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용으로 인기를 끄는 보령 대천 김
김 · 미역 · 다시마 등의 해조류는 우리 민족이 즐겨 먹는 전통적인 식품이다. 그 중에서 김은 우리나라 해조류 양식의 효시이며 아직까지도 해조류 양식산업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김은 400여년 전에 전남 광양에서 토산물로 채취하였다고 동국여지승람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김을 맨 처음 양식한 곳은 전남 완도로 알려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에 섬의 고장인 완도지방에서 방렴(防簾)이라는 기구로 양식을 시작했던 것이 김 재배의 시초인데, 지금은 그 방법이 많이 개량되었다. 아무튼 완도 와 강진만이 김 생산의 중심지가 되어 전남 일대에서 우리나라 전체의 80%를 차지할 만큼 많이 생산하고 있다.
전남에 이어 많이 생산하는 지방이 충남이다. 태안반도에서 서천에 이르는 서해 바닷가 일대가 충남의 김 생산지이다. 예로부터 완도 김에 비해 명성은 뒤떨어지지만 맛은 못지않다는 것이 그곳 사람들의 주장이다. 그런데 최근 그곳 김의 이름을 베스트셀러 목록에 끌어올린 업체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우편주문판매로 보령 대천김을 공급하고 있는 현대수산이다.
13세 때부터 김 양식을 시작해
현대수산 대표 유광호씨(45세)는 13세 때부터 김 양식을 시작했다. 그의 고향 송도는 육지에 바싹 붙어있어 썰물 때는 육지요 밀물 때는 섬이므로 초등학교 시절에는 수영을 하며 통학 하기도 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데다 세 동생의 학비마저 책임져야 할 처지였으므로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는데, 생활 방편으로 선택한 것이 김 양식이었다. 마침 고모부 중 한 사람이 자금을 대주어 김 양식을 시도할 수 있었다.
김 양식의 원리는 간단하다. 김은 원래 나무 따위에 잘 달라붙는 성질을 이용해 양식한다.
김 양식은 추분 때부터 시작한다. 4〜5월이 되면 김이 늙어 흩어지는데 그때 김의 포자가 떨어져 나가 바다 밑바닥에 깔린 굴 껍질 속에서 여름내 성장한다. 추분을 전후해 날씨가 서늘해지면 슬그머니 굴껍질 속을 벗어나 암초 따위에 붙어 자란다. 이때 김이 달라붙기 쉬운 대발 따위를 집어넣으면 그곳에 달라붙어 성장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전통적인 김 양식법이다. 요즘은 양식 기술이 발달해 굴 껍질 속에서 자라던 포자가 스스로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배양장에서 키우다 추분 때가 되면 김밭으로 방출하며, 또 대나무로 된 발 대신 합성섬유로 된 그물망을 이용해 양식하지만, 그 원리는 마찬가지이다.
13세의 소년은 그로부터 10년 동안 매일 바다에서 살며 김을 재배했다. 원래 섬에서 자랐기 때문에 바다와는 친했다. 대나무를 사고 그것을 쪼개 대발을 만들고 그것을 양식장에 설치해 김을 재배하는 동안 온갖 정성을 쏟았다. 어떻게 하면 맛있는 김을 만들어내느냐는 것이 그의 화두였다.
“제가 김을 아주 잘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김이 맛이 있고 어떻게 하면 맛이 없는 것인가 하고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김발을 높여 놓기도 하고 낮춰 놓기도 하면서 햇볕에 어느 정도 노출시키는 것이 좋은지를 연구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햇볕을 많이 쪼인 김이 맛도 좋고 병도 없더라구요.”
10년 동안 김 양식을 하면서 김에 관한 한 박사가 되었다. 덕분에 10년 동안 한번도 김 양식에 실패한 일이 없었고, 그의 김은 서울 중부 시장 상인들에게 가장 높은 가격으로 팔렸다.
김 양식을 하는 틈틈이 낚시도 하고 낙지 잡이도 했다.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낚시도 낙지 잡이도 언제나 1등 이었다. 열심히 산다는 것, 가난을 이겨 내는데는 그 이상의 방법은 없었다.
덕분에 집안 살림을 꾸려 가면서 두 여동생과 한 남동생을 중학교까지 보내고 나중에는 결혼까지 시켰다. 위로 형이 있었지만 집안 살림에는 보탬이 되지 못했다.
동생들을 가르치는 문제를 놓고 어머니와 갈등도 있었다. “밥 먹기도 힘든데 그까짓 공부는 해서 뭘 하느냐”는 것이 어머니의 푸념이었다. 초등학교에 보내는 것까지 반대했다. “봉사만 이 봉사가 아닙니다. 배우지 못하면 눈뜬 봉사 아닙니까. 배우는 것도 때가 있기 때문에 지금 배우지 못하면 평생 후회합니다.”라고 설득하며 그는 쉽사리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말이기도 했다.
구은김으로 히트쳐
사람은 누구나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전기를 맞는 법. 유광호씨에게도 새로운 삶이 준비되어 있었다. 23세 때부터 그는 김 생산자에서 김장수로 인생 행로를 바꾸었다. 그 정도로 좋은 김을 만들 수 있고, 그 정도로 김을 볼 줄 알면 장사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서울 상인들의 권유에 따른 결단이었다.
세상의 물정에 어두운 나이이긴 해도 김에 관한 한 박사나 다름없으므로 김 장사를 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다른 어려움이 있다면 같은 길을 걷는 기존 상인들과의 갈등이었다. 새파란 촌놈이 서울을 오르내리며 장사를 하자 시기하고 훼방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산전수전을 겪은 잡초 인생이었다. 때문에 잡초의 끈질김을 지니고 있었다. 또 체격이 큰 만큼 뱃심도 있었다. ‘까불지들 마라. 나는 내 주관에 의해 사는 사람이지 압력에 의해 굽힐 사람이 아니여. 오히려 언젠가는 당신네들이 내 앞에서 굽힐 것이여.’ 상대방을 굽히려면 돈을 버는 수밖에 없다며 그는 오히려 전의를 불태우곤 했다.
4년 장사를 하는 동안 어느 정도 기반이 다져졌다. 그때 고향 마을에 어촌계가 생기면서 마을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장사 대신 어촌계 일을 맡게 되었다. 김의 위탁판매가 주업무였으므로 사실은 같은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해에 고졸의 서울 아가씨와 결혼했다. 그런데 월급이 너무 적어 몇달 동안 부인에게 월급 봉투를 내놓지 못했다. 어려운 신혼생활이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3년만에 어촌계를 집어치우고 부인과 함께 다시 김장사를 시작했다. 장사 재개와 함께 고안해 낸 것이 선물용 상자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상인들은 김을 수십톳씩 무더기로 팔 뿐 한 두톳씩 상자에 담아 팔지 않았다. 선물용 김도 신문지로 싸거나 값싼 포장지로 둘둘 말아 보내곤 했다. 고급 식품인 김을 김장수 스스로 저급 식품으로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김을 한 톳씩 고급 포장지로 싸고 다시 그것들을 산뜻하게 인쇄한 상자에 넣어 팔면 인기를 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리에서 맴돌 았다.
좋은 상자를 만들 수 있는 업체를 찾아 2년 동안 대전 · 군산 · 전주 · 광주 · 서울 등지를 헤맨 끝에 마음에 드는 상자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산뜻한 디자인으로 깨끗이 인쇄한 상자에 김을 담자 주인의 입장에서 보아도 확실히 품위가 있었다. 같은 김이 고급스럽게 보였고 비싸게 보였다. 그러한 느낌 때문인지 시중에 내놓자 불티나게 팔렸다. 선물할 사람은 모두 그의 김을 이용했다. 그렇게 해서 1980년대말까지는 마른김으로 쏠쏠하게 재미를 볼 수 있었다.
1989년으로 접어들자 구은김이 백화점 등에 등장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그도 즉시 기계를 구입해 구은김을 생산했다. 그것을 상자에 넣어 선물용으로 내놓자 마른김보다 더 잘 팔렸다. 대전 · 서울 등지에서 찾아온 상인들이 줄을 서 기다렸다 사가곤 했다. 상인들뿐만이 아니었다. 관공서에서 선물용으로 수십 상자씩 사갔다. 대천시내의 관공서에서 시작한 김 선물이 도청과 중앙정부로 옮아갔다.
“특히 충남지사와 저희 지역 출신 국회의원이 선물용으로 많이 이용하셨는데, 그 덕분에 저희 집 김이 전국적으로 알려졌어요. 그러다 보니 내무부장관도 저희 김을 좋아하셔서 불우이웃돕기 바자회 때는 저희 김을 찾으셨어요. 무역센터에서 1년에 한번씩 행사가 열렸는데 한번 출품했더니 불티나게 팔렸어요. 그 후로는 장관이 나 국회의원들이 모두 전화로 주문해 왔어요. 우리나라 정계의 명사들 가운데 저희 김을 이용해 보지 않은 분이 없을 정도로 많아요.”
지역 특산품인 대천 김에 대한 충남도지사의 관심은 우편주문판매로 이어졌다. 그가 충청체신청장을 만나 왜 대천 김처럼 인기있는 상품이 우편주문판매 목록에 올라 있지 않느냐고 따지자 충청체신청에서 서둘러 가입시켰던 것이다. 본인의 의사가 어떻든 보령우체국에서는 가입에 필요한 서류 일체를 준비해놓고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사실은 그 무렵 장사도 잘되고 있었고, 우편주문판매제도의 성과에 대해 미심 쩍은 생각이 든데다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하나둘씩 우체국으로 가져 가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굳이 참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 가입하지 않았으면 평생 후회할 뻔했어요.”
1~2월에 생산된 김이 제일 맛있어
현대수산의 작년도 매출액은 줄잡아 7억여원 그 중에서 우편주문판매액이 절반 가량 차지한다. 우편주문판매업체 가운데 김이라는 단일 품목을 파는 업체 중에서는 최고의 판매고를 올렸다.
유광호씨는 최근 판매 방식을 시장판매에서 통신판매 위주로 바꾸고 있다. 통신판매도 가급적 우편주문판매로 단일화하려고 한다. 경기 불황에 따른 안전성 문제도 이유 중의 하나지만, 유통업을 하려면 질이 낮은 상품도 취급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상품이나 회사의 이미지가 추락하는 것이 싫은 것이다. 또한 품질 관리만 잘하면 영구적인 판매망이 될 수 있는 우편주문판매제도의 장점에 매료되어 있기도 한다. 따라서 고품질의 상품으로 소비자들을 묶어 놓겠다는 고차원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김을 생산하지 않는 대신 생산자와 직거래를 한다. 생산 현지로 찾아가 직접 산다. 김을 선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좋은 김을 골라 높은 값으로 사는 것, 그것이 그의 장사 비결이다.
“김을 사자면 당진에서 서천에 이르기까지 서해안 일대를 다 돌아다녀야 해요. 그런데 김 생산공장에서는 야간작업을 많이 하기 때문에, 김이 좋다고 판단되면 김밥을 싸가지고 가서 날이 샐 때까지 기다려서 사옵니다. 여러 사람이 서로 사려고 하니까 자칫하면 좋은 김을 빼앗겨 버려요.
좋은 김은 속당 500원 내지 1,000원을 더 주고 삽니다. 그래야 어민들 스스로도 좋은 김을 만듭니다. 생산자들의 머리 속에 좋은 김을 만들면 돈을 더 받는다는 인식을 심어주니까 전국에서 전화가 걸려 와요. 좋은 김이 나왔으니 팔아달라는 얘기죠.”
그러다 보니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생활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가 잠자리에 드는 것은 TV방송의 9시 뉴스가 끝나는 시각.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김 생산공장으로 달려 간다. 그리고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김을 산다. 아침 7〜8시에 가면 좋은 김은 구경하기 조차 어렵다.
좋은 김을 고를 줄 아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만이 지니고 있는 노하우이다. 무엇보다 맛으로 판단한다. 얼핏 보기에는 매우 질이 좋을 것 같은데, 의외로 맛이 없는 김이 있다. 때문에 반드시 맛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김을 입에 넣고 씹어 보면. 그냥 녹아 버리는 게 있는가 하면 부풀어오르는 게 있고, 또 진득진득하며 입천장에 달라붙는 게 있어요. 물론 입안에서 녹아버리는 게 제일 좋은 김이죠.”
김은 11월에서 4월까지 생산되지만 1월과 2 월에 생산된 김이 가장 맛이 좋다. 그 전에 나는 초사리 김은 맛이 없고, 3월 하순 이후에 나는 김은 늙어서 질기다. 때문에 제 철이라 할 1〜2월에 생산된 김을 충분히 확보해 두고 연 중 공급하는 것이 또 하나의 장사 비결이며, 그러한 김이 없을 때는 공급을 중단하는 것이 그의 상술이기도 하다.
“맛이 없는 김이 나올 때 소비자들이 전화 주문을 해오면 ‘요즘 나온 김은 맛이 없어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나중에 맛있는 김이 나올 때 연락 드리겠습니다.’라고 거절합니다. 한번 맛 없는 김을 보내고 나면 그것으로 거래가 끝이니까요.'
다시 장사를 시작한 후 승승장구해온 것 같지만, 그에게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역경과 시련도 있었다. 부인과 함께 장사를 시작할 무렵 그는 친척의 빚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1억원의 돈을 물어주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한 달에 6만원을 가지고 생활할 때도 있었다. 그러자 그가 망했다는 소문이 퍼져 만원짜리 한 장 꿀 수도 없었다. 때문에 좋아하는 술을 3년 동안이나 끊고 유일한 재산인 용달차를 몰고 다니며 밤낮없이 뛴 결과 1억원의 빚을 이자 한 푼 제하지 않고 갚을 수 있었다.
또 제법 장사가 되어가자 주변 상인들의 시기는 방해 공작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물건을 외상으로 가져가고 나서 돈을 갚지 않는 수법으로 그를 괴롭혔다. 계산된 반칙이 되풀이되었다.
그럴 때 그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두어번 재촉해도 돈이 안나오면 그 집앞에 트럭을 대놓고 차 속에서 자는 겁니다. 너도 장사 못하고 나도 장사 못하자 이거죠.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은 싸울 필요가 없이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니까 돈이 나오더라구요. 그 후부터는 사람들이 외상을 가져가면 바로 갚더라구요.'
재래종 김은 가정용, 개량종 김은 김밥용
김은 일반 김과 돌김, 파래김으로 나뉘는데, 일반 김은 다시 재래종과 개량종으로 나눌 수 있다. 재래종 김은 옛날 방식대로 김발에 널어 말리는 천연산 김을 가리키는데, 모양이 직사각형이다. 얇으면서도 구멍이 없고 매끄럽다. 재래종 김은 조선김이라 부르기도 한다. 개량종 김은 기계로 말리는 김으로 정사각형에 가깝다. 요즘은 둘다 기계로 말리므로 차이가 없으며 크기만 다를 뿐이다. 돌김은 바닷물 속의 암초 따위에 붙어 자라는 김을 말하는데, 색이 짙고 향기가 좋으며 오돌오돌한 감촉이 있다. 재래종과 돌김은 포자가 다르다. 파래김은 파래를 섞어 만든 김인데, 김과 파래의 향기와 맛이 어우러져 독특한 맛을 낸다. 김과 파래는 종류가 전혀 다른 해초류이다.
“조선김은 맛용이기 때문에 가정용으로 적합하며, 돌김이 약간 섞인 게 좋습니다. 개량종은 김밥용으로 쓰이기 때문에 질겨야 합니다. 파래는 굉장히 약하면서도 강한데 쌉쓰름한 맛이 있죠. 김과 파래가 자연적으로 같이 붙어 자란 파래김이 아주 맛이 좋습니다.”
김은 바다에서 자라지만 육수가 많이 흘러드는, 따라서 강을 끼고 있는 바닷가에서 잘 자란다. 강물에 녹아있는 각종 성분이 김의 영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김은 파도가 잔잔한 지역보다 파도가 있고 물의 흐름이 빠른 지역에서 나는 것이 더 맛있다. 방파제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곳에서 나는 김은 맛이 없다고 한다. 충청도 부근의 바다는 간만의 차가 큰데다 유속이 빠르기 때문에 김 맛이 좋다는 것이 그곳 사람들의 주장이다.
모든 맛의 근원이 영양 메주
'군수님, 콩 가지고 메주 쑨다는데 왜 안믿어 주십니까? 다른 것 가지고 메주 쑨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1989년 봄에 30대 초반의 농민 김기칠씨는 영양군수를 만나 좋은 생각이 있는데 지원해 줄 수 없느냐며 메주사업계획을 설명했다. 군청에서 메주공장을 설립해 주면 영양에서 생산하는 콩으로 메주를 만들어 전국으로 판매한다는 내용이었다. 지역경제 활성화에 남다른 정열을 쏟고 있던 군수는 적극 찬동하며 구체적인 사업계획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그런데 일이 꼬이느라고 그랬던지, 사업계획서를 허가 관청인 군청이 아닌, 농촌지도소에 제출했다. 그러자 이웃 동네에 사는 한 농민이 그 계획서를 모방해 또 하나의 계획서를 만든 다음 군청에 먼저 접수시켜 버렸다. 김기칠씨도 다시 군청에 제출했으나 선수를 빼앗긴 뒤였다.
두 벌의 사업계획서를 접수한 군수는 단안을 내리지 못한 채 시간을 끌고 있었다. 순리대로 한다면 애초의 입안자인 김기칠씨의 손을 들어 주어야 하겠지만, 상대방은 농민단체의 장이었다. 따라서 먼저 신청한 사람을 무시하고 편파적인 행정행위를 한다고 집단 항의를 할 때 대항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 미적거리고 있었다.
1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치를 취해 주지 않자 김기칠씨는 군수를 찾아가 그렇게 항의 겸 하소연을 했던 것이다. 그 동안 그는 요일을 정해놓고 1주일에 두번씩 군청을 찾아가 담당자 들을 만났다. 어떻게 되어 가느냐고 묻는 척했지만 무언의 시위를 계속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에게는 ‘고무줄’이라거나 ‘진드기’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그의 끈질김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이었다. 그는 독립운동가 후손이었다. 그의 집 안은 단종을 위해 순절한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며, 한말의 의병장이던 김도현(金道鉉)이 그의 증조부였다. 때문에 할아버지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러한 자부심뿐 변변한 농토도 갖지 못했던 김기칠씨(41세)의 인생은 여느 농촌 출신마냥 평범하게 시작되었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자 이듬해에 아버지가 별세했다. 집 안에 남은 사람은 어머니와 막내인 그 뿐이었다. 그는 도시로 나가 점원 노릇도 하고 포항제 철에서 생산직으로 근무하며 2년을 보내다고 향으로 돌아가 방위병 근무를 마쳤다. 그리고 농사일을 시작했다.
면내의 젊은이들을 모아 상록화를 조직, 새로운 영농법을 배우고 회지도 발간했다. 그렇다고 해서 농사에 실질적인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농사를 지어 보니 웬만큼 부지런하지 않으면 본전을 건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농사를 잘 짓는다고 해서 벌이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가격이 폭락하면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도 소용이 없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하늘이 두 개라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풍작이나 흉작을 가져다 주는 자연재해적인 하늘은 누구나 다 아는 거지만, 그것 말고도 가격이라는 하늘이 하나 더 있더라구요. 가격이 폭락해 버리니까 농사 잘 지은 게 말짱 헛것이 됐어요.”
뭘 하면서 살아가야 하느냐? 그것이 늘 그의 의식을 사로잡는 테마였다. 피망이며 샐러리 등 서양 채소를 재배하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 농촌이 안고 있는 최대 과제는 유통인 것 같았다. 그리고 농산물을 본격적으로 유통시키자면 그것을 가공하고 포장해 상품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야 부가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상록회를 조직해서 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을 상대하다 보니 유통에 눈이 뜨였던 것이다.
영양의 대표적인 농산물은 고추이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고추가루공장인데, 영양에는 이미 두개나 서 있었다. 다음으로 떠오른 품목이 메주였다. 영양에서 콩은 많이 생산되고 있지만 메주가 유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메주공장을 차릴 생각을 했을까?
“첫째 이유는 농촌의 주택이 개량주택으로 바뀌면서 큰 솥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메주를 못 쑤게 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메주 품귀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둘째로 제 고향에는 메주에 관한 한 최고의 기술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류 기술자들을 쓰려면 많은 노임을 줘야 하는데, 고향 사람들은 노임은 관계없이 그냥 써주기만 하면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사전에 군수에게 사업 개요를 브리핑 하고 나서 메주사업계획서를 작성했던 것인데, 엉뚱한 곳에 제출한 바람에 제삼자와 경합하게 되었던 것이다. 군수는 장기간의 고민 끝에 두사람에게 각각 메주공장을 차려 주었는데. 아직까지 가동하고 있는 공장은 우리식품 한 군데이다.
자연발효를 시키는 것이 재래식메주
메주는 콩으로 만든다. 잘 여문 콩을 하룻밤정도 물에 불린 뒤 가마솥에 넣고 콩이 무르도록 푹 삶는다. 삶은 콩을 절구에 넣고 잘 찧은 다음 네모나 원형의 덩어리로 만든다. 그 모양은 지방마다 달라 둥근 놈, 네모난 놈, 펑퍼짐 한 놈 등 각양각색이다. 이러한 메주 덩어리를 짚으로 엮어 방안 천장이나 대청마루에 매달아 놓으면, 자연 속에 살고 있는 각종 메주균이 달라붙어 곰팡이를 피우게 된다.
전에는 이러한 과정이 손으로 이루어졌다. 지금은 모양을 만들고 발효시키는 과정을 제외한 전과정이 기계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기계화되어 있다 해도 물에 불리는데 8시간, 삶는데 4시간, 건조기로 말리는데 5일, 그리고 발효시키는데 40〜50일이 걸린다.
기계 발주차 한국식품개발연구원을 찾아갔던 김기칠씨는 그곳의 소개로 메주기계 제작회사로 갔다. 그런데 그처럼 자동화된 시설로 메주를 생산하고 있는 업체가 100여 군데나 된다는 사실을 알고 아연실색했다. 혼자만의 아이디어일 것이라며 잔뜩 부풀어 있던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아픔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들 기존 업체는 재래식 메주가 아닌, 개량 메주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는 애초부터 재래식 메주의 생산에 뜻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메주는 재래식 메주와 개량 메주로 구분된다. 재래식 메주는 옛날에 손으로 만들던 방식 그대로 40〜50일 동안에 걸쳐 자연 발효를 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메주에는 황곡균 등 2천여 가지 메주균이 자연적으로 생성되어 메주를 발효시킨다. 이에 비해 개량 메주는 황곡균을 별도로 배양한 다음 삶은 콩에 섞어 메주를 발효시키는 것인데, 발효 기간이 1주일 정도로 대폭 단축되는 대신 충분한 숙성이 이뤄지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기계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 다 개량 메주는 아니다. 모든 과정을 수작업으로 처리했던 옛날과는 달라 요즘은 가마솥에 불을 때 콩을 삶고 그것을 빻아 건조시키는 과정을 일일이 수작업에 의존할 수 없다. 시간이 너무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들어 대량 생산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즘은 발효 과정만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하여 자연 발효를 시키는 재래식 메주로 만족해야 한다.
한번 고객은 영원한 고객
우리식품의 메주공장은 건물과 기계설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의 실제 소유자는 군청이다. 그러니까 군청에서 건물을 짓고 기계를 설치해 주었고, 김기칠씨는 그것을 빌려 쓰고 있는 세입자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군청에서는 농산물 특산단지로 지정된 사람에게는 연리 8%의 농안자금을 융자해 주었고, 또 전통식품으로 지정될 경우 소요 자금의 50%를 보조금으로 지급해 주기도 했다. 따라서 김기칠씨는 빈 손으로 공장을 지어 빚으로 메주사업을 운영해 왔던 것이다.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공장을 설립할 때까지 김기칠씨는 이렇다 할 판매전략을 세우지 못했다. 막연히 잘되겠지 하는 기대감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군청에서 공장을 지어주며 잘 운영해 보라고 할 때에야 판매 문제가 발등의 불로 떨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이웃 동네에 사는 영양농원의 남창윤씨가 우편주문판매로 영양 고추를 팔고 있었다. 김기칠씨는 영양농원을 이용해 PR 효과를 측정하기로 하고 하나의 아이디어를 짜냈다. 전국 전화번호부에서 한식집만을 골라 영양농원으로 하여금 영양 고추를 소개하는 홍보물을 보내게 했다. 우체국장과 공동 명의로 보내도록 했다. 예상보다는 많은 주문이 들어왔다. 우편주문판매제도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영양농원을 통해 연습했던 대로 영양 메주를 소개하는 홍보물을 만들어 전국의 한식집으로 보냈다. 또한 영양 고추를 팔고 있는 영양농원의 기존 거래처에도 보냈다. 그러자 전국 각지에서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메주를 생산하기 시작한 첫해인 1992년부터 우편주문판매를 시작했다. 그러나 첫해 여름은 메주를 생산할 시기가 아니어서 주문을 받자마자 공급 중단을 해야만 했다.
메주는 11월말부터 3월초까지 동절기에 만든다. 날씨가 따뜻한 철에 발효시키면 벌레가 달라붙어 구더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과정이 기계화되어 있어 그럴 가능성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식품은 그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이듬해인 1993년부터 주문이 들어오는 대로 팔았다. 그해의 판매량이 2천만원을 넘어섰다. 전혀 낯선 사람들로부터 들어오는 주문이 여간 흥미롭지 않았다. 또 뿌려놓은 홍보물 덕분인지 직접 찾아와 사가는 상인들도 하나둘 생겼다. 그러다 보니 첫해부터 선발업체보다 더 많이 팔게 되었다.
우리식품은 외상거래를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우체국을 통한 판매가 전체 매출액의 70% 가까이 차지하고 있고, 그 판매량이 매년 2배 가까이 늘고 있다. 그밖의 거래처로는 서울 · 대구 · 부산에 있는 경북농산물직판장 정도를 들 수 있고, 부산 등지에서 찾아와 현찰로 사가는 상인이 몇명 있다.
특별한 판매전략이 없는 대신 김기칠씨가 신경쓰는 것은 소비자 관리이다. ‘한번 고객은 영원한 고객’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날의 소비자는 그 구미를 맞추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어떤 것이 제대로 뜬 메주인지, 어떤 것이 좋은 메주인지 구분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엉뚱한 항의도 자주 받는다.
'요즘은 주부들 자신이 전통식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보니까 어떤 것이 제대로 된 메주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옛날에는 겉이고 속이고 시꺼멓게 뜬 것을 잘 뜬 메주라 했는데 요즘은 옛날처럼 냄새가 많이 나는 것을 싫어 합니다.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을 잘 뜬 메주로 생각하고 항의 전화를 걸어오는데. 그럴 땐 ‘무조건 장을 담그세요. 그래서 장 맛이 없거든 가을에 전화를 주세요.' 하고 결론을 내려줍니다. 그 뒤로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이 아직까지 없었어요.”
그러나 메주에 이상이 생겼다며 민원이 제기되면, 메주 대신 간장과 된장으로 보상해 주는 과잉친절도 베푼다. 겨울 날씨에 따라 메주를 발효시키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이상이 생길 수 있다는 자기 반성 때문이기도 한데, 그것이 뜻밖에도 긍정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소비자가 잘못했건 메주에 결함이 있건 민원이 발생하면 간장과 된장을 먹을 수 있는 양 만큼씩 보내 드립니다. 소비자들이 메주 때문에 간장 · 된장을 못담그게 돼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에서 그렇게 하는 거지요. 그런데 그러고 나면 다음해에 그 주소지 주변에서 10여건 이상 주문이 들어오더라구요.”
우리식품 대표 김기칠씨가 메주 장사를 시작한 것도 어언 6년. 그 동안 목표를 향해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속은 별로 없었다. 남의 돈으로 지은 공장에서 빌린 돈으로 운영하다 보니 임대료와 이자 부담이 컸다. 원료인 콩도 현찰이 없어 시장에서 외상으로 사야 하므로 1킬로당 500원을 더 주어야 한다. 3,300원짜리에 500원을 얹어 주면 15%나 되는 액수다.
그러다 보니 정부의 농촌정책에 대해 야속한 생각이 들 때도 더러 있었다.
'3년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는 사업이면 분명히 성공합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융자해 주는 농안자금이 2년 거치 3년 분할 상환이거든요. 3년부터 상환해야 하니까 그 부담 때문에 헤어나질 못합니다. 거치 기간이 좀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사실 시골에서는 담보 능력이 없어 1억원을 빌리기도 힘들거든요.'
장맛을 결정하는 것은 메주 · 소금 · 독
메주는 우리가 매일 먹는 간장과 된장의 주원료이다. 고주장을 만드는데도 메주가 필요하다.
오랜 옛날에는 메주를 쑬 때 콩과 밀을 섞어 간장과 된장을 혼합해 놓은 듯한 혼용장을 걸쭉하게 담았으나, 조선 중기 이후에는 콩으로만 쑤어 간장을 담았다. 된장은 간장을 뜨고 남은 메주로 담근다.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간장을 가장 소중한 음식으로 생각했다. 집안의 음식 맛을 결정하는 것이 간장이기 때문이다.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유중림이 쓴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는 “장은 모든 맛의 으뜸이다. 집안의 장맛이 좋지 않으면 좋은 채소와 맛있는 고기가 있어도 좋은 요리를 만들 수 없다. 설혹 촌사람이 고기를 쉽게 얻을 수 없어도 좋은 맛의 장이 있다면 반찬에 아무 걱정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간장을 만드는 일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장을 담그려면 길일을 잡아 택일을 했고 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장을 담그는 주부는 사흘 동안 부정을 타는 일이나 외출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간장 항아리에는 금줄을 둘러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았고 덧 버선을 걸어놓기도 했다. 잡신으로 하여금 장독 대신 버선 속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장 속에는 붉은 고추와 숯덩이를 넣었는 데, 전자는 살균보다 잡신의 근접을 막고자 한 것이고, 후자는 먼지를 흡수케 하는 한편 장 맛이 불같이 일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증보산림경제는 장 담그는 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항아리를 엎고 연기를 피워 미세한 구멍이 있는지 알아본다.
둘째, 소금은 수개월 저장하여 간수를 흘러 내리게 한 것을 쓴다.
셋째, 물은 깨끗한 샘물이나 강 가운데서 흐르는 것을 받아 큰 솥에 끓이고 여기에 소금을 녹여 식힌 다음 쓴다.
넷째, 장을 담글 때는 메주 1말, 소금 6〜7되, 물 한 통으로 하되 추동(秋冬)간에는 소금이 적어도 좋으나 춘하(春夏)간에는 소금이 많은 것이 좋다.
다섯째, 숙성한 후에는 장독 속에 우물을 파서 괸 맑은 장을 매일 퍼내 작은 항아리에 받는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간장 담그는 일에 온갖 정성을 다했다. 그런데 실제로 장 맛을 결정 하는 것은 메주와 소금, 독이라 한다.
“같은 메주를 가지고 세 집에서 장을 담가도 집집마다 장 맛이 다르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소금이 다르고 그릇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메주가 다르면 장 맛이 다르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는 거죠. 좋은 장을 담그려면 우선 2년간 묵혀둬서 간수가 완전히 빠진 천일염을 써야 하며, 간장 독도 주둥이의 표면적이 넓고 유약을 안 칠한 것을 써야 합니다. 그래야 환기가 잘되기 때문이죠. 장도 생물이어서 환기를 잘 시켜 줘야 합니다. 실제로 메주가 좋고 소금이 좋고 독이 좋으면 장 맛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