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해시대의 건강음료 화개녹차
’‘나는 차사업을 위해 점지된 사람인 것 같아요. 그리고 어떤 사업이든 그 사업을 일으키는 사람은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것 같아요.”
화개차의 전통을 살리고 그것을 상품화하여 국산차의 향기를 전세계에 알린 화개제다 대표 홍소술이씨는 40년의 차 인생을 회고하기에 앞서 그렇게 전제했다.
“처음부터 개인주의나 이기주의 관점에서 차 사업을 시작했다면 나도 벌써 낙오자 신세를 면치 못했을 거요. 오로지 좋은 차를 만들어 널리 보급하겠다는 일념으로 노력해 왔기 때문에 오늘날 화개차가 이만큼 유명해졌고. 또 국산차가 이처럼 널리 보급될 수 있었던 거지요.” 그처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차와 어떤 인연을 맺어 왔으며, 다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5 · 16 군사정부가 국산차를 살려
경북 고령이 고향인 홍소술이씨(68세)는 세살 때 부모의 등에 업혀 일본으로 건너갔고 해방이 된 후에 귀국했다. 10여년 남짓한 일본 생활에서 그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은 것은 일본 농가는 집집마다 차나무를 재배하고 있고, 차를 마시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귀국한 뒤에는 부산에서 살며 직장생활도 하고 장사도 했는데, 자금의 여유가 생겨 시작한 사업이 털실을 원료로 한 겨울 의복 제조업이 었다. 그런데 그 해는 날씨가 따뜻해 전혀 의복이 팔리지 않았다. 따라서 경남 일대의 지방도시에서 행상을 하는 부인들에게 수십벌씩 나눠 주며 팔아달라고 했는데, 산청에 사는 한 여인이 옷값 대신 보내온 것이 홍차였다. 불그스레한 색깔에 풋내가 나는 것이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일본의 차맛이 생각났다. 한국에도 차나무가 있단 말인가. 그는 당장 산청으로 달려갔다. 1960년의 일이었다.
산청군 시천면은 지리산 자락에 놓여 있는 마을로 천왕봉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그곳에 가서 들으니 야생 차나무는 거기보다 화개에 더 많이 있다고 했다. 화개로 가는 길을 묻자 산청으로 내려가 진주 · 하동을 거쳐 가려면 꼬박 하루가 걸린다고 했다. 그만큼 교통이 불편할 때였다. 그쪽으로 가는 길 대신 삼신봉으로 올라가 불일 폭포 쪽으로 내려가면 조금 빠르다고 했다.
“급한 마음에 안내자를 돈을 주고 사서 그 사람 뒤만 따라갔어요. 그땐 등산객도 없을 때라 길이 잘 안보였어요. 몇시간 걷는데 숲이 꽉 차고 어두운데다 나무기둥에 곰 발자국까지 나있는 것을 보니 겁이 덜컥 났어요. 그렇다고 되돌아올 수도 없어 마지못해 걸어서 밤 8시경에야 화개에 도착했지요.”
소문대로 화개에는 야생 차나무가 많이 있었다. 홍차를 만들어 외지로 팔러 다니는 노인도 있었다. 부산으로 돌아가도 별로 할 일이 없던 홍소술이씨는 화개에 눌러앉아 차를 만들었다.
주로 홍차였다. 녹차도 만들고 현미녹차도 만들었으나 녹차는 팔리지 않을 뿐 아니라 만드는 기간도 길어야 한 달에 불과했다. 홍차 역시 잘 팔리지는 않았다.
이듬해에 5 · 16군사혁명이 일어났다. 갑자기 서광이 비치는 느낌이었다. 빈곤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하겠다며 중농정책을 표방하는 혁명 정부의 외침이 감동적으로 들렸다. 실제로 모든 외제차의 수입이 금지되었다. 외제 커피가 판을 치던 풍토에서 국산차가 보급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화개장터 건너편 동네에서 집 한채를 빌려 홍차 가공공장을 차렸다. 그러자 농어촌 소득증대사업을 한다고 해서 군수가 찾아오고 지방신문이 크게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한 기사를 읽고 외지인 4〜5명이 찾아와 그를 본따 차 공장을 차렸다. 그때는 차가공업이 허가를 받을 때가 아니므로 누구나 마음대로 차를 만들어 팔 수 있었다. 그는 홍차를 직접 만들고 또 그것을 들고 부산 등지의 다방을 순례하며 팔기도 했으나, 현지인을 채용해 남의 손으로 운영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1년만에 손을 들고 말았다.
이듬해가 되자 그와 조태연씨 두 집이 남았다. 홍차를 만들 줄 모르는 조태연씨는 녹차를 만들다 나머지 기간은 두부를 만들어 팔곤 했다. 그러나 꾸준히 홍차를 만들던 홍소술이씨는 차 원료를 확보하기 위해 구례나 광양, 보성, 해남 등지를 순례하며 사업 영역을 넓혀 나갔다.
원료를 사 홍차로 가공해 팔고 있는 차사업이 그럭저럭 밥을 먹을 수 있는 정도는 되었으나 그 이상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차사업을 안정적으로 꾸려 가자면 차나무를 직접 재배하여 원가를 낮추어야 하는데, 직접 땅을 사 재배하려면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었다. 따라서 그러한 역할은 그곳 사람들이 할 수 있을 것 같아 주민들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다.
“내가 살고 있는 탑리와 법하부락 이장들과 만나 마을 사람들이 밭을 임대해 주면 수세를 배로 주는 동시에 그 밭에 차나무를 심어 5년 후에는 그대로 돌려주마고 했지요. 그런데 조건이 너무 좋기 때문인지 주민들이 뭔가 이상하다며 반대했어요. 그러나 몇 개월에 걸쳐 주민들을 설득한 결과 그들의 의심을 풀고 재배에 성공할 수 있었죠.’,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국산 녹차를 재배하게 되었고 덕분에 사업 규모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500여평의 땅에서 나는 찻잎으로는 갈수록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기어렵기 때문에 차나무 재배지로 유명한 전남 보성으로 진출해 5천여평의 다원을 확보했고, 다시 인근의 악양에 1만 5천평의 차나무 재배단지를 조성했다.
홍차는 발효차, 녹차는 불발효차
차(茶)는 봄에 피는 차나무의 어린 잎을 따 여러가지 방법과 형태로 가공한 다음 물에 우러낸 음료를 말하는데, 차나무의 종류와 가공 방법에 따라 수많은 이름이 있다. 차나무의 품종에는 중국종과 인도종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차에는 야생차와 재배차가 있다. 야생차는 828년 신라의 사신 대렴(大廉)이 당에서 가져온 차의 종자를 지리산에서 심은 데서 비롯하는데, 중국산 소엽종(小葉種)으로 화개 쌍계사와 구례 화엄사 주변에 서식하고 있다. 재배차는 중국의 소엽종을 개량한 일본산 차인 야부기다 따위의 개량종을 일제시대부터 들여와 심은 것으로 전남 보성과 강진, 제주도 서광 등이 대표적인 산지이다.
차는 발효(酸餚)의 유무나 정도에 따라 발효차인 홍차와 부분 발효차인 우룽(鳥龍)차. 불발효차인 녹차로 나뉜다. 홍차(black tea)는 찻잎을 적당히 말린 다음 그것을 비벼 발효시킨 것으로 찻잎의 타닌 성분이 산화되어 홍차 특유의 맛과 빛깔을 갖추게 되며, 녹차(green tea)는 찻잎을 찌거나 덖은 다음 바로 건조시킨 것이므로 찻잎에 들어있는 엽록소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열대나 아열대 지방에서 나는 차는 타닌 함량이 많아 발효용 차로 쓰이고 온대지방에서 나는 차는 녹차용으로 알맞다고 한다.
발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차인 녹차는 작설차, 죽로차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작설차는 초 봄에 돋아나는 찻잎이 참새의 혀처럼 생긴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녹차 중 상품으로 대접받으며, 죽로차는 대나무 밑에서 자라는 차나무가 댓잎에 맺힌 이슬을 받아 먹고 자란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으로 최고급품으로 꼽힌다. 또한 곡우 이전에 따는 찻잎으로 만든 차를 우전차(雨前茶)라 하며. 이른 봄에 눈밭에서 따는 차를 일본에서는 춘설차(春雪茶)라 한다. 또한 작설차는 세작(細崔) · 중작(中崔) · 대작(大崔)으로 나뉘기도 하는데, 이는 품질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찻잎의 크기에 따라 붙인 이름이다.
차는 여름이나 가을에 따는 차보다 봄에 따는 차가 좋으며, 그 중에서도 곡우 이전에 따는 차를 우전세작(雨前細崔)이라 하여 매우 귀하게 여긴다.
“녹차는 세작 때는 누가 만들어도 차 맛이 있어요. 차를 제대로 못만들어도 못만든 대로 맛이 있지요. 그때 나온 찻잎에 아미노산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죠. 그런 까닭으로 아무리 진하게 우려내서 마셔도 쓰고 떫은 게 없어요. 맨처음 나온 차는 무조건 만들어 마시면 돼요.”
1990년부터「화개작설차」라는 이름으로 우편 주문판매를 통해 화개차를 공급하던 홍소술이 씨는 도중에 그 이름을「화개옥로차」로 바꾸었다. 그 이유를 들어보자.
“작설차는 이른 봄에 맨처음으로 올라오는 두 닢 내지 세 닢으로 만든 것이어요. 그런 잎으로 만든 것은 누가 만들어도 작설차요 그렇지 않는 것은 작설차라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닌 것도 작설차라 하거든요. 그래서 나부터 바꾸자고 해서 옥로차로 바꾸었던 거지요.” 그렇다면 옥로차란 어떤 뜻을 지니고 있을까?
“특별한 뜻이 있는 게 아니고 내가 만드는 녹차의 이름이죠. 설록차라는 것이 그것을 만드는 회사 차의 이름이듯이 옥로차는 화계제다 제품의 상품명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한국인은 모름지기 다례를 알아야
홍소술이씨는 화개차사업의 개척자요 국산차 발전의 공로자이다. 그는 야생으로 버려져 있다시피 한 화개차와 인연을 맺은 후 그것의 상품화에 성공함은 물론 아무도 시도하지 않던 우리 전통 차나무의 재배에도 앞장섰다. 그는 농토가 부족한 화개에 안주하지 않고 이웃 마을인 악양은 물론 멀리 보성으로 차 밭을 넓혀 나갔다.
지난 40년 동안 그는 항상 자신의 차공장을 개방해 놓고 있다. 누가 찾아와도 공장을 구경 시키며 차 만드는 방법을 알려준다. 손님이 그의 공장에서 직접 차를 만들어도 말리지 않는다.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공장을 구경하고 또 자문을 구한다.
“어떤 지방에서는 스님들이 찾아와 차를 만들면 주민들이 불법으로 차를 만든다며 신고를 합니다. 그러면 관에서 와서 압수해 가죠. 여기서는 지금까지 그런 일이 없었어요. 아무나 와서 차를 만들 수 있지요. 한번은 쌍계제다의 조태연씨가 찾아와 ‘우리는 엄청나게 고생해서 차를 만들게 됐는데, 난데없는 사람들이 찾아와 차를 만든다고 하니 가만 놔둘 거냐?’고 해서 ‘나는 지금까지 남을 고발하고 고소하는 행위를 할 줄도 모르고 그럴 생각도 없다'며 거절했어요.”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차를 만들어 널리 보급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차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같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무조건 좋은 차를 만들어야 하고, 좋은 차를 만들었으면 어떻게 하든지 보급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도 나 혼자서만 보급하는데 앞장설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같이 노력해야 결과가 좋을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나는 저절로 좋아지지 않겠어요.”
몇년 전까지만 해도 판매용으로 차를 만드는 것은 보사부장관의 허가 사항이었다. 이 문제를 놓고 그는 여러 차례 서울을 오르내리며 보사부 담당자들을 만나 입씨름을 벌였다. ‘1차 단순가공식품이란 것은 농민이면 누구나 만들 수 있다. 그런 사항을 가지고 왜 시험소를 만들어라, 위생복을 입어라, 보건증을 내라며 까탈스럽게 하느냐. 그것은 우리 법이 잘못된 것이다. 차를 만드는 것은 일본에서도 허가사항이 아닌데, 우리만 그러느냐.”며 따졌다. 그러한 노력이 주효했던지 몇년 전부터 허가 품목에서 제외되었다.
화개의 명찰인 쌍계사 입구에는 대렴공차시배추원비(大廉公茶始语追遠碑)라는 비석이 서 있어. 쌍계사가 우리나라 차의 시배지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차의 도래를 말하는 가장 오랜 기록인 삼국사기는 흥덕왕조에서 “당에서 돌아오는 사신 대렴이 차의 종자를 가져오매 왕은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 때에 이르러 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속의 지리산이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남아있는 차나무 밭과 뒷날의 기록으로 미루어 삼신산 쌍계사와 지리산 화엄사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할 뿐인데, 두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런데 한국차인연합회가 쌍계사 앞에 시배추원비를 세움으로써 화개의 손을 들어준 셈인데, 이에 앞서 홍소술이씨가 화개의 전통 차밭을 일구고 화개차를 개발하여 그 이름을 빛낸 덕분에 시배지 논쟁이 쉽게 잠재워졌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그가 그처럼 차의 보급에 열성을 쏟으며 녹차 마시기를 권장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우리 생활에 규범이 없다는 점이어요. 우리나라 사람은 교육 수준이 높아서 말은 참 잘해요. 그런데 나무를 놓고 얘기할 때 가지만 말할 뿐이지 뿌리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것은 규범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규범이란 지키고 안지킬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지키지 않으면 안될 가치인 거죠. 저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규범을 다례를 통해 익힐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그래서 한국 사람은 모름 지기 다례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외치고 다니는 거지요.”
차는 덕을 갖춘 사람들이 마시는 음료
차는 중국에서 시작해 한반도와 일본으로 퍼졌다. 우리나라에 차가 전래된 것은 신라시대 였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성행하면서 차를 마시는 습관이 널리 퍼졌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불교가 쇠퇴하면서 차는 일반 서민과 거리가 멀어졌다. 따라서 중국과 일본에서는 차를 마시는 습관이 일상생활화된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절의 중이나 일부 양반가에서 마시는 고상한 음료수 정도로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 건강식품과 기호식품으로서 차의 효능이 널리 알려지면서 녹차를 마시는 인구층이 두터워지고 있다.
녹차의 주성분은 카페인과 타닌, 아미노산등이다. 카페인 등의 알칼로이드 성분은 중추신경을 흥분시켜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어주는 작용을 하며, 타닌은 위장 등 소화기계통을 튼튼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아미노산 중의 한 성분인 테아닌은 녹차 특유의 맛을 내는 작용을 한다. 녹차에는 그밖에도 플라본 계통의 성분이 들어있어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해 동맥경화 증이나 뇌졸중을 방지한다. 또한 녹차는 강심 작용과 이뇨작용을 겸하고 있어 체내의 노폐물을 몸밖으로 배설시키는 작용도 한다.
“우리가 밥과 반찬을 먹고 나면 다 몸에 좋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농약을 먹고 자란 것이어서 쌀에도 독이 있고 채소에도 독이 있어요. 그러한 음식 속에 들어있는 독소를 중화시키는 일을 바로 차가 하는 겁니다.
또 요즘 생활 수준이 향상되다 보니 기이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40〜50대 멀쩡한 사람들이 고혈압이나 당뇨 · 암 등으로 쓰러져요. 입맛은 살아 있어 술 · 담배는 기본이고, 거기다가 고기며 커피 따위를 상식하다 보니 자기 욕구를 중화시킬 힘이 없어 그리된 거지요. 그래서 혹자는 야채를 많이 먹으라고 하는데, 그것은 한국에 녹차가 있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여요. 녹차가 있다는 걸 알면, 마음대로 먹고 나서 녹차를 마시면 된다고 하면 될 일이죠. 녹차가 고기를 먹은 후 야채 대용으로 그렇게 좋은 겁니다.”
그러한 녹차가 옛날에는 감기약으로 쓰였다고 한다. 시인이자 차 연구가인 김필곤씨의 말을 들어보자.
“시골에 약이 없었던 옛날에는 작설차가 가정상비약이었어요. 화갯골에서는 노인네들이 하루 종일 화로에 차를 다려놓고 마셨어요. 화개 사람들은 독감에 걸리면 차를 진하게 다려 마셨는데. 특히 감기몸살에 특효약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