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한만큼 뒤끝이 깨끗한 지리산 국화주
'술이 하늘을 따르니 酒天이고 술이 땅을 따르니 酒地고 나 또한 술을 사랑하니 어찌 한 잔 술을 마다하겠는가.'
그 뜻을 알듯 말듯한 이 말은 경남 함양읍내에 있는 한 민속주점의 벽에 걸린 문구이다. 이름하여「포도대장」, 실내를 몇개의 방으로 나눈 깨끗한 초가지붕과 깔끔한 창호지 문짝, 등롱 등으로 멋을 부리고 은은한 가야금 가락으로 흥을 돋구고 있는 이 술집에서 팔고 있는 술은 그 지역 특산품인 국화주, 일제시대에 맥이 끊겼던 전통의 국화주를 재현하여「지리산 국화주」라는 이름으로 보급하고 있는 김광수씨(42세)가 시음장으로 운영하고 있는 술집으로 함양 일대의 젊은이들과 문인들의 사교장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불로장수의 술, 국화주
국화주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나라 전통주이다. 조선조의 명의 허균이 쓴「동의보감」이나 조선조 후기의 실학자인 서유구가 쓴 농촌경제 서적인「임원경제지」, 그리고 유중림이 쓴 농사 서적「증보산림경제」등의 고서에서 불로장생의 묘약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국화주가 우리 전통의 술임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동의보감은 '국화는 피를 맑게 하고 독을 제거하는 약리작용이 있으며, 말초혈관을 확장시키고 혈관운동 중추를 억제하는 혈압 강하작용을 하기 때문에 고혈압 방지의 효능이 뛰어나다.'고 했으며, 국화를 넣어 빚은 '국화주는 근육과 뼈를 튼튼하게 하고 골수를 보강할 뿐 아니라 눈을 맑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좋은 술임에도 불구하고 국화주는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그것은 기본 재료인 찹쌀과 국화 외에도 생지황과 구기자를 넣는데다 양조 방법이 막걸리처럼 간단하지 않으며 또 양조 기간이 보름 남짓 걸리므로 서민들로서는 그것을 만들 엄두를 내기 어려웠던 탓이다. 때문에 옛날부터 그 맛과 효능을 아는 일부 지역의 일부 계층만이 그것을 만들어 즐겼는데, 일제시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전통주 양조 금지정책이 실시되면서 그마저도 명맥이 끊겼던 것이다.
국화주는 3단계의 제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첫째는 찹쌀을 쪄 고두밥을 만들어 하루쯤 말린 다음 누룩을 섞어 잘 혼합하고 물을 타 20~25도 온도에서 5일쯤 발효시키는데, 그것이 바로 밑술이다. 두번째는 첫번째와 똑같은 방법으로 빚은 술에 야생국화와 생지황, 구기자 등을 달여 섞은 다음 15일 동안 같은 온도로 숙성시킨다. 여기에 쓰이는 국화는 일반 국화가 아닌, 지리산 자락에서 나는 야생 국화로서 주로 꽃과 잎파리, 줄기가 쓰이는데 그것도 11월경 첫서리를 맞은 것이 약효가 있다고 한다. 구기자의 경우 열매가 아닌 나무껍질을 달인다. 세번째로는 1단계와 2단계를 거친 술을 서로 섞어 하루쯤 더 숙성시키면 근사한 술이 된다. 그것을 압축기에 넣어 압축한 다음 그 원액을 여과시키면 맑은 원액이 흘러내리는데, 그것이 바로 국화주이다. 알콜 농도는 16도, 그러니까 주종으로 따지면 약주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의 비법이 일제에 의한 우리 역사의 단절로 잊혀져 버렸을 때 이를 재현시킨 장본인이 바로 지리산국화주 사장 김광수씨이다. 함양 출신인 김사장은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현대자동차 판촉부에 근무하며 자동차 부품에 대한 몇가지 특허도 얻어 놓은 때여서 비교적 잘 나가고 있는 30대 초반이었는데, 젊은 시절부터 관심사였던 민속주 재현의 꿈이 자꾸만 그를 꼬드겼다. 한때 그의 고을의 자랑거리였던 국화주를 되살려보자는 꿈이었다.
전통주 재현에 대한 그의 열망은 컸으나 그 비법을 알으켜줄 사람도 없었고 그것을 설명해 놓은 책도 없었다. 때문에 그는 고전을 뒤적였다. 특히 조선시대의 의약학 백과사전인 동의보감이 좋은 지도서가 되었다. 이론이 어느 정도 갖춰지자 옛날에 국화주를 담가본 경험이 있는 그의 할머니로부터 배웠고, 그래도 부족한 점은 전국적으로 생기고 있는 민속주 제조업체를 찾아다니며 배웠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그가 내린 결론은 민속주는 막걸리와 제조법이 똑같다는 것이었다. 민속주는 결국 막걸리로부터 시작하는데, 어떤 원료를 쓰느냐, 그리고 어떻게 숙성을 시키느냐에 따라 전혀 맛이 다른 술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 수차례에 걸친 시험 과정과 시행착오를 거쳐 드디어 전통의 국화주를 빚어낼 수 있었고, 1987년 말경에는 경상남도 문화재로 지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국세청으로부터 민속주 제조허가를 받은 것은 1989년이었고, 지리산국화주라는 상표로 판매를 시작한 것은 1990년이었다.
좋은 맛은 철저한 품질관리에서
지리산국화주가 우편주문판매를 시작한 것은 1992년. 당시의 함양우체국 우편계장 박효근씨(현 거창우체국 창구계장)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박계장은 그때까지 함양에서는 우편주문 판매용 특산품을 한 건도 개발하지 못한 터인지라 뭔가 한 건을 올리겠다는 생각에서 찾아 헤매던 중 그때 서울·부산 등 대도시의 백화점을 대상으로 판매되기 시작한 지리산국화주가 걸려들었던 것이다. 우편주문판매가 선전효과가 있겠다고 판단한 김사장도 그의 권유에 선선히 응했다.
우편주문판매는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다. 1992년 8월부터 판매를 시작했는데, 시작하자마자 추석을 맞아 불티나게 팔렸다. 때문에 초장부터 물량 부족으로 공급 중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해에 3,300여건에 6,590만여원 어치가 팔리던 것이 1993년에는 4,675건에 8,680만여원 어치가, 작년에는 8,000여건에 1억 7,800만여원 어치가 팔렸다. 그런데도 지리산국화주의 총매출액에서 우편주문판매액이 차지하는 비중은 16%에 불과하다고 한다. 나머지 대부분은 서울·부산의 유명 백화점과 호텔을 비롯한 고급음식점에서 팔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 많은 민속주 중에서 유명 상표의 제품도 아니요 갓 등록한 상표의 무명 제품이 그만큼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부드럽게 당기는 순한 맛과 예로부터 '불로장수'로 표현되는 그 효능이라 하겠으며, 그러한 맛과 효능은 철저한 품질 관리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품질 관리는 원료의 선택으로부터 시작된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지리산국화주는 16도의 약주로서 그 제조법은 막걸리와 같은데, 어떤 원료들을 어떤 비율로 혼합해서 어떻게 숙성시키느냐에 따라 그 맛과 효능이 결정된다고 한다. 지리산국화주는 막걸리의 원료인 찹쌀과 누룩 외에 구기자·생지황·국화를 넣어 만드는데, 그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것은 국화이다. 국화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지만, 관상용으로 자란 국화는 약효가 없어 양조용으로 쓸모가 없으며 들이나 산자락에서 자란 야생국화가 약효가 있는데, 그러한 야생국화 중에서도 늦가을의 서리를 흠뻑 맞은 것이 약효가 크다고 한다. 때문에 지리산국화주는 지리산 자락에 야생하고 있는 노란 국화(黃菊)를 첫서리가 내린 다음 채취하여 쓰고 있다. 또한 국화주의 주원료인 찹쌀의 경우 인근의 웅평마을 주민들과 계약재배를 함으로써 철저한 품질 관리를 하고 있는데, 그 대가로 연간 1억 5천만원의 농가 소득을 올려주고 있다.
품질 관리는 원료의 선택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양조기술의 비법은 결국 균을 배양하고 관리하는 발효와 숙성 과정에 있다고 하겠는데,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적정한 온도와 시간의 유지이다. 그러니까 각 과정에서 요구되는 적합한 온도와 시간을 철저히 유지해 주는 것이 정성이요 품질 관리라 하겠으며, 그러한 정성에 의해 지리산국화주의 맛이 결정되는 것이다.
지리산국화주는 그 맛이 순하다는 것이 가장 큰 자랑거리이다. 약주인 만큼 시음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부드럽게 넘어간다. 순한 만큼 뒤끝이 깨끗하다는 게 또 하나의 자랑거리이다. 국세청 기술연구소의 시험 결과 지리산국화주는 머리를 아프게 하는 성분인 아세트알데히드나 메탄올을 포함하지 않은 좋은 술로 판명되었다. 또한 이 술은 방부제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차게 보관해 두었다 마셔야 제 맛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김광수 사장의 주장이다.
'지리산국화주는 발효주이기 때문에 건강에 좋고, 또 제조 원료로 국산 농산물을 쓰기 때문에 농가 소득을 올리고 외화를 절감시키는 이중효과를 얻고 있습니다.'
우편주문판매용 상품으로서의 지리산국화주는 비교적 잘 나가고 있어 큰 어려움은 없다. 민속주이므로 주로 추석과 설날에 집중적으로 팔리는데, 수요를 예측하기 어려운 초창기에는 물량 부족으로 공급 중단을 한 일이 있었으나 이제는 수요를 가늠할 수 있고, 또 시설도 어느 정도 자동화되어 있어 공급에는 어려움이 없다. 따라서 앞으로는 공급물량 부족으로 인한 공급 중단은 없을 것이라는 게 김사장의 장담이다.
한가지 흠이 있다면 운송이나 배달 과정에서의 파손이다. 다행히 파손을 면했다 하더라도 포장 상자가 찌그러지거나 뜯어지는 사례도 종종 있는데, 그럴 때 수취인이 내용품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가질 것이라는 점은 불문가지이다. 때문에 정보통신부가 시중의 택배회사처럼 안전한 운송을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으므로 거기에 기대를 걸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동일 상품에 대한 경쟁이 확대되고 있는 것도 은근한 걱정거리이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면 국화주라면 다 같은 국화주일 뿐 상품의 질을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지리산국화주에 대해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리산국화주의 맛이 좋으면 국화주란 다 그런 것으로,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국화주의 질이 나쁘면 또 국화주란 다 그런 것으로 싸잡아 품평할 것이 은근히 걱정된다.
홍보가 미흡한 것도 가벼운 불만이다. 특히 영상매체를 통한 홍보가 아쉽다. TV광고의 경우 엄청난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알고 있지만, 공급업체가 비용을 부담하더라도 실현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이 김사장의 또 하나의 바람이다. 그러한 것은 가벼운 불만일 뿐 우편주문 판매제도 자체가 지리산국화주의 품질을 보증해 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