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제일의 품질을 지향하는 진도 미역
전라남도의 남서쪽 끝에 자리한 珍島는 육지사람들에게 꽤나 친숙한 섬이다. 진도개로 유명하고, 고려시대의 삼별초와 임진왜란 때의 명량해전을 떠올리게 하며, 남종문인화의 대가인 小痴 허유와 허백련이 이 고장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곳이 발상지인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하는 진도아리랑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요로서 오랫동안 널리 사랑받아 오고 있다.
우편주문판매는 명예로운 거래선
진도에는 우편주문판매를 통해 이곳의 특산품인 미역을 전국에 공급하는 「(주)아침가리라는 회사가 있다. 「아침가리」라는 특이한 상호는 '아침'과 '갈다'의 합성어로서, 한자로는 朝耕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아침가리」의 대표인 김영수씨(34세)는 전남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서울의 한성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한 중견 무역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 회사는 주력 품목인 섬유 제품의 수출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취급 상품을 농수산물로 바꿔 보기로 했다. 그에 따른 시장조사를 김영수씨가 담당했는데, 전국을 돌며 농수산물의 생산 실태와 유통 구조를 파악하는 일이 주임무였다. 1차 조사를 마치고 미흡한 점을 보완하느라 다시 2차 조사에 들어갔다. 얼마 동안의 조사를 끝내고 상경해 보니, 몸담았던 회사는 그새 공중분해가 되어 문을 닫아 건 채 자취를 감췄다.
“당시 월급이 100만원이었는데, 하숙비와 옷값 등 혼잣몸의 뒤치다꺼리에도 부족한 액수였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직장이 불안정하다 보니까, 젊은 나이임에도 자아 가치의 실현을 도저히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장래성도 엿보이지 않았구요. 그래서 3년 동안 사회 공부를 한 셈 치고 미련없이 돌아섰죠. 그때 알아 둔 농수산물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훗날에 도움이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김영수씨는 얼마간 머리를 식히고자 낙향해 있다가, 어느 날 진도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의 약혼녀가 진도군보건진료소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영수씨와 진도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진도는 섬이긴 했지만, 주민의 일부만이 어업에 종사할 뿐 그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농산물로는 쌀과 보리외에 콩 · 면화 · 참깨 등이 산출되었으며, 연안의 바다에서는 조기 · 갈치 · 도미 · 새우 · 해삼 · 고등어 등이 많이 잡혔다. 그리고 특산물로는 구기자 · 유자 · 대파 · 검정쌀과 미역 · 김 · 멸치가 꼽히고 있었다.
김영수씨는 아예 이곳에 눌러앉기로 작정했다. 도회와는 다른 맑은 공기와 푸근한 인심이 그렇거니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빼어난 풍광도 마음에 들었다. 아니, 그보다 진도가 자신이 품은 원대한 꿈을 실현시킬 근거지가 될 것이라는 강한 암시가 전신을 휘감고 풀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영수씨는 진도의 농수산물시장을 면밀히 살펴보고 나서, 1992년 8월에 고작 자본금 2,000만원으로 「동산농어민유통」이라는 업체를 차렸다. 농수산물의 산지 수집상이 되어 월동 배추와 대파를 서울 가락동농수산물시장에 출하했던 것이다. 이때 운이 따라 주었음인지, 서울에서 대파값이 급등하여 그는 적지 않은 목돈을 거머쥘 수 있었다.
“요즘 백화점 등의 대형 매장에서는 산지에서의 일괄 구매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도는 좋은 물건을 내면서도 구태의연한 시장과 낙후된 유통 구조로 말미암아 이런 추세에 발빠르게 대응을 못해 왔어요. 이곳에 전문적인 수집상이 없다 보니까 외지인 수집상들에게 넘겨 주거나, 완도나 목포로 농수산물을 내다 팔았죠. 그러니 운송비도 들고, 중매수수료 등 이런저런 경비가 밖으로 흘러 나감으로 해서 지역 경제는 마냥 제자리걸음이었구요. 마침내 그 틈새에서 제가 할 만한 일을 찾아냈던 겁니다.”
품질인증 된 것만 우체국에 공급
산지 수집상으로 만족할 김영수씨가 아니었다. 3년이 채 안되는 사이에 2,000만원의 자본금을 2억원으로 불린 그는 「동산농어민유통」을 해체하고, 1994년 4월에 새롭게 「(주)아침가리를 설립」했다. 이제는 농수산물의 생산 · 가공 · 유통을 종합적으로 취급하기로 한 것이다.
김영수 사장은 진도읍 포산리에 사무실을 마련하는 한편, 대학 후배 3명을 불러들여 회사의 인적 구성을 튼튼히 다졌다. 또한 그는 하루에 다른 사람의 명함을 5장 이상 받는다는 각오로 산지와 시장과 회사들을 누비고 다니면서 「아침가리」의 존재를 열심히 알렸다.
「아침가리」의 사업 근간은 도매 유통이다. 진도의 대파와 월동 배추를 산지에서 수집하여 가락동시장에 출하하는 한편, 검정쌀을 계약재배 하기도 한다. 일반미와는 달리 색깔이 까만 검정쌀은 중국 종자로서 현미 상태의 찹쌀인데, 진도와 해남지방 및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 산출되며 성인병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러는 한편 김사장은 직접 진도 수협의 중매인으로 활동하면서, 이 곳의 멸치와 김을 사들여 서울 중부시장과 양동 시장에 출하하고 있다.
「아침가리」는 기반사업으로 낭장망 5틀 규모의 멸치 어장과 김발 125대분의 김 양식장도 운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연간 3,000상자의 멸치와 3만속의 김을 생산해내고 있는데, 금액으로 환산하면 각각 1억원 정도씩이다.
“산지 수집상으로, 또 수협 중매인으로 일하다보니까 취급 상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해 줄 장치도 필요했고, 그 품목들에 대하여 속속들이 알아야겠다는 욕구가 생겼어요. 그래서 생산에 마저 뛰어들게 됐는데, 생산자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는 등 얻는 점이 많습니다.”
김영수 사장은 「아침가리」를 설립한 지 넉달만인 1994년 8월부터 우편주문판매에 참여했다. 지역 우체국의 권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편주문판매제도가 있음을 알자마자 그 스스로의 필요에 의하여 참여했던 것이다. 그는 이때 「아침가리」와 진도의 특산물을 전국 곳곳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첫해에는 돌미역과 줄기건미역 등 2개 품목을 공급하여 5개월 동안 680만원의 판매 실적을 거뒀다. 1995년에는 8월부터 멸치를 추가로 공급하기시작하여 3개 품목을 통해 3,650만원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1996년에는 1억 3,000만원으로 신장 되었다. 금년에는 이들 외에 김 · 해산물세트 · 검정쌀 · 紅酒 등 4개 품목을 추가하고자 준비하고 있다.
돌미역은 양식 미역과는 달리, 깊은 바다의 암초에 그 포자가 착생되어 성장한 것을 자연산 그대로 채취하여 해변가 바윗돌에서 건조시킨다. 파도가 거센 곳에서 자라난 미역일수록 포자가 밀집되어 여러번 끓여도 풀어지지 않고 오돌오 돌하며, 맛 또한 담백하다고 한다. 돌미역은 동해 삼척에서도 나고 있으나, 진도의 것이 품질면에서 한 등급 위이고, 미역은 한국과 일본에서 주로 생산·소비된다는 점에 비추어 진도 돌미역이 단연 세계 제일이라고 이곳 주민들은 주장한다.
진도 앞바다는 한류와 난류가 만나고, 서해와 남해가 합수되는 조경수역이니만큼 다종다양한 미생물이 살고 있다. 또한 진도 해안은 소백산맥의 지맥이 침강하면서 생긴 기암괴석으로 이뤄 져 있고, 특히 울돌목이라 불리는 이 지역 명량 해협에는 아시아에서도 가장 빠른 조류가 흐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진도 돌미역이 자생하고, 최상의 품질을 유지하는 데 있어 천혜의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현재 「아침가리」는 우편주문판매 이외에 농협 · BC카드 · 신세계백화점 · 현대백화점 등을 통해서도 통신판매를 하고 있다. 또한 광주시내의 전남농어촌특산품전시판매장, D마트, BIG 슈퍼마트에는 매장을 설치해 놓았다.
“우체국외 여러 경로를 이용해 통신판매를 하고 있지만, 우편주문판매야말로 가장 명예로운 거래선입니다. 불황도 안타고, 얼굴도 모르는 이용객이 전국적으로 하나 둘 늘어가는 현상도 흥미롭죠. 특히 우편주문판매의 경우에는 국가기관의 공신력을 최우선시해야 하기 때문에, 국립수산물검사소로부터 품질인증을 받은 상품에 한해 서만 공급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우리는 가격 경쟁이 아닌, 품질 경쟁에 승부를 걸겠습니다. 그래서 고유한 브랜드를 살리려 노력하고 있으며, 제품의 포장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죠.'
「아침가리」는 지난해에 농수산물 도매에서 15 억원, 특산품 소매에서 10억원 등 총 25억원의 매출 실적을 올렸다. 또한 그 동안 기동력과 물자 수송을 위한 차량 6대, 김 · 멸치 채취선 3척을 갖추었다. 그리고 사원 수는 12명으로 늘어났다. 그 가운데 대리 직함을 가지고 있으며 김사장의 대학 후배이기도 한 장영환씨는 이렇게 말했다.
“김선배는 사업 감각이 뛰어나고 추진력이 아주 강합니다. 멸치 어장으로 가는 뱃길이 불편하 다며 불도저로 산을 깎아 자동차길을 낼 정도니까요. 관공서 협조사항 등 난관이 많았지만, 결국 해놓고 나니까 지금 얼마나 편리한지 모릅니다. 사실 김선배를 따라 진도에 들어서기까지는 망설임이 많았습니다. 서울에서 안정된 직장생활을하고 싶지, 생면부지의 섬에서 안해 보던 험한 일을 하고 싶었겠어요? 그러나 이제 와서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죠. 여기에서는 할 일도 쌓였고, 일하는 만큼 보람도 크구, 장래도 매우 밝습니다.”
한 평범한 무역학도에서 유망한 젊은 실업가로 변신하여, 나름대로 열심히 앞길을 개척하고 사업을 확장해 나가고 있는 김영수씨. 다음과 같은 그의 속 깊은 포부를 듣고서는 그 옛날 이 일대를 본거지로 삼아 활약했던 해상무역왕 장보고를 불현듯 떠올리게 되었다.
“우선 한 해 각 250억원 규모인 진도의 미역시장 · 김시장의 유통 구조를 선진화해서 지역 경제를 일으키는 데에 일조하고 싶습니다. 이와 함께 「아침가리」의 매출고도 꾸준히 끌어 올리겠구요. 지금은 미미하지만, 우리가 노력하기에 따라 50억원, 100억원 돌파가 그리 버겁다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여력이 생긴다면 중국 혹은 러시아의 농지를 임차하여 콩이나 옥수수 등을 재배해서는 다시 국내로 반입할 계획입니다. 결국「카길」 같은 세계적인 유통업체를 경영해 보 겠다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