문제를 놓고 시아버지와 중돌했다. 시아버지는 밤나무를 심으려 했고 며느리는 매화나무를 심으려 했다. 밤은 잘 팔리고 매실은 팔리지 않으므로 시아버지는 밤나무를 선호했고, 며느리는 꽃이 좋아 매화나무를 선호했다.
우선 매화나무를 덮고 있는 밤나무를 베어 냈다. 밤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나면 어김없이 시아버지가 쫓아와 “누구 맘대로 나무를 베느냐."며 역정을 냈다. 그러면 며느리는 울면서 매달렸다. “아버지, 제가 이 나무를 잘 키워 볼게요. 저를 믿어 주세요." 결국 두 사람은 부등켜 안고 울었다.
몇년에 걸쳐 밤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매화나무를 심자 골짜기 한쪽이 어엿한 매화 나무 단지로 탈바꿈했다. “그림이나 소설만이 작품인가 나는 산 작품을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가 매화나무 꽃동산을 만들었던 것이다. 밤나무를 베어낼 때마다 며느리를 혼내던 시아버지가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날 며느리 손을 잡으며 "참 장한 일 했다. 이렇게 매화꽃이 피니 내가 신선이 된 기분이구 나:" 하고 즐거워했다.
이제 섬진리 마을에는 담장이 매화나무로 뒤덮일 만큼 매화나무가 많아졌다. 그 중에서도 삼박재 골짜기 중턱에 자리잡은 청매실농 원의 매화꽃은 전국에 소문날 정도로 유명한 명소가 되었다. 해마다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삼월 중순이면 전국 각지에서 매화꽃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매실은 뱃속을 청소해주는 청소부
매실주의 원료로 쓰일 뿐 특별한 용도가 없었던 매실은 6 · 25 직후부터 오매(鳥梅)로 가공돼 한약방에 팔렸다. 오매란 푸른 매실을 짚불 연기에 그슬려 말린 것. 그 후 부산의 한 소주회사에서 매실주 원료로 청매실을 다량 구입했다. 그 무렵 일본에서는 매실을 이용하여 엑기스나 장아찌 따위를 만들고 있었으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청매실농원은 매실 자체로만 팔았다. 때문에 판로가 제한돼 매실 생산의 수익성을 따질 수도 없었다.
자연히 매실 가공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매실 가공에 먼저 착수한 사람은 시아버지 김오천씨였다. 그는 매실을 찐 다음 여러 날 햇볕에 말렸다. 그 이유를 묻자. “배 아플 때 달여 먹거나 장염 · 식중독에 걸렸을 때 먹으면 좋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매실을 널어 둔 함석에 녹이 슬며 구멍이 뚫린 현상을 발견했다. “바로 여기에 뭔가 몸에 좋은 비밀이 있구나!"하고 감탄했다.
시부모가 하던 대로 오매를 만들고 매실 김치를 담가 보았다. 그러던 어느날 매실즙을 짜내 고아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한 대로 매실 즙을 싸 뭉근한 불에 고으니 시큼한 매실차가 만들어졌다. 그것이 일본에서 시판되고 있는 매실 엑기스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매실절임 · 매실장아찌 · 매실농축액 · 매실식초 · 매실잼 등이 탄생했다.
홍쌍리씨는 1995년에「매실 미용건강 이야기」라는 단행본을 냈다. 그 책에는 매실의 효능과 가공식품 제조법 등이 소개뇌어 있다. 매실의 효능에 대해 몇가지 인용해 본다.
“매실이 사람의 뱃속을 청소해 주는 청소 부라는 것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요. 흙일을 하고 나서 새까맣게 더러워진 손을 청매 실 즙을 묻힌 다음 씻으면 그렇게 깨끗해질 수 없어요. 제 아무리 좋다는 비누를 쓴다고 해서 그보다 더 효과가 좋을 수 없지요. 때문에 기름기 있는 음식물을 먹은 다음에는 반드시 매실을 먹어야 합니다.
또 손을 베었을 때 약방에 갈 필요가 없어요. 매실농축액을 바르면 되지요. 설사를 자 주 하던 사람이 매실엑기스를 먹고 나았고, 피곤하던 사람이 그것을 먹고 나서 피곤을 모르겠다고 이야기한 예도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