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일에 잡아 당일에 말리는 울릉도 오징어
오징어는 뼈가 없는 것이 특징인 연체동물의 일종이다. 몸은 머리와 몸통 • 다리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가 다리와 몸통 사이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원추형으로 생긴 몸의 길이는 30〜40cm. 생김새는 낙지 와 비슷한데, 몸통의 맨 앞에 삼각형의 지느러미가 달려 있다. 다리는 10개인데, 그 중에서 두 개가 특별히 길어 먹이를 잡는 일을 한다. 말하자면, 오징어의 손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머리라고 생각하는, 삼각형의 지느러미는 헤엄을 칠 때 방향타 역할을 한다.
어떤 종류의 오징어는 몸에 석회질의 뼈 주머니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흔히 오징어뼈 라 부르지만, 몸속에 길게 뻗어 몸의 균형을 이루어주는 일반 생선의 뼈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또 오징어는 등 쪽에 먹물 주머니를 담고 있는데. 몸에 위험이 닥칠 때 먹물을 뿜어냄으로써 적의 공격을 피하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오징어는 묵어(墨魚)라는 별명을 갖 고 있다.
오징어는 새우나 멸치 등 어린 물고기를 잡아 먹는 미식가이다. 봄과 여름에 30〜40 개의 알 덩어리를 해초에 낳는데, 산란을 마 치고 나면 죽는다. 그러니까 오징어는 한해살이인 셈이다.
오징어는 난류에 무리를 지어 사는데, 한반 도 주변과 일본 규슈 부근의 바다에 분포되어 있다. 최근에는 남미와 뉴질랜드산이 수입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오징어의 본고장은 울릉도와 독도 사이의 바다이며, 그곳에서 나는 울릉도산 오징어를 최고로 친다.
울릉도 오징어는 6월부터 12월까지 잡힌다. 8월부터 10월 사이가 성어기이다. 1월부터 5월까지는 거의 잡히지 않는다. 설사 잡힌다 하더라도 고기가 잘고 양도 적어 채산성을 맞추기 어렵다.
때문에 곡식이나 과일도 추수해야 할 시기가 있듯이 오징어도 잡아야 할 때가 있다. 성어기인 8〜10월에 잡아야 한다. 그 무렵에 잡은 오징어가 살이 올라 맛이 좋다고 한다.
울릉도 오징어는 낚시로 낚아 올리는데, 주로 밤에 잡는다. 오징어는 낮에는 수온이 5〜15도로 낮은, 깊은 바다 속에 살다 밤에는 수온이 높은 표층으로 올라가는 수직이동을 반복한다. 때문에 오징어가 바다 위로 뜨는 시간에 오징어 잡이가 이루어지는데, 그때 오징어를 유인하는 도구가 불빛이다. 배 위에 강렬한 전구를 켜 놓으면 오징어 떼가 몰리는데, 그때 낚시로 건져올린다. 밝은 불빛은 비단 오징어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먹이가 되는 잡어들도 좋아하므로 빛을 따라 몰리는 먹이를 따라 오징어 떼가 몰리기도 한다. 오징어를 그물로 잡아올리면 잡는 과정에서 상하기 때문에 판매 가격에 상당한 차이가 난다고 한다.
잡은 오징어는 아침에 귀항한 즉시 위판장에 넘겨 경매에 부쳐진다. 경매가 끝나면 즉시 오징어 배를 갈라 내장을 처리한 다음 건조시켜야 한다. 건조작업은 바닷가에 설치된 덕장에서 이루어지는데, 날씨가 좋은 날은 하루, 나쁜 날은 이틀쯤 걸린다. 장마철에는 실내에서 훈풍을 일으켜 말리기도 하는데, 햇볕 에 말리는 것과 큰 차이는 없다고 한다. 건조가 끝난 오징어는 저온창고에 보관한다.
서울과 직거래 트고 나자 돈이 붙어
울릉도에서 오징어 장사를 먼저 시작한 업체는 대구상회였지만 우편주문판매를 먼저 시작한 업체는 동덕유통이었다.
동덕유통 대표 김순곤씨(68세)가 고향 창원을 떠나 울릉도로 이주한 것은 1972년, 그의 나이 42세 때였다. 지병인 위장병으로 시달리고 있었고, 먹고 살길도 마땅치 않아 변화를 모색한 끝에 선택한 곳이 울릉도였다. 그 당시 울릉도는 가능성의 땅이었다. 오징어 경기가 한창 좋아 오징어 철이 되면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고 할 만큼 흥청거리던 시절인지라 사고무친의 객지 사람이 막벌이하기에 좋은 땅이었다.
낯선 땅 울릉도에 도착하자 우선 오징어 배를 탔다. 물론 고용살이였다. 그리고 열심히 일했다. 푼돈이 생기는 대로 부인과 함께 오징어 한두 마리를 사 말리는 작업도 했다.
2년 동안 오징어 배를 타고 나서 내린 결론은 배를 타는 것으로는 승부를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부 생활로는 돈을 벌기 어렵다, 따라서 자기 사업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울릉도 약수 덕분인지 어느덧 지병인 위장병도 나았는지라 수협 주변에서 중매인 비슷한 역할을 하며 오징어 장사를 시작했다. 자금의 여유가 없으므로 외상으로 받아 다 팔아 갚곤 했다.
오징어 장사를 하다 보니 장사에 눈이 뜨였다. 오징어 장사에서 남는 이문은 대부분은 오징어를 사가는 서울 사람에게 돌아가고 울릉도 사람에게는 별로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서울로 직접 유통시킬수 있는 길을 트겠다는 생각에서 중부시장을 찾아갔다. 그 동안 모아 두었던 마른 오징어를 가져가 팔아보니 200만원이 더 남았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돈이었다.
서울과 직거래를 트고 나자 행운의 여신이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 동안 서울에서 울릉도 오징어의 독점적인 판매로 재미를 보고 있던 동덕상회 주인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거래망을 그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때문 에 그는 상호까지 물러받으며 편한 장사를 할 수 있었다.
한편 경주가 고향인 대구상회 대표 류희원 씨(57세)는 무역업을 하는 형을 돕기 위해 22세라는 젊은 나이에 울릉도를 밟았다. 그가 맡은 임무는 울릉도에서 잡히는 활어를 구입하여 육지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 당시 울릉도에서는 오징어 • 꽁치 • 우럭 따위의 활어가 많이 났으나 육지와의 교통이 불편해 육지로 반출하기 어렵기 때문에 어업이 활발하지 못했다. 어민들은 섬내에서 소화할 수 있는 양만큼 잡을 뿐 그 이상의 활동은 하지 않으려 했다. 영업 실적이 저조할 수밖에 없자 그의 형은 울릉도 지사를 철수해 버렸다.
그는 울릉도에 눌러앉아 오징어사업을 시작했다. 배 한 척을 구입하여 오징어잡이를 하는 한편 오징어를 가공하여 판매하는 장사도 겸했다.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0여년만에 사업 기반이 완전히 다져졌다. 남에게 사업자금을 빌리지 않으면서 배도 부리고 덕장과 상회도 갖출 수 있었다. 부지런하고 성실하다 는 것 뿐 달리 내세울 성공 비결은 없었다.
이름 석자를 더럽혀서는 안돼
동덕상회 대표 김순곤씨가 우편주문판매에 참여한 것은 그 제도가 실시된 지 2년째인 1987년이었다. 매일 만나는 집배원 문태철씨 의 권유로 알게 되었는데, 몇개 업체와 경합 한 끝에 그가 선정되었다. 그 당시는 초창기인지라 오징어를 시멘트포대 종이에 싸 보낼 정도로 우편주문판매제도에 대한 인식이 낮았다. 그런데 주문이 늘어남에 따라 포장 방법 개선의 필요성을 느껴 별도로 상자를 만 들어 포장했다. 그 동안 신세계백화점에 납품을 하던 경험이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대구상회 대표 류희원씨가 우편주문판매에 참여한 것은 2년 뒤인 1989년이었다. 그 역시 우체국 직원의 권유에 따라 신청했다. 썩 마음이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손해 본다면 얼마나 보겠나.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해보자.”는 소극적인 자세로 시작했다.
오징어를 발송해주는 우체국은 같은 울릉 우체국이지만, 동덕상회는 오징어잡이의 전진기지라 할 저동에 있고, 대구상회는 울릉도의 관문인 도동에 있었다. 그러니까 울릉우체국은 울릉도를 대표하는 2개 지역에 공급업체를 하나씩 두었던 것이다.
경쟁업체가 등장했는데도 동덕상회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사실 자체를 몰랐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으레 같이 참여해 판매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편 늦게 참여한 대구상회는 손님을 끌자 면 우편주문판매 상품 안내 책자에 광고를 게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광고를 내려 하지 않았다. 우편주문판매제도에 대해 잘 몰랐고 광고의 위력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또 팔리면 팔고 안팔리면 말지 하는 소극적인 생각도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의 참여를 권유했던 우체국에서 동덕상회 앞으로 들어온 주문을 양쪽에 하루씩 안배해 주었던 것이다. 그 대신 다음해에는 대구상회의 명의로 광고를 내도록 했다.
동덕상회는 자기 앞으로 들어온 주문을 대구상회로 나누어 줄 때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체국의 주선에 의해 이루어진 판매관계이므로 우체국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만큼 순수했다고나 할까? 하루 걸러 배정을 받다 보니 매번 건수가 적은 토요일의 주문이 그의 몫이 되었고, 그러자 우체국에서 선참자에게 불이익을 줄 수 없으므로 날짜를 바꿔주겠다고 해도 '우리는 늙었고 저쪽은 젊은데, 젊은 사람들이 많이 벌어야 하니까 괜찮다. 는 말로 거절했다.
“사람의 이름 석자가 더럽혀지고 안더럽혀 지는 문제도 있다 이겁니다. 자칫 과욕을 하게 되면 이름 석자가 잘못된다는 말이죠. 그저 순리대로 서로 이해하며 살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날까지 순조롭게 잘 풀리는지 모르겠지만, 여태까지 그런 자세로 살아 왔어요.”
동덕유통 대표 김순곤씨의 말이다.
“주문량으로 따지면 나보다는 그쪽이 더 많았어요. 그쪽이 잘되면 더 보기가 좋아 차량도 수시로 지원해 줍니다. 또 그쪽 물건이 부족할 땐 내 물건을 빌려주고 내 물건이 부족할 땐 그쪽 물건을 빌려다 씁니다. 그 대신 품질 관리는 철저히 하자고 자주 이야기합니다.”
오징어의 대표적 성분은 타우린
오징어는 수분이 80%, 단백질이 17%, 지방이 0.7%인 고단백식품이다. 말린 오징어는 단백질이 70% 이상으로 쇠고기보다 3배 이상 들어있다. 오징어의 단백질은 품질이 떨어 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 다른 생선에 뒤지지 않는다.
오징어에는 콜레스테롤이 100g당 180mg이 들어있어 사람들의 외면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어패류에 함유돼 있는 콜레스테롤이 육류와는 달라 성인병과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애용되고 있다.
오징어의 맛을 내고 약리효과를 내는 대표적인 성분이 타우린이다. 타우린은 황을 포함한 아미노산의 일종인데, 조개류에도 많이 들어있다. 오징어에 다량 함유되어 있는 타우린은 간장의 해독기능을 강화시켜 피로회복 작용을 한다. 또한 인슐린 분비를 촉진시켜 당뇨병을 예방하고 혈액 속의 콜레스테롤을 감소시켜 혈압을 정상화시키는 기능도 한다. 오징어를 말릴 때 껍질에 생기는 하얀 가루가 바로 타우린이다. 그러므로 마른 오징어를 먹을 때는 하얀 가루를 털지 말고 먹어야 한다.
달콤하면서 은은한 향을 풍기는 울릉도 호박엿
울릉도 호박엿은 호박과 옥수수 두가지 곡물로 만든다. 엿은 원래 쌀이나 좁 쌀 • 수수 • 옥수수 같은 단일 곡물로 만들었다. 그런데 호박만으로 엿을 만들면 끈기가 부족해 엿이 제대로 고아지지 않으므로 옥수수 물엿을 섞어 만들고 있다.
문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엿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였다고 한다. 엿은 주로 간식용으로 쓰였으며, 엿을 만드는 과정 에 생성되는 조청은 음식에 단맛을 내게 하는데 쓰였다. 설탕이 없던 옛날에는 음식에 단맛을 내주는 식품으로 꿀이 유일했는데, 꿀 대신 단맛을 내는 식품으로 개발한 것이 조청이었다. 또한 조청은 유과나 강정 등 전통 과자를 만드는데 기초 재료로 쓰였다.
울릉도 호박엿의 주재료는 호박이다. 가을 에 수확한 늙은 호박을 저장해 두었다 껍질을 벗기고 속을 긁어낸 다음 적당한 크기로 잘라 삶으면 물렁물렁해진다. 그때 엿기름물 을 붓고 5시간 가량 달이면 잼처럼 반고체 상태로 굳어진다. 바로 호박 조청이 된 것이다. 거기에 옥수수 물엿을 배합해 다시 달이면 호박엿이 된다.
호박을 달일 때 유의해야 할 사항은 열조절을 잘해야 한다는 점이다. 호박 자체가 열에 약하기 때문에 불을 조금만 세게 해도 눌어버린다. 따라서 약한 불로 은근히 달이며 저어야 한다.
호박은 물론 울릉도에서 생산한다. 울릉도에서는 옛날부터 호박 농사가 잘되었다. 그런데 주민들이 천궁이나 시호 등 수익성이 높은 약초를 재배하다 보니 호박이나 옥수수 같은 수익성이 낮은 작물의 재배를 기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땅에서 3년 이상 같은 약초를 재배하면 땅심이 약해져 약초가 잘 자라지 않는다. 때문에 땅을 놀릴 겸 해서 호박을 심는데, 호박은 잘 자라므로 생산량이 많다. 보통 한 집에서 1〜2톤, 많은 집은 5〜10톤씩 생산한다. 울릉도에서 호박엿을 생 산하는 집이 셋인데, 그들이 필요로 하는 원자재의 양이 연간 250톤쯤 된다. 그 정도의 소요량이라면 울릉도산으로 자급자족하고도 남는다.
또 하나의 주재료인 옥수수 물엿의 경우, 일부는 자체 생산으로 충당하지만 대부분은 육지에서 수입하고 있다. 전에는 울릉도에서 생산한 옥수수로 물엿을 만들었으나, 약초 재배로 옥수수 생산이 저조하자 최근에는 아예 물엿 상태로 육지에서 공급받고 있다. 그런데 약초값의 하락으로 약초 재배가 인기를 잃고 있는데다. 옥수수 물엿의 수입으로 호박엿이 순수한 울릉도산이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어 섬내에서 생산한 옥수수로 물엿을 만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호박은 장기 보관이 어렵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수분의 함량이 많아 쉽게 썩기 때문 이다. 가을에 거두면 겨울까지는 보관이 가능 하지만, 봄이 되면 썩어버린다. 따라서 해동이 되기 전에 미리 삶아 잼 상태로 보관해 두어야 한다.
울릉도는 습기가 많다. 엿은 습기를 잘 흡수하며 열을 받으면 쉽게 녹는 성질이 있다. 엿에 습기가 내리면 표면이 축축해지며 눅어 버린다.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잃는 것이다. 또 엿은 열을 받으면 쉽게 녹기 때문에 울릉도에서 팔 상품과 육지에서 팔 상품은 다르게 만들어야 한다. 양자 사이에 기온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한여름이면 육지는 33〜35도 되는 날이 많은데, 울릉도는 평균 기온이 27〜28도로 30도를 넘는 날이 거의 없습니다. 온도 차이가 10 도 가까이 되면 엿이 금방 녹습니다. 여기서 몰랑몰랑한 엿을 육지로 가져 가면 거기서는 죽이 되어 못먹습니다 여기서 딱딱해서 못먹을 정도가 되어야 육지로 가져가면 몰랑몰랑 해지죠. 그만큼 온도에 민감하기 때문에 4월에 생산한 것은 7월에 팔질 못합니다. 4월에 만들더라도 7월에 팔 것이면 7월 기온에 맞춰 제품을 만들어야 해요.”
주고객은 관광객
울릉도에서 호박엿을 생산하고 있는 업체 는 민간인 2개 업체와 농협 등 3개 업체이다. 그 중에서 호박엿을 맨처음 개발했고 생산량 도 많은 데가 울릉둥글호박엿이다.
울릉둥글호박엿은 한동수 • 정봉순씨 부부와 아들 상환씨가 같이 운영하고 있다. 회사 대표 자리는 부인 정봉순씨가 맡고 있으나 실질적인 경영은 아들 상환씨가 맡고 있다. 그러나 호박엿을 맨처음 개발한 사람은 남편 한동수씨였다.
경남 합천 출신인 한동수씨(62세)는 20세 때 울릉도로 들어가 제과업에 종사하던 중 그곳 출신인 정봉순씨를 만나 결혼했다. 그 후 한때 가족을 데리고 대구로 이사해 살기도 했으나 몇년 후 다시 울릉도로 돌아가 제과점을 운영했다. 그가 울릉도 호박엿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였다. 그 무렵 울릉도와 육지를 잇는 카페리호가 운항되면서 울릉도를 찾는 관광객이 늘기 시작했는 데, 그들 관광객들에게 내놓을 특산품으로 개발한 것이 호박엿이었던 것이다.
울릉도 호박엿의 역사는 울릉도 개척의 역사가 시작되는 1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울릉도가 삼국시대부터 우산국(于山國)이라는 이름의 독립국가로 존재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서서는 왜구나 여진족의 침탈이 심하자 정부는 공도화(空島化)정책을 실시하여 섬을 비워 버렸다. 그 후에도 정착하는 사람들이 늘자 세종 시대에는 본토로의 귀환령을 내리고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그 뒤에는 섬을 비우고 1년에 한번씩 정기 순찰을 했으나, 그 틈을 타 왜인 들이 침입하여 벌목과 고기잡이를 일삼자 조선 정부는 1882년 울릉도개척령을 내리고 이민을 권장하였다. 그때부터 본토에서 이민이 흘러 들어가 울릉도 개척의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호박엿 역시 개척민들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민간에 전해오는 비법을 터득해 호박엿을 재생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섬 주민인 부인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고, 제과점을 운영하던 경험도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수작업으로 호박엿을 만들다 보니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점착성이 매우 강한 엿을 하루 종일 만지고 나면 손바닥이 닳고 터졌다. 5명이 하루 종일 달라붙어 만들어도 인건비를 건지기 어려웠다. 때문에 작업 과정의 기계화 가 불가피했는데, 역시 제과점을 운영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어느 정도 자동화 시설이 갖춰지자 한동수 씨는 제과업을 청산하고 호박엿 생산에 전념 했다. 판매는 장사 수완이 좋은 부인 정봉순 씨가 맡았다. 부부 사이에 자연스럽게 역할분담이 이뤄졌던 것이다. 아들 상환씨(35세)는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제대를 한 뒤 곧바로 집안 사업에 뛰어들었다 먼저 아버지에게 호박엿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고 이어서 어머니에게 장사술을 익혔는데,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부모로부터 경영권을 물려받고 있다.
처음에는 호박엿을 관광객들이 사갔다. 그러다 보니 주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 7〜8월에 팔렸다. 자연히 계절성 장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윽고 입시철인 겨울철에도 팔렸다. 엿을 먹으면 입학시험에 붙는다는 속설 때문인지 입시철이 다가오면 전국 각지에서 주문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관광객이 찾아오는 기간이 3월부터 9월까지로 늘어남에 따라 장사 기간도 늘어났다. 게다가 백화점 등에서 주문이 들어오면서 1년에 10개월 장사는 될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편주문판매를 시작하면서 판매액이 급격히 늘기 시작 했다.
울릉둥글호박엿은 주로 섬내에 있는 특산품가게를 통해 팔린다. 고객은 관광객들이다. 울릉도를 찾는 사람은 누구나 한두 봉지씩 사므로 굳이 광고할 필요가 없다. 적은 양이지만 육지에 있는 울릉도 특산품판매점이나 백화점에서도 팔린다. 맨 처음 상품화했을 때는 농협을 통해 판매했으나 농협이 직접 생산하면서 경쟁자로 둔갑해 버렸다. 그러고 나자 귀중한 거래처로 등장한 것이 우체국이었다.
울릉둥글호박엿이 우편주문판매로 선보이기 시작한 것은 1989년이었는데, 10년이 채 못 된 1997년도 판매액이 1억 9천여만원이나 되었다. 전체 판매액의 절반 가까이 되는 양이다. 가만히 집에 앉아 현찰을 받으면서 전국 각지로 팔므로 매우 소중한 거래선이 아닐 수 없다. 울릉도 특산품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만큼 편한 장사를 하고 있는 셈이다.
“특별히 선전을 하지 않더라도 울릉도 하면 호박엿과 오징어 아닙니까. 그런데 오징어 값이 워낙 비싸다 보니까 호박엿이 많이 팔리는 것 같습니다. 오징어 한 축 살 돈이면 여러 군데 선물할 수 있는 호박엿을 살 수 있고, 또 제품도 다른 엿보다 조금 덜 달면서도 맛이 있으니까 많이 팔리는 것 같습 니다.”
울릉도 호박은 살이 많고 당도가 높아
울릉도 호박엿은 현재 가락엿과 판엿, 젤리, 잼 등 네가지 형태로 공급하고 있다. 잼은 호박 조청에 옥수수 물엿을 섞어 약간 달인 것이며, 거기에 우뭇가사리를 넣고 묵 형태가 될 때까지 달인 것이 젤리이다. 다시 젤리를 물기가 가실 때까지 달이면 엿이 된다. 그러니까 젤리는 잼보다 많이 달이되 엿보다는 적게 달인 것이다.
엿은 만드는 방법과 모양에 따라 갱엿과 흰엿으로 구분한다. 조청을 되게 졸여 둥글넓적하게 굳힌 것이 갱엿이고, 갱엿으로 굳기 전에 계속 늘여 여러번 켜면 공기가 들어간 흰 빛깔의 엿이 되는데, 그것을 흰엿이라 한다. 갱엿은 강엿이라 하기도 하고 검은 빛깔이 나므로 검은엿이라 하기도 한다. 흰엿은 엿가래를 부러뜨리면 크고 작은 구멍이 많이 나 있는데, 옛날부터 엿치기를 하던 엿이 바로 그것이다. 울릉도에서는 판엿을 ‘판형’이 라는 이름으로 팔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갱엿에 해당한다.
호박의 주성분은 당분이다. 일반적으로 수분이 70〜80%, 탄수화물이 5〜13%를 차지하며, 그밖에 카로틴이 풍부하고 비타민C도 적당히 들어 있다. 호박 속에 들어 있는 당질은 녹말이 대부분이고 유리당으로서 설탕과 덱스트린도 들어 있다. 잘 익을수록 설탕과 포도당 등의 당분이 늘어나기 때문에 단맛이 증가한다. 따라서 호박엿의 원료로 쓰는 호박은 제대로 익은 청둥호박이어야 한다. 호박은 소화 흡수가 잘되고 영양가가 높으므로 익은 호박은 엿 외에도 죽이나 떡을 만들어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