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장생의 영약 금산 인삼
금산읍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박희현씨는 일찍부터 한눈을 팔지않고 아버지 밑에서 견습생 생활을 하다가 업인 인삼장사를 이어 받았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금산에서 인삼 농사를 지었다.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금산에도 인삼밭이 흔하지 않아 한 사람이 100〜200평, 많아야 300평 정도의 인삼밭을 경작했는데, 아버지는 300평 가량을 경작했다. 그 후 금산에 인삼을 심을 땅이 부족해지자 진안으로 옮겨 친구들과 동업으로 3천평을 경작했으며, 잘 나갈 때는 혼자서 1만 2천평을 재배하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박희현씨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인삼 재배법과 가공법을 배웠다. 이어 장사법마저 배웠다. 아버지의 훈수를 받으며 밭떼기 장사도 했다.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장사기법을 넓히기도 했다. 제대를 한 다음에는 선배들과 동업으로 인삼 장사를 했다. 그러다 1983년 아버지의 자금 지원을 받아 금산읍내에 가게를 차려놓고 독립적으로 인삼 장사를 시작했다. 그 무렵 금산 읍내에는 100여개의 인삼 가게가 있었다.
그의 장사법은 아버지 세대와는 달랐다. 아버지 세대의 장사는 자가 생산한 인삼이나 이웃에서 구입한 인삼을 건삼으로 가공해 집으로 찾아오는 한약종상이나 보따리장수에게 팔거나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케일이 달랐다. 보따리장수를 상대로 소규모 장사에 만족하지 않고 인삼을 대량으로 소비하는 큰 회사를 상대했다. 그 무렵에는 인삼을 원료로 하여 인삼차와 드링크제를 만드는 회사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났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회사인 일화 · 두산 등과 손을 잡았다. 굳이 거래처를 찾아 나설 필요도 없이 그들이 제 발로 찾아왔던 것이다.
인삼차나 드링크제용으로 쓰이는 인삼은 주로 생건삼과 미삼이었다. 구입 대금은 일 화 · 두산 등 대기업에서 대므로 원료삼을 알선해 주고 수수료 수입만 챙기면 되는 일이었다. 원료삼을 공급할 사람은 경작자나 가공 업자, 소상인 등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그 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그의 능력이었고, 또 품질 좋은 원료삼을 구입하는 것은 일종의 노하우였다.
금산의 인삼 시장은 인삼의 수확기인 8월 부터 10월까지 3개월 동안에 형성된다. 그러한 인삼철이면 장날 하루에 5천근이 팔렸다 수수료 수입은 근당 500원꼴이었다.
그러는 한편 1천여평의 인삼 밭을 경작하고 있었고,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밭떼기 장사도 꾸준히 했다. 또 서울 경동시장이나 한약종상과도 거래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굳이 찾아가 거래를 트려 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먼저 찾아왔다. 대기업에서 선물용으로 다량으로 주문해 오기도 했다.
우편주문판매에는 그 제도가 실시되기 시 작한 해인 1986년부터 참여했다. 초창기에는 하루에 한두건씩 주문이 들어왔으나 그것도 반갑고 신기해 매일 우체국에 들러 확인하곤 했다. 그런데 공급 품목을 늘려 수삼을 판매 하자 판매액이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그처럼 젊은 나이에 시작한 인삼 장사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시 작한 지 7〜8년쯤 지나자 연간 매출액이 5〜6억원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세기삼업사의 1997년도 매출액은 20억여 원. 그 중에서 우편주문판매가 차지하는 비중은 20% 남짓 된다. 20대 후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미 100여개 업체가 달리고 있는 경기에 뛰어들어 10년 남짓 한 기간에, 그것도 330여개로 늘어난 업체 가운데서 10위권에 들었으니 성공했다고 아니할 수 없다.
홍삼은 6년근, 백삼은 4년근
인삼은 오갈피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식물로서 뿌리를 약용으로 쓴다. 줄기나 잎은 겨울에 말라 죽지만 뿌리는 계속 살아 있는 숙근성 (宿根性)이다.
인삼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 · 중국 · 일본 · 시베리아 · 미국 · 캐나다 등지에서도 재 배되는데, 한반도에서 재배되는 고려인삼과 다른 지역에서 나는 인삼과는 뿌리의 모양이 다르다. 인삼(人蔘)이란 원래 ‘사람의 모양을 한 삼’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인데, 그런 뜻에서 본다면 인삼이란 고려인삼에만 적용된다고 하겠다.
고려인삼은 북위 33〜38도 사이의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재배되는데, 특히 북위 36〜38도에 위치한 중부지방이 재배 적지로 꼽히고 있다. 전에는 인삼이 개성 · 금산 · 풍기 등 일부 지역에서만 재배되는 것으로 알았으나, 재배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강화 · 김포 · 포천 등 경기도는 물론 강원도와 충청도의 일부 지역, 그리고 진안 · 완주 · 무주 등 전라도까지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다.
인삼은 가공 형태에 따라 수삼 · 백삼 · 홍삼으로 나눈다. 수삼은 밭에서 캐내 아무런 가공도 하지 않은 생인삼인데, 약효가 잘 보존되어 있어 인기가 높다. 그러나 수분의 함 량이 70%나 되어 저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백삼이나 홍삼으로 가공한다. 약용으로는 4〜6년생이 많이 쓰이나 식용으로는 1년생인 종삼을 쓴다.
백삼은 수삼의 껍질을 벗기고 잔뿌리를 떼내어 말린 인삼이다. 주로 4년근 수삼으로 만든다. 백삼은 햇볕에 말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훈풍건조기로 말리기도 한다. 수분의 함량을 12% 이하로 낮춰야 한다. 수삼을 백삼으로 말리되 껍질을 벗기지 않는 것을 생건삼이라 한다.
백삼은 가공 방법과 형태에 따라 몇가지로 구분된다. 수삼을 만들 때는 뿌리의 일부를 구부리는데, 뿌리를 구부리지 않고 원래의 모양 대로 말린 것이 직삼이다. 햇볕에 말리는 과정에서 완전히 마르지 않은 인삼의 뿌리를 완전히 구부려 말린 것을 곡삼, 다리 부분을 약간 말아올린 것을 반곡삼이라 한다. 대표적인 곡삼이 금산인삼이고 반곡삼은 풍기인삼이다.
홍삼은 수삼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쪄서 말린 인삼이다. 주로 6년근 인삼을 이용한다. 홍삼은 담배인삼공사의 전매품이며 백삼과 수삼은 민간에게 제조와 판매를 허용해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홍삼도 민간이 제조 하여 검사를 받은 다음 판매하도록 허용했다.
현재 우리나라 인삼은 홍삼포와 백삼포로 구분해 재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홍삼포는 6년근까지의 인삼 농사를 짓고 있고 백삼포는 4년근 이하의 농사를 짓고 있다. 강화 · 포 천 · 안성 등 경기도 지역의 인삼밭은 주로 홍삼포이며 금산 · 진안 · 무주 등 남부지역의 인삼밭은 백삼포이다.
일반적으로 인삼은 6년근을 최상품으로 친다. 3년근까지는 크기도 작을 뿐 아니라 유효 성분인 사포닌의 함량이 적다. 4년근 이상이 되면 인삼의 성장 속도가 빨라지며 6년근이 되면 잔뿌리까지 고루 자란 모양을 갖게 되고 사포닌의 함량도 몇배 늘어난다. 그러나 7년이 넘으면 뿌리가 커지기는 하지만. 껍질이 목질화되는 등 품질이 떨어지므로 재배하는 인삼은 6년 이상 키우지 않는다.
여름인삼은 사포닌 함량이 높아
인삼의 고장 금산에서는 해마다 가을이면 인삼제가 열린다. 1981년부터 열렸는데, 인삼 아가씨 선발, 씨름대회. 농악경연대회, 가장 행렬, 백일장, 인삼제품 할인 판매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처음에는 10월에 열렸으나 최근에는 9월로 앞당겨졌으며. 개최 기간도 이틀에서 3일로 늘어났다.
또 금산에는 인삼을 파는 큰 시장이 여럿 있다. 오랜 역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인삼전통시장 외에 전국 최대의 거래량을 자랑하는 수삼센터, 전국 백삼 생산량의 70〜80%가 거래되는 인삼국제시장. 인삼 종합백화점인 종합쇼핑센터가 국내외 인삼 상인은 물론 많은 관광객을 끌고 있다. 또한 부근에는 약초시장까지 형성돼 있어 인삼시장의 값어치를 높여주고 있다.
이렇듯 인삼의 고장임을 강조하는 금산이 우리나라 인삼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 느 정도나 될까?
“금산 인삼으로 1997년도 1년 동안 유통된 금액은 수삼이 1,530억원, 건삼이 870억원으로 총 2,400억원쯤 됩니다. 우리나라 인삼 유 통량의 70〜80%가 금산에서 이뤄진다고 하지만, 실제로 50% 정도 될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공식적으로 거래되는 전국의 인삼 시장 규모는 5,000억원쯤 될 것이며, 거기에 비공식적인 거래까지 따진다면 8,000억원쯤 될 겁니다.’, 세기삼업사 대표 박희현씨의 말이다.
그렇다면 금산은 어떻게 해서 우리나라인 삼시장의 중심지가 되었을까?
우리나라 인삼은 이미 1.500여년 전부터 고려삼 · 백제삼 · 신라삼으로 구분되었다. 5세기말에 중국 양나라 학자 도홍경(陶私景)은 중국 최고의 의학서인 신농본초경(神農本 草經)을 고쳐 썼는데, 거기에서 “백제 삼은 모양이 가늘고 단단하고 둥글다. 고려 삼은 모양이 크고 허하고 연하다. 고려 삼은 백제 삼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또 다른 기록은 “백제 삼은 희고 단단하고 둥글며, 고려 삼은 자주빛에 가깝고 질이 허하고, 신라 삼은 아황색이며 맛이 진하지 않다.”며 인삼의 산지에 따른 특성을 비교했다.
그 뒤 백제 삼은 금산인삼으로. 고려 삼은 개성인삼으로 전통이 이어졌다. 그런데 6 · 25사변의 발발로 고려인삼의 본고장인 개성의 인삼단지가 초토화되고 금산 인삼이 그 공백을 메꾸면서 금산이 한국 인삼의 메카로 대두되었고, 따라서 고려인삼이라는 타이틀까지 자연스럽게 획득했던 것이다. 해방 직후 금산은 한때 우리나라 인삼 생산량의 90%, 그리고 1970년대에는 80%를 차지하기도 했으나, 재배 기술의 발달로 인삼 재배지가 전국으로 확대됨에 따라 그 비중이 30% 정도로 떨어졌지만, 아직도 국내에서 생산된 인삼은 대부분 금산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 우리나라 인삼 시세가 그곳에서 형성되고 등외품의 가공이 그곳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강화나 풍기 등지에서는 담배인삼공사에 직접 납품하고 또 상품화가 될 수 있는 상품은 직접 팔지만, 상품화가 될 수 없는 것, 예를 들면, 상처가 났다거나 다리가 부러졌다거나 하는 인삼은 전부 금산으로 가져와야 백삼으로 제조를 합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그럴 기술도 없고 인력도 없어요.”
흰 빛깔을 띠고 있는 금산 인삼은 몸체가 길고 육질이 단단한데, 전통적으로 곡삼으로 가공해 왔다. 그러한 금산 인삼의 특징은 여름인삼이라는 것. 7월부터 채취하기 시작하여 10월까지 가공하는 여름인삼은 11월부터 채취하는 겨울인삼에 비해 인삼의 주성분인 사포닌의 함량이 높다.
솔잎과 토종꿀로 만드는 영동 솔잎엑기스
우편주문판매로 영동 솔잎엑기스를 공급 하고 있는 대양영농조합법인 대표 이홍기씨(40세)는 농촌운동가였다. 고향인 영동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을 포기하게 되자 곧바로 농사일에 뛰어 들었다. 시골에서 누구나 하는 벼농사와 무 · 배추를 재배하는 밭농사부터 시작했다.
2〜3년 후에는 흑염소와 뱀 사육을 시작했다. 흑염소의 사육은 남 따라 했던 것이고 뱀의 경우 남들과 색다른 사업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시도했던 것이다. 뱀이 살아가는 자연환경을 그대로 조성해 주면 사육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모험을 했던 것인데, 생각보다 잘 자랐다. 그런데 200 마리까지 늘어난 염소는 공급 과잉으로 염소 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집어치웠고,잘 나가던 뱀 사육도 서울올림픽 개최로 건강식품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국내외에서 비등하자 건강원이 하나둘 문을 닫기 때문에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사와 축산일도 재미있었지만 피 끓는 젊 은이를 잡아끄는 것은 4H운동이었다. 그의 고향인 영동군 매곡면 어촌리 4H클럽은 그 무렵 20여명의 회원이 모여 퇴비 증산이며 병충해 방제, 그리고 모범구락부 만들기 등의 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또 공동작업도 했는데, 그런 일들이 집안 일보다 훨씬 강렬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그러자 그는 4H운동에 젊음을 불태우기로 하고 우선 부락단위 회장을 맡은 다음 이듬해에는 면단위 회장을, 그리고 다음해에는 군단위 회장을 맡았다.
4H회장은 대의원들이 투표를 통해 선출한다. 군단위 회장이 되고 보니 도단위 회장도 별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다. 도단위 회장이 저 정도 인물이라면 나도 한번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선에 참여한 결과 어렵지 않게 당선되었던 것이다. 1982년의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자리가 중앙연합회장이었다. 기왕 밀고 올라간 김에 끝까지 밀기로 했다. 대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전국을 한 바퀴쯤 돌았다. 그리고 당선되었다. 부락단위 회장을 맡은 후 매년 한 단계씩 뛰어오르다 4년만에 전국 회장까지 차지했던 것이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구상이요 도전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면 된다는 의지와 자신감을 갖고 뛰니까 어느날 갑자기 지도자가 되더군요.”
그 당시 4H중앙연합회의 공식 명칭은 새마을청소년중앙연합회로서 새마을운동본부 산하의 8개 단체 중 하나였으며. 새마을운동 본부 사무총장은 당시의 막강한 실력자 전경환씨였다. 때문에 4H중앙연합회는 막강한 권력의 비호와 풍족한 예산의 지원을 받으며 재미있게 사업을 전개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비상근의 1년 짜리 회장직을 맡은 이홍기씨가 외부 세력에 의해 움직이고 있던 조직을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주체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획일적인 사고를 가진 전경환 총재와 호흡이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고 있어 이용가치가 많은 4H중앙연합회를 냉대할 수도 없어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이름만 거창했던 1년짜리 중앙회장 자리를 물러난 다음 정부로부터 영농후계자 자금을 지원받아 고향에서 축산업을 시작했다. 종중의 산 6정보를 빌려 초지를 조성하고 한우 100마리를 사다 넣었다. 당시의 기분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겠다는 매 우 화려한 것이었다. 그런데 1년만에 한우파 동이 일어 소값은 똥값이 되었고, 그의 축산업은 완전 실패로 끝났다. 이홍기가 망했다는 소문이 인근으로 쫙 퍼졌다.
농산물 유통구조 개선이 절실해
까닭 모를 부아가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정부의 농업정책에 대한 분노였다. 정부의 권 장에 따라 애써 농축산물을 생산해 놓고 나면 가격 폭락으로 바가지쓰는 것은 농민들이 었다. 그런 일이 연례행사처럼 계속되었다.
농민의 이익을 대변할 조직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4H운동을 같이 한 동지들이 호응해 주었다. 그 결과 탄생한 조직이 전국농어민후계자회였고, 그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1989년의 일이었다. 당시의 노태우 정부는 새로 탄생한 농민단체에 대해 사시적인 눈으로 보며 방해공작을 벌이기도 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밀고 나갔다.
그러나 새로운 농민단체를 만든다고 해서 날로 심각해지는 농어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농촌이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낙후된 유통구조였다. 때문에 농축산물 유통구조 개선에 승부를 걸기로 하고, 영동군단위 농민 후계자들을 모아 유통조합을 만들었다. 즉, 농민후계자 30여명이 현금과 현물로 출자한 615만원으로 서울에 직매장을 개설하고 영동에서 생산한 특산품을 팔되 판매 책임을 이홍기씨가 맡기로 했던 것이다.
한양유통 잠실점에 직매장을 개설하고 한달 동안 영업한 결과 결산하자 300만원의 적자였다. 판매기법도 서툴렀지만 조합의 운영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매달 영동으로 내려가 보고하고 결산을 하고 감사를 받는 체제로는 소신껏 운영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한 사람이 맡아 책임지고 운영하는 책임운영제를 주장한 결과 2년만에 출자금의 2〜3배에 해당하는 배당금을 출자자들에게 지급할 수 있었다.
'저희가 싸게 판다고 해서 가격을 낮게 책정했더니 소비자들이 인정을 안해줬어요. 예를 들어, 벌꿀을 싸게 해서 내놓으면 가짜라 생각해서 그런지 안팔립니다. 오히려 비싸게 내놓으면 팔리죠. 그렇게 해서 판매기법을 터득하게 됐죠. 제대로 된 상품은 제 값을 받아야 소비자들로부터 신뢰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그 후에는 직매장은 그것대로 운영하면서 백화점과 시장에 납품하는 방법으로 시장을 넓혀 나갔다. 그러던 중 1997년에는 영동군이 서울시로부터 빌린 서초동 상가땅에 영동 농산물직판장이라는 이름의 매장을 지어놓고 표고버섯 · 곶감 · 호두 · 포도 - 솔잎엑기스 등 영동에서 생산하는 특산품과 채소류 등 70여 종과 일반 생활필수품을 팔고 있다.
주재료는 솔잎과 토종꿀
대양영농조합법인 대표 이홍기씨가 서울에 농산물직판장을 개설한 것은 우리나라 농업이 발달하지 못한 것은 농산물의 유통구조가 낙후돼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우리 농촌이 안고 있는 유통구조상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농민이 생산한 상품은 농민의 손으로 팔 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몇년 동안 직판장을 운영하다 보니 한가지 아쉬움이 남았다. 자기 자신이 생산한 상품이 없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자신이 직접 생산할만한 상품이 없을까 하고 고심하던 중 갑자기 떠오른 것이 솔잎엑기스였다.
“우리 지역 특산품을 오래 취급하면서 소비자들이 건강 식품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건강식품으로 직접 개발할 만한 게 없을까 하고 궁리하는데, 문득 솔잎차가 생각났어요. 솔잎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고, 저희 아버지께서도 자주 송엽주를 만들어 드시며 이웃에게 권하시곤 했어요. 또 솔잎 제품을 만들게 된다면 버리는 자원을 활용해 국민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시도해 보기로 했던 거죠.”
그의 고향 영동군 매곡면은 김천시와 접경해 있다. 바로 황악산 옆자락에 놓여 있다. 때문에 직지사 스님들이 솔잎차를 만들던 비법이 어느 정도 구전돼 왔다. 옛날부터 직지 사 스님들은 항아리에 솔잎차를 담가 놓고 감기나 배탈이 날 때 복용하곤 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 이인로씨는 건강식품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인로씨는 솔 잎 성분이 몸에 좋다는 책자를 탐독하고 송엽주를 만들어 스스로 즐기는 한편,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송엽주 만들기를 권장했다. 또한 평소에도 쑥이나 칡순. 돌미나리 따 위를 뜯어 말리고 또 녹즙을 만들어 마시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서울에 상주하고 있는 아들이 찾아와 솔잎 엑기스를 만들어 보자고 하자 두말 하지 않고 찬성했다.
솔잎 엑기스의 주재료는 솔잎이다. 그것도 재래종인 참솔의 잎으로 음력 4〜5월에 올라 오는 햇순이어야 한다. 참솔잎은 다른 소나무 잎에 비해 맛과 향이 뛰어나고 숙성 과정에서 엑기스가 많이 나온다. 보조 재료로는 토종꿀과 흑설탕, 화분이 들어간다. 그러나 비율로 따지면 솔잎이 40%인데 비해 토종꿀이 43.4%로 더 많다. 솔잎을 자연 그대로 숙 성 · 발효시키자면 많은 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토종꿀은 벌집째 집어넣는데 솔잎에 많이 들어있는 타닌 성분의 떫은 맛을 중화시키는 역할도 한다. 설탕은 솔잎의 발효를 촉진시키며, 화분은 여러가지 좋은 유효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건강식품으로서의 효능을 높여준다.
솔잎을 채취하면 맑은 물에 세번 씻어 말리고 5cm 간격으로 자른 다음 거기에 토종꿀과 흑설탕을 일정한 비율로 섞어 숙성시킨다. 2〜3일이 지나면 발효된 액체가 통의 밑바닥에 괴는데, 그것을 떠 콩나물에 물을 붓듯 위에서 부어주어야 솔잎의 발효가 촉진된다. 그러한 작업을 2〜3일 간격으로 계속해야 한다. 그렇게 100여일 동안 숙성시키면 그윽한 향기를 뿜는 솔잎 진액차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법을 터득하기까지에는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전문가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개발의 실무 작업은 시골에 있는 아버지가 맡았다. 그런데 개발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솔잎과 벌꿀, 설탕 등 원료의 배합 비율을 맞추는 것이었다. 배합 비율을 조금만 틀리게 해도 초가 되고 술이 되었다. 또 1차 발효가 끝난 제품을 병에 넣어두면 2차 발효가 일어나 병이 폭발하기도 했다.
그러한 문제점은 아버지나 아들의 머리로는 풀기 어렵다. 때문에 전문가의 연구와 조언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해준 데가 바로 분당에 자리잡은 한국식품개발연구원이었다. 때문에 서울에 상주하는 아들은 아버지가 맡고 있는 고향의 생산 현장과 분당의 연구소 사이를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메신저겸 해결사 역할을 해야만 했다. 또한 틈이 나는 대로 생산 현장으로 달려가 몸을 돌보지 않고 생산 작업에 몰두하기도 했다.
“애가 미련해서 그런지 쉬는 것을 모르고 일만 합니다. 앞으로 돈이 없으면 못산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밤이나 낮이나 일만 해요. 한 마디로 끈덕지죠. 고생을 엄청나게 했는데도 표현을 안해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