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만해도 밥맛이 나는 임실 참게장
옛날 전라도 거녕현에 살고 있던 김개인(金蓋仁) 이라는 사람이 개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는데, 주인은 개를 지극히 사랑하고 개는 주인을 좋아하여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어느 해 봄에 술에 취해 귀가하던 주인이 잔디밭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다. 때마침 부근에서 일어난 들불이 맹렬한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주인의 생명이 위태로움을 깨달은 개는 부근에 흐르는 개울로 뛰어 들어 몸에 물을 적신 다음 주인 주변의 잔디밭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거센 불길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기를 10여번. 간신히 주인의 생명을 구한 개는 기진맥진하여 그 자리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얼마 후 잠에서 깨어난 주인은 몸을 바쳐 자신을 구해준 애견의 사체를 부여 안고 통곡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개를 묻은 후 가졌던 지팡이를 무덤 위에 꽂아 두었다. 얼마 후 지팡이에 싹이 트기 시작하더니 점차 자라 하늘을 찌를 듯한 거목으로 자랐다. 그때부터 이 나무를 일컬어 오수(獒樹)라 하였고, 그 고장의 이름까지「거녕」에서「오수」라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고려 고종 때의 문신인 최자(崔滋) 가 쓴 시화집(詩話集) 보한집(補閑集)에 수록된 것이다.
후세에 이곳 주민들이 개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기 위해 의견비를 세웠는데, 지금까지 이 지방의 자랑거리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개가 죽은 날을 「오수면민의 날」로 정해 매년 4월 하순이면 제사를 지내고 있다.
탈피 때문에 참게 양식이 어려워
이와 같은 미담의 고장인 오수는 임실의 한 면으로 농지와 산지가 적당히 섞인 한국의 전형적인 농촌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편주문판매용 상품으로 참게장을 내놓고 있어 식도락가의 관심을 끌고 있다. 전북에서도 내륙지방에 속한 임실에서 참게장을 공급한다는 것은 썩 어울리는 일은 아니다. 마침 그곳에서 단무지와 된장 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이화식품 사장 류상렬씨의 전통식품의 맥을 이어 보겠다는 남다른 집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류사장과 참게장과의 인연은 TV를 통해 우연히 맺어졌다.
“어느 날 KBS 경음악단장인 김강섭씨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하는 말이, 1년에 한번씩 한 마리에 1만원씩 하는 참게 200만원 어치를 사다가 참게장을 담근다는 거였어요. 어머니가 참게장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랬던 건데, 그러다 보니 자신도 좋아하게 되었고, 또 아들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더라구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반짝 떠오르는 생각이 전통식품의 맥을 이어 가야 되겠구나 하는 것이었지요.”
그때부터 그와 참게와의 씨름이 시작되었다.
불과 20년까지만 해도 게는 한반도의 어느 하천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물고기였다. 그러나 농약의 사용이 보편화된 지금 참게는 웬만한 개울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희귀 어종이 되어 버렸다. 때문에 참게를 대량으로 공급하려면 양식을 해야 하는데, 아직은 양식 기술이 미흡하다. 인공부화를 거쳐치게의 양식까지는 성공했으나 성장 과정에서 허물을 벗는 탈피 직후의 양식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10개의 다리에 몸이 두꺼운 딱지로 덮여 있는 갑각류로서 논두렁이나 냇가의 진흙에 구멍을 파고 사는 게는 야행성이며 잡식성이다 봄부터 여름까지 민물에서 자란 참게는 가을이 오면 살던 곳을 떠나 바다로 내려간다.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강하구에 이르러 포란한 다음 이듬해 봄에 게가 되어 민물로 올라온다. 때문에 옛날부터 농촌에서는 가을에 냇물이나 논둑에 발을 쳐서 바다로 내려가는 참게를 잡곤 했던 것이다.
껍질이 단단한 게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허물을 벗는다. 어린 새끼 시절에는 7〜8회, 그리고 커가면서 5〜6회 탈피를 한다고 한다.
양식의 어려움은 바로 탈피에 있다. 탈피한 게는 그 껍질이 물렁물렁한 상태이므로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 때문에 게가 허물을 벗을 때는 햇빛이 잘 들고 수심이 낮은 조용한 곳을 골라 하는데, 여러 마리가 엉켜 살아야 하는 양식장에서는 보호를 받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동족에게 밟히고 천적의 습격을 받아 죽게 된다는 것이다.
“껍질을 벗어 물렁물렁한 상태에서 다른 게가 딛고 가다 보면 균이 들어가 죽기도 하고, 먹이가 부족할 때는 저희들끼리 잡아 먹기도 합니다 게는 잡식성이거든요. 또 어릴 적에는 개구리나 뱀, 새 등 천적에게 잡혀 먹기도 하죠.
이처럼 양식이 어려운 것은 탈피한 직후에 보호하기 어려우며, 또 서로 잡아먹기 때문이라 하겠는데, 참게 양식업자 80여군데 중 70여군데가 실패했어요. 지금까지 제대로 성공한 사람은 두군데에 불과했어요.”
현재 이화식품이 공급받고 있는 참게 중 양식장 참게가 차지하는 비중은 20% 정도, 나머지는 자연산 참게로 충당하고 있는데, 그것을 구하는 일이 쉽지가 않다 자연산 참게가 귀하기 때문이다. 현재 류사장이 참게를 공급받고 있는 지역은 섬진강 하류와 동해안 그리고 제주도 등 섬지방이다. 농약을 쓰지 않거나 적게 쓰는 지역에서만 참게가 나기 때문이다 물론 전국 각지에서 팔아달라고 찾아오는 소매상들로부터 소량씩 공급받기도 한다.
다시 류사장의 말을 들어보자.
“하동 쪽 섬진강 하류에 가서 배 5척을 빌려 그 물을 던지면 10번 던져야 한 마리가 나올까 말까 하는 정도지요 그러니까 하루 종일 그물을 던집니다. 속초에서 포항에 이르는 동해안의 하천에서는 농약을 적게 쓰기 때문에 민물게가 더러 납니다. 그러면 속초에서 비행기로 공수케 한 다음 광주에서 자동차로 받아오기도 하죠. 또 제주도 같은 섬에서도 농약을 적게 쓰기 때문에 민물게가 적지 않게 나옵니다.”
된장 • 집장에 이어 참게장 사업까지
익산군 함열 출신으로 올해 67세인 류상렬 사장 은 그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파란 많은 인생을 살아왔다. 어려운 가정 형편상 초등학교는 적당히 건너뛰었고, 어렵사리 입학한 군산사범학교는 소쿠리 장수를 하는 어머니를 돕느라고 다니다 쉬다 하다 4학년 때 준교사 자격을 인정받아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 받았다. 6 • 25 후에는 이리여고 강사로 변신했는데, 27세때 서울로 올라가 당시의 세도가인 국회의장 이기붕의 비서 실장인 한갑수와 인연을 맺어 이기붕의 연설문을 쓰는 일을 맡기도 했다.
4 • 19로 이기붕 일가가 몰락하자 사업가로 변신했다. 처음에는 샘표간장 중부도매상으로 출발하여 철물 도매상으로 돈을 번 후 동업으로 복표조선간 장이란 이름의 양조사업을 시작했으나 3년만에 빈털터리로 끝내고 말았다. 그 후 직물 도매상으로 전업하여 돈을 벌고 있던 중 1980년 서울을 떠나 오수에서 이화식품공업사라는 회사를 차렸다. 단무지와 울외장아찌를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순박한 시골 인심에 반해 시골 생활을 결심했던 것이다.
'아는 친척이 오수에서 단무지공장을 하고 있는데, 제가 돈을 대주고 있었어요. 그래서 한번은 구경을 갔더니, 마을 사람들이 하루는 간밤에 할아버지 제사를 지냈으니까 아침 잡수러 오라고 하더니, 또 하루는 아버지 생신이니까 오라는 것이었어요. 그러한 촌의 인심에 반해 단무지공장을 인수한 다음 3년 동안 1주일에 한번씩 내려왔다가 나중에는 아예 이곳에서 눌러 살기로 작정을 했죠.'
단무지와 장아찌에 이어 손을 댄 것이 된장과 간장, 집장이었다. 젊은 시절 그에게 쓰라린 실패를 안겨준 복표조선간장에 대한 미련도 남아 있었지만 그보다는 우리 전통의 미각을 살려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더 강렬했다. 외래식품의 범람으로 전통 식품의 미각을 잃어 버리면 민족 혼을 잃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우리 고유의 맛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또 하나의 공장을 세웠던 것이다. 1990년의 일이었다.
또한 이웃 고을인 순창이 고추장으로 유명하다면, 임실의 사대부 집안에서는 대대로 집장을 애용했다. 임실 된장 역시 전통적인 맛으로 하여 이름을 얻고 있었다. 때문에 임실 특유의 집장과 된장을 널리 공급함으로써 임실이 순창과 함께 장문화의 쌍벽을 이루도록 하겠다는 남다른 포부도 품고 있었다.
양질의 된장 • 간장을 생산하려면 양질의 메주가 필요하다. 때문에 메주공장을 따로 차려 농협과 계약재배를 한 콩으로 좋은 메주를 빚어내는 사업도 시작했다.
단무지와 장아찌를 생산하면서 이화식품은 농어촌 특산단지 3호로 지정받았는데, 조선된장과 집장을 생산하면서 다시 전통식품 25호로 지정받았다. 그러는 동안 그의 활동 무대는 점점 넓어졌다. 먼저 사단 법인 한국전통가공식품협회 임실군연합회장을 7년 역임하면서 임실군내에 농어촌특산단지를 17개나 탄생시켰고 이어 전북 지회장을 5년 다시 중앙회장을 2년 동안 역임하면서 전통식품업계의 발전을 위해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한 류사장이 TV를 통해 김강섭 단장이 참게장을 애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참게장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것은 1991년 상당한 망설임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린 것은 비싼 참게 값이었다. 10마리에 웬만한 것은 7〜10만원, 큰 것은 15만원을 호가하고 있었으니 중산층 이상이 아니면 참게장을 담글 엄두를 내기 어려운 때었다. 때문에 과연 그 비싼 참게장 장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앞섰다. 그렇지만 참게장 공장을 세워 다량으로 구입하여 만든 참게장을 소량으로 판매한다면 일반 서민들도 참게장 맛을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조금은 이타적인 생각에서 그 사업에 착수했던 것이다.
참게 양식업은 부가가치 높은 사업
참게는 주로 게장용으로 쓰인다 참게에 호박이 나무, 버섯 따위를 넣고 참게탕을 끓이는 것도 별미지만 참게는 게장으로 담가 입맛을 돋구는데 쓰인다.
참게장을 담그려면 생각보다 많은 정성을 쏟아야 하고 여러번 손질을 해야 한다. 우선 참게를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다음 잘 끓여 식힌 간장을 붓는다. 게피나 감초 따위를 넣어 만든 특수 간장에 바로 참게장 맛을 내는 비법이 담겨 있다. 간장을 너무 짜게 하면 게장 맛을 버리게 되고, 싱겁게 하면 자칫 썩힐 우려가 있다. 방부제를 넣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집에서는 게장 맛을 돋구기 위해 잡은 게를 2〜3일 굶긴 다음 쇠고기를 갈아 먹여 살을 찌우고 나서 게장을 담근다고 한다.
게장을 담근 간장은 3일 간격으로 끓여 식힌 다음 게통에 붓는다. 그렇게 다섯 차례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마늘• 생강• 풋고추• 죔피 따위를 넣어 간장 맛을 돋군다. 혹시 들어 있을 수 있는 이물질과 참게를 중간숙주로 삼아 붙어다니는 폐디스토마를 제거하기 위한 작업이다. 디스토마는 세번 정도 끓이면 제거된다고 한다.
이처럼 정성을 들여 만든 참게장은 입맛을 돋구는 식품이다. 환자의 입맛을 돋구는 음식으로는 참 게장을 제일로 친다. 참게는 단백질이 풍부한 반면 지방이 적으므로 맛이 담백한데, 여기에 특수하게 조제한 간장이 상승작용하므로 입맛을 돋구는데는 그만이라는 것이다. 또 참게의 주성분이 칼슘이므로 정형외과 수술을 받은 환자들에게 좋다고 한다.
참게장은 주로 밥에 비벼 먹는다. 참게장으로 김밥을 싸먹기도 한다. 시금치나 취나물, 숙주나물을 무쳐 먹는 것도 별미라 한다.
“따뜻한 밥에다 계란 하나 풀어 넣고 게장으로 밥 비벼 먹는 게 최고죠. 옛날 백사 이항복이 절에서 공부할 때 반찬이 마땅치 않자 중에게 ‘게장’ 이라 읊으라 하고 밥 한 숟갈을 떠 먹고, 또 ‘게장’ 이라 읊으라 하고 한 숟갈을 떠 먹었다는 일화가 있었습니다. 그처럼 참게장은 보기만 해도 밥맛이 나죠.”
참게장은 담근 지 1개월에서 3개월 사이가 가장 맛있다고 한다. 그 이상이 지나면 뼈가 삭고 살이 물러져 맛이 떨어지고 또 장기간 보관하기도 어렵다. 현재 보관 방법을 연구하고 있어 1년까지는 가능하다고 한다.
참게장사업의 포인트는 첫째 간장 맛을 제대로 내는 것이며, 둘째 장기간 저장하는 방법인데.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게의 탈피 시기를 알아 선별을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가 되면 음력으로 게의 탈피 시기를 계산할 수 있다고 한다. 류사장의 경우 탈피한 게를 잘못 선정해 한꺼번에 300만원어치를 버릴 때도 있었으며, 이용자들로부터 항의를 받는 것도 바로 그러한 게 때문이었다.
참게장사업의 어려움은 바로 공급 물량의 부족에 있다. 이 문제는 자연산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므로 양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또 양식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참게 양식업도 점차 가능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전망은 어떨까? 전문가의 말을 들어보자.
'농약 강도가 높아지고 환경 오염이 심해져 참게가 줄어들고 있는데다, 참게는 민물과 짠물이 맞닿는 강하류에서 산란하는데 댐의 건설 등으로 자연 산란장이 축소 내지 파괴되고 있어 멸종 위기에 놓여 있어요 그러나 참게에 대한 국민 선호도가 높아 마리당 5천원을 호가해도 사려는 사람은 많으며 기술의 발달로 생산 단가가 떨어지고 있어 부가가치가 매우 높기 때문에 전망은 밝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탈피 후의 관리 문제도 기술이 많이 보급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양식업에 착수하기 전에 기술을 완전히 습득하여 대비한다면 재미 있는 사업이 될 겁니다.'
군산대학교 유봉석 교수(58세)의 말이다
불로장생의 영약, 진도 구기자
남쪽 어느 고을에 대대로 장수하는 집안이 있었다. 노인이 많다 보니 오히려 문제가 될 만큼 장수하는 사람이 많았던가 보다. 그래서 그 원인을 캐보니, 그 집에서 마시는 샘가에 해묵은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샘으로 뻗은 그 나무 뿌리의 성분이 물에 녹아 들기 때문이라 했다. 한 자손이 그 나무를 파버리자 그 후로는 그 집안의 장수 전통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구기자나무였던 것이다.
진도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진도읍 북상리의 어느 집안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말한다.
예향진도
‘1.제주 2.거제 3.진도 4.남해 5.강화’ 노년 세대는 한국의 큰 섬 다섯을 이런 식으로 해서 외웠다. 그러니까 진도는 우리나라에서 세번째로 큰 섬이다.
진도개와 진도아리랑으로 유명한 진도는 예로부터 예술의 고장으로 알려져 왔다. 조선 후기의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대표적 화가인 소치 허련(許鍊)으로부터 의제 허백련(許百鍊)으로 이어지는 화가들과 서예가 소전 손재형(孫在聲)이 이 고장 출신이다. 허련이 화실로 꾸몄고 현재는 그의 작품이 보존되어 있는 운림산방(雲林山房)이 남아 있어 진도가 예향임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강강술래」 • 「남도들노래」 • 「진도씻김굿」등 중요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가 여럿 있어 옛 전통을 잇고 있다.
한때 삼별초의 근거지였고 임진왜란 때 충무공의 승전지이기도 했던 진도는 자랑거리도 많고 볼 것도 많다. 육지와 진도를 잇는 진도대교가 세워지면서 그 밑을 강물처럼 빠른 속도로 흐르는 명량해협의 바닷물이 우선 외래객의 눈길을 붙잡는다. 또 음력 2〜3월이면 진도와 모도 사이의 바닷길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짐으로써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서해와 남해가 맞닿는 지점에 위치한 진도는 본도외에 250여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을 거느리고 있다. 때문에 남해에서 올라오는 난류와 서해에서 내려오는 한류가 부딪쳐 김 • 미역 • 꽃게 • 조기 • 갈치 등 각종 해산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그 맛도 좋다. 그러나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어 쌀 • 보리 • 콩 등 주곡 생산이 풍부한데, 쌀의 경우 1년 농사로 그 고을 주민이 3년을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진도개외에 진도가 자랑하는 또다른 특산물로 구기자와 홍주가 있다. 둘 다 우편주문판매용 상품 목록에 올라 있는데, 먼저 오른 것이 구기자이다.
눈을 밝게 해주는 열매, 구기자
모두의 옛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기자는 예로부터 불로장생의 식물로 알려져 왔다. 중국 천하를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은 진시황이 바라는 바가 있다면 삼천궁녀를 감당할 수 있는 정력과 언제까지 늙지 않는 불로장생이었다. 때문에 동해에 있는 섬에서 불로초가 난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불로초를 구해 오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다. 사실이 어떻든, 전문가들이 모여 진시황이 찾으려 하던 불로초가 오늘날 무엇에 해당할까 하는 논의를 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구기자나무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가장 유력했다.
중국의 대표적 의약서인 신농본초론(神農本草論)은 구기자는 상약 중의 상약이라 오래 먹으면 몸이 가벼워지고 가히 늙음을 이길 수 있다고 적고 있다. 또 허준(許淡)의 동의보감(東醫寶鑑) 도 구기자를 오래 복용하면 경신불로(輕身不老) 하고 추위와 더위를 이기며 장수한다고 맞장구 쳤다.
현대 의약학으로 분석해 보아도 구기자는 불로초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늙는 것은 동맥경화증에 의해 혈관이 노쇠하기 때문인데, 구기자의 성분 중에는 루틴이라는 물질이 들어 있어 혈관을 튼튼하게 해준다. 또한 구기자 속에 들어있는 아미노산의 일종인 베타인이라는 성분이 간장을 보호하는 작용을 한다.
간세포에 지방이 축적되어 있는 지방간의 상태를 오래 끌면 간경화증으로 발전한다. 그런데 구기자는 그와 같은 지방간이 되는 것을 방지하는 작용도 한다. 간장병에 특효약이 없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지만, 사실은 구기자가 간장병의 예방 및 치료에 가장 좋은 약이라 한다.
또 구기자는 눈을 밝게 해준다는 뜻에서 명안자(明眼子)라 부르기도 한다. 때문에 노인이나 수험생, 또는 장시간 눈을 많이 사용하는 운전사나 사무원들에게 효험이 있다고 한다.
“제 부친은 올해 87세인데. 60세까지는 안경을 안끼고 신문을 보셨는데, 70세부터 안경을 끼고 신문을 보십니다. 구기자를 장복한 덕이죠.”
진도에서 우편주문판매로 구기자를 보급하고 있는 진도구기원 임태원씨는 그렇게 주장했다.
이처럼 신비의 영약처럼 과대포장(?) 되기도 한 구기자는 한반도 전역에서 나고 있지만, 특히 전남 진도와 완도, 충남 청양산이 유명하다. 그러나 진도 사람들은 진도산 구기자는 다른 지역에 비해 판이하게 다르다고 주장한다.
다시 임태원씨의 말을 들어보자.
“진도산 구기자는 열매 색깔이 곱고 살이 두터우며 맛이 달아요. 일제시대에는 진도산 구기자는 육지에 비해 10배나 더 받았어요. 20년 전에는 3배나 비쌌는데, 지금은 진도산이 더 쌉니다. 다량 생산을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진도산 구기자가 육지산에 비해 질이 좋은 까닭을 난류와 한류가 부딪치는 해류 덕분이라고 그곳 사람들은 믿고 있다.
“동지나해에서 올라오는 난류와 서해에서 내려오는 한류가 만나는 지점이어서 해산물도 풍부하고 맛도 좋지만, 모든 작물이 잘돼요. 구기자뿐만 아니라 다른 약초도 잘되죠. 진도에서 난 인삼은 산삼과 인삼 중간 정도 된다고 해요. 작두로 잘라 보면 금방 표가 나죠. 목욕도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 하면 몸에 좋다고 하잖아요.”
임태원씨의 주장이다.
글쎄, 해류의 부딪침으로 해산물의 맛이 좋 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지만, 농산물의 맛까지 좋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편주문판매로 돈이 붙기 시작해
진도구기원의 임태원 사장(51세)이 구기자 농사에 손을 댄 것은 1973년. 진도에서 태어난 사람이 서울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다시 귀향하여 구기자 농사를 짓기까지의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대대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던 아버지는 일제시대 가난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일본과 만주를 전전하다 만주 용정에서 간판업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만주에서 전라남도에 해당하는 넓은 땅을 샀을 만큼 많이 벌었다는 것이다. 해방 직전에 귀국해 고향에서 해방을 맞았는데, 자녀들이 성장하자 그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올라가 명동에서 골동품 가게를 운영했다. 덕분에 5남 4녀 중 3남인 임사장은 서울에서 중 • 고 교를 거쳐 대학(건국대 농대)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를 대학에 보낼 때 아버지가 내세운 하나의 조건은 졸업 후에 직장생활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남의 종살이를 하지 말고, 엿장수를 하더라 도자기 일을 하라는 것이 아버지의 주문이었다.
대학을 졸업하자 바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농대 출신이니 만큼 고향으로 내려가 남에게도 이롭고 자신에게도 좋은 향토사업을 하라는 것이 아버지의 주문이었다. 그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미 5년 전에 귀향해 구기자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 무렵 진도에는 2〜3백평 정도의 소규모로 구기자 농사를 짓는 농가가 있었으나 판로가 귀해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농사를 이어받아 벼 • 보리 등 논농사와 구기자 농사를 지었다. 파 • 수박 등 비닐하우스 농사도 지어 보았다. 그러나 소득도 시원찮은데다 아버지와 뜻이 맞지 않아 농사 일을 집어치우고 상경했다. 자기 소신대로 농사짓는 길을 찾아나선 것이다. 마침 대학 동기생이 서울 변두리에서 화훼 재배를 하고 있어 거들어주기로 했다.
자기 방식대로 농사를 짓겠다는 꿈도 잠깐일 뿐 친구의 벌이가 시원치 않자 다시 귀향하여 아버지 밑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구기자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첫해는 수확량이 보잘 것 없었다. 재배 기술이 부족했던 것이다. 3년 후부터 수확량이 늘기 시작했다. 전에는 평 당 반근 생산하던 것을 1근까지 생산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구기자 재배 면적을 6천평으로 넓혔다.
재배 기술의 발달로 생산량은 높일 수 있었으나 판로가 문제였다. 그때까지 구기자는 그 효능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아 상거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의 효능을 잘 아는 진도 주민들이나 기관장들이 선물용으로 사거나 진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호기심으로 사가는 정도였다. 때문에 진도읍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형에게 맡겨 위탁판매를 하거나 도시에 나가 있는 친척이나 친지를 통한 안면 판매로 근근히 꾸려 나갔다.
구기자가 우편주문판매를 통해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86년 그 제도가 실시되기 시작한 첫해였다. 우체국 직원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처음 진도우체국 직원 정영철씨가 찾아와 우편주문판매제도에의 가입을 권할 때 그는 거절했다. 그 제도로 과연 주문이 얼마나 들어오겠느냐는 의심도 들었지만 비슷한 제도로 몇차례 사기를 당한 일도 있어 미덥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남체신청에는 우편주문판매 대상 품목으로 완도 김, 영광 굴비 등과 함께 진도 구기자도 지정해 놓은 터라 우체국의 권유도 끈덕졌다. 때문에 그 제도의 효용성에 대해 반신반의 하면서 그 제도에 가입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편주문판매는 생각보다 위력이 있었다. 첫해는 200여건의 판매에 불과했으나 그 제 도가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한 1987년부터 판매량이 늘기 시작하여 1988년에는 2배로 늘어났다. 그 무렵 각종 매스컴을 통해 구기자의 효능이 알려지면서 주문이 급증해 1989년에는 판매액이 1,900여만원에 불과하던 것이 1991년에는 4,700만원, 1993년에는 7,400만원으로 증가했다.
우편주문판매를 시작하면서 돈이 붙기 시작했다. 임사장은 그 돈으로 고향에서 땅을 샀는데, 그 땅값이 엄청나게 치솟기 시작했다. 그에게 운명의 여신이 미소를 짓기 시작했던 것이다.
차나 술로 담가 먹어
구기자는 차로 달여 마시거나 술을 담가 먹다. 구기차는 잎을 달이는 구기엽차와 열매를 달이는 구기자차로 구별된다. 차의 재료는 잎 • 열매 • 뿌리껍질 등 어느 것이나 좋지만, 주로 많이 쓰이는 것은 열매이다. 잎을 살짝 볶아 달이면 차맛에 향기가 있고, 열매는 잘 말려서 뭉근한 불에 천천히 달이는 것이 좋다. 설탕은 타지 않아도 되지만, 생강이나 대추 • 꿀 등을 타서 마셔도 좋다. 혈압이 높은 사람은 열매보다 잎으로 만든 차가 좋다고 한다.
구기차는 예로부터 강장제로 알려져 왔는데, 특히 동맥경화를 예방하고 혈압을 정상으로 유지시키는 효능이 있다 하여 순수한 국산차로 애용하고 있다. 너무 진하게 끓이면 설사할 가능성이 있으며, 여름에는 금방 상하므로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어야 한다.
구기자주는 소주에 구기자 열매를 넣기만 하면 된다. 보통 말린 구기자 200그램에 소주 2리터의 비율로 담그는데 3개월 정도 지나면 익는다. 익은 술을 따라낸 다음 다시 같은 비율로 소주를 넣어 술을 담가도 된다. 그렇게 세번까지 담글 수 있다.
구기자주는 비타민• 루틴• 베타인 • 아미노산 등의 영양소가 들어 있어 강장제로서의 효능이 높고, 동맥경화나 고혈압의 예방에 효과가 있다. 저녁식사 전이나 취침 전에 작은 잔으로 한 잔 정도 규칙적으로 마시는 것이 좋다.
차와 술 이외에 구기자는 생잎을 따먹기도 하고 잎으로 생즙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또한 연한 잎을 따서 데친 후 무쳐 먹기도 한다. 구기자로 막걸기를 만들기도 한다.
현재 진도구기원의 연간 매출액은 1억 2천만원 정도, 그 가운데 우편주문판매가 60% 가량 차지한다. 그런데 1995년도 판매 실적 8천만원을 고비로 하여 우편주문판매량이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는데 임사장의 고민이 있다.
그는 그 이유를 우편주문판매 대상 품목이 갈 수록 다양해져 이용자들의 선택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상품들은 판매량이 매년 엄청나게 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보다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판촉활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 사업가라기보다 생산자인 임사장이 안고 있는 과제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