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질로 승부하는 안동 대추
「양반의 고장」이요 「문화와 전통의 고장」임을 자랑하는 안동에는 소주 안동포 · 하회탈 등 예로부터 이름있는 특산품이 많이 났는데, 지금도 우편주문판매용 상품으로 하회탈 · 참기름 · 대추 · 고추가루 · 쌀고추장 · 산마가루 등 6 가지 특산품이 선보이고 있다. 그 목록에 끼어 있지 않지만, 최근 안동이 자랑하는 특산물로 등장 한 것이 사과로서 전국 생산량의 11%나 차지하고 있다니 특산물도 시대에 따라 변하는가 보다.
사과가 잘되는 곳에 대추가 잘된다는 말도 있다지만, 안동에서 비교적 잘된 과일이 대추였다. 일반적으로 대추나무는 크게 자라지 않아 재목으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는데, 안동에서는 대추나무로 절구통이나 여물통 따위를 만들었다고 하니, 대추나무가 얼마나 크게 자랐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이러한 안동 대추도 한때 그 값어치를 인정받지 못해 쇠퇴의 길을 걸었는데, 다시 대추나무를 재배하여 전통의 맛을 재현시키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안동시 남선면에서 운상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억척같은 농업경영인 임희종씨(43세)이다.
낙하산 부대에서 강인한 정신력 키워
경북직업훈련소 1기 출신인 임희종씨는 전업사에 취업하여 전기공사 현장을 쫓아다니는 동안 안동시내의 전주란 전주는 거의 다 올라다녔다.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지원한 곳이 특전사 부대, 낙하산 부대의 고된 훈련을 통해 깡생깡사의 강인한 정신력을 키웠다. 6년의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전업사에 복귀했으나 벌이가 시원치 않자 해외로 눈을 돌렸다. 마침 국제건설에서 기능공을 모집하고 있어 50대 1의 관문을 뚫고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회사가 맡은 일은 상하수도 설치공사였으나 그가 맡은 일은 전기공사였다. 그곳 현장에서는 자기 책임하에 일을 했으므로 사람에 따라 하루에 한두 시간이면 일을 마칠 수 있었다. 따라서 자기 발전을 위해 공부할 시간이 많았는데, 그 역시 고국으로 돌아간 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문제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우디 생활은 예정보다 빨리 2년 6개월만에 끝났다. 위암 3기인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살아있는 동안 자식 노릇을 해 보자는 생각에서 사우디 근무 일정을 앞당겼던 것이다.
귀국하면서 그는 절대로 소의 꼬리에 서지 않겠다고 작심했다. 소의 꼬리에 붙어 자신의 인생을 소모하느니, 작지만 닭의 머리에 서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설계해 나가기로 결심했다. 장남으로서 고향에 뼈를 묻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시골에서 살려면 땅이 있어야 한다. 안동대학교 앞에 있는 하천 부지를 사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마을산(洞有林)을 샀다. 18정이나 되는 넓은 땅이었다. 사우디에서 벌어온 돈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영농후계자 자금을 끌어쓰고, 그래도 부족한 것은 처가에서 빌렸다.
산을 산 뜻은 과수원을 만들자는데 있었다. 아카시나무 등 잡목이 우거진 산을 개간하려면 해발 400미터 이상인 산 꼭대기까지 길을 내야 하며, 이에 앞서 군청에서 개간 허가를 얻어야 했다. 그곳은 꽤 높기도 한데다 경사도가 있어 농사 지을 땅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말려야 할 땅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군청 직원 두 명을 끌고 현장답사를 나갔다. 됫병 소주 하나에 통닭 한 마리를 준비했다. “개간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한거지 조건이 중요한 게 아니지 않느냐.”는 말로 그들을 설득했다. 셋이서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고 나자 개간 허가가 났다.
산길을 닦고 개간을 하는데는 불도저를 동원 했다. 그처럼 밀어붙이자 마을 사람들은 그가 사우디에서 엄청난 돈을 벌어온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다른 계산을 했다. 개간지에 빽빽히 서 있는 아카시나무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 아카시 나무를 재목으로 팔면 개간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 당시 아카시나무는삽이나 낫 자루용 재목으로 쓰이고 있었다. 그러한 계산은 얼추 맞아떨어졌다.
남들은 모두 88올림픽을 구경한다고 들떠 있는데 그는 혼자서 경운기를 몰고 산길을 오르내렸다. 그렇게 반년을 고생했다. 개간지는 공동묘지가 있던 자리였다. 이듬해 음력 정월초에 그는 술과 음식을 차려 놓고 산신 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여러 영혼들이 잠자고 계시는데 기계 소리로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여기에 나무를 심어 성공하거든 이 땅에 묻힌 영혼들을 위로해 드리겠습니다.”
1만 3천평의 개간지에는 사과나무 700주와 대추나무 2천주를 심었다. 사과나무는 안동지방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어 안심하고 심었고, 대추나무는 옛날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생각에서 심었다. 사과나무는 묘목을 심은 지 6년만에 첫 수확을 거두었으나 대추나무는 첫해부터 열매를 맺었다. 다른 농장에서 심은 대추나무 묘목은 80% 가량이 실패로 끝났으나, 그가 심은 대추는 잘도 자랐다. 그만큼 정성을 쏟았던 것이다. 그 결과 수확은 매년 2배로 늘었고 또 잘 팔렸다. 건강식품으로서의 안동대추의 값어치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생산 2년만에 으뜸 농산물 1등상 받아
운상농장의 대추는 햇빛을 본 지 2년만인 1991년에 농수산부가 주최한 으뜸농산물품평회에서 전국 1등을 차지했는데, 그 후에도 2년 연속 우승했다. 그러다 보니 임사장은 '임대추' 또는 대추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쯤 되자 운상농장 대추도 우편주문판매에 뛰어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서울 신세계백화점에서는 「안동 특산물 코너」를 마련하여 사과 · 대추 · 마늘 · 참깨 · 쌀 등을 판 일이 있는데, 대추가 가장 많이 팔렸다. 그러자 미각이 발달한 서울 사람들이 알아주는 상품이 되었다면 우편주문판매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임사장은 우편주문판매제도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사우디에 근무할 때 일본의 우편주문판 매제도에 대해 읽은 적이 있었고, 일본에서는 살아 있는 붕어까지도 우편주문판매로 배달해 준 다고 들었기에 그 제도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다. 또 장사꾼과 거래하는 과정에서, 대추 1천만 원 어치를 수확해 장사꾼에게 팔면, 그들은 앉은 자리에서 1천만원을 남기고 되파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소비자와 직거래를 할 방법이 없을까 하고 궁리를 하기도 했다. 결국 장사꾼을 부자로 만들어 주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우편주문 판매에 뛰어들기로 했던 것이다. 신세계백화점에서 판매하는 동안 다른 백화점이나 경동시장의 상품과 비교해 보았는데, 품질이나 가격면에서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기도 했다.
안동우체국을 찾아가자 담당인 권종대씨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먼저 군수의 추천서를 받아오라고 했다. 그는 안동군수에게 달려가, 안동 대추가 으뜸 농산물로 3연패를 했으므로 으뜸 농산물로 뿌리를 내리고 싶다며 추천서를 부탁했다. 그 무렵 안동군수는 안동의 특산품인 소주 · 사과 · 산마 등을 염두에 두고 있을 뿐 대추는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임사장이 집요하게 매달리자 대추를 추가로 추천했고, 선정 과정에서 대추와 산마가 우편주문판매 목록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첫해인 1993년의 판매 건수는 1,270건. 매출액으로 따지면 별 것이 아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많은 수치였다. 이듬해에는 판매액이 4배 이상 뛰어올랐고, 4년째인 1996년에는 전년도에 비해 2.5배 가량 늘어 판매액이 2억 6천만원이 되었다.
임사장이 우편주문판매에 참여했을 때 밀양 · 홍천 · 원주 등지에서도 대추를 공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업체는 직접적인 생산자가 아니고 수집상의 입장에서 공급하고 있으므로 품질로 승부를 걸면 대추 공급업체 중에서 1등을 차지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신념은 적중되어 4년만인 1996년에 그는 대추 판매업계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유기재배가 맛 좋은 대추의 비결
운상농장의 대추는 화학비료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퇴비만을 사용하는 유기재배 방식으로 생산한다. 퇴비도 볏집이나 잡초 따위를 썩힌 거름 대신 과일나무나 잡목 등을 잘게 분쇄하여 발효시킨 퇴비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한 퇴비를 마련하기 위해 목재분쇄공장까지 차려놓고 있는데, 원료로는 주로 제재소에서 나오는 나무 토막을 이용하고 있다.
“모든 농사는 물과 거름과의 싸움이죠. 물은 우리나라 강우량으로 충분하지만, 주위의 여건이 좋은 데서는 점적관수(點滴灌水)를 하거나 스프링쿨러를 이용하는 게 좋습니다. 또 땅이 좋은 곳에서는 관리만 잘하면 되지만, 땅이 척박한 곳에서는 퇴비를 많이 써야 합니다. 퇴비는 많은 인력을 빼앗는데, 산야초를 베어 퇴비를 만들면 양도 적고 비료의 효과가 짧게 나타나지만, 나무의 목질부를 빻아 발효시킨 퇴비는 비료의 효과가 큽니다.”
이처럼 임사장은 환경 친화적 영농을 고집한다. 토양의 오염은 화학비료의 사용에서 오는 것이므로 옛날의 영농방식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우편주문판매업체 역시 그러한 측면에서 품질 인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운상농장의 대추가 맛이 좋은 이유는 유기재배 외에도 그곳의 토질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질토보다 점질토에서 나오는 곡식이 당도가 높다. 사질토는 가뭄에 견디는 힘이 약하고 점질토는 땅에 힘이 있어 가뭄에 견디는 힘이 좋기 때문이다. 안동댐을 만드는 데는 엄청난 양의 진흙이 필요했는데, 그 흙을 임사장네 동네에서 파 갔다고 한다.
과수원이 놓여 있는 해발 400미터라는 위치도 또 다른 요인이 된다고 임사장은 주장한다.
'해발 400미터 정도로 지대가 높기 때문에 내가 사는 마을과 15일간의 기온 차이가 납니다. 안개 일수도 적은 지형이고요. 그러다 보니 서리가 내리지 않고 바로 얼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매가 나무에 붙어 있는 시간이 길고, 또 열매가 튼튼합니다. 아침 햇살을 일찍 받게 되는 것도 좋은 여건이라 하겠죠.'
토질이 좋고 퇴비를 잘 쓰고 햇볕을 잘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일은 따는 시기를 잘 골라야 제 맛이 난다. 사과도 그렇지만 대추는 껍질에 빨간 물이 들기 시작하면서 살이 찬다. 껍질이 물들기 전에 따면 속이 차지 않는다. 때문에 과일이 붉게 익을 때 한꺼번에 따는 것이 대추의 단 맛을 제대로 살리는 또 하나의 비결이라 한다. 대추를 따는 시기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안동의 경우 10월 상순이 적기라 한다.
'운상농장은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일교차가 심한데, 일교차가 크면 과일의 당도가 높습니다. 또 임사장은 부지런해서 전지를 자주 합니다. 일반적으로 과수원 하는 사람들은 전지를 소홀히하기 쉬운데,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 주면 다른 가지가 햇볕을 잘 받을 수 있고 또 양분을 골고루 전달할 수 있어 과일 성장에 좋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유기물 비료를 충분히 쓴다는 게 운상농장의 특징이라 할 겁니다. 일반 퇴비 대신 나무를 잘게 부수어 잘 썩힌 퇴비를 충분히 넣어 주기 때문에 과일이 잘 자라고 맛이 좋은 거죠.
운상농장의 대추가 인기를 끄는 것은 이와 같은 임사장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의 결과라 하겠습니다.”
강성빈 안동농촌지도소장은 운상농장의 대추가 성공하고 있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딴 대추는 햇볕에 말리는 것이 좋지만, 햇볕에 말리자면 석달이나 걸린다. 또 그 많은 양의 대추를 널어 놓을 장소도 마땅치 않다. 때문에 건조기에 넣고 45도의 저온으로 3일 정도 말린다. 그런 다음 저온 창고에 넣어 두면 1년까지는 저장이 가능하다.
백가지 약과 어울리는 대추
대추는 결혼 · 회갑 등 집안에 큰 잔치가 있을 때마다 상에 올랐다. 제사상에도 빠뜨리지 않았다. 한방에서도 대추는 반드시 필요한 약재로 쓰였다. 아마 한약에서 사용 빈도 수로 보아 대추는 감초 다음쯤 될 것이다. 대추는 그만큼 귀한 과일이요 소중한 약재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 대추는 강장(强壯) · 강정(强精)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쇠약한 내장을 회복시키고 이뇨 작용이 크며 정력을 돋우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대추를 달여 먹는 것이 부부 화합의 묘약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조선말의 의원이던 황도연(黃道淵)이 쓴 의약서 방약합편(方藥合編)에서는 “굵은 대추는 맛이 달고 백가지 약과 어울리며 기운을 돋우고 비장을 튼튼히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백가지 약과 잘 어울리는 성질 때문에 대추가 모든 약제에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전에는 대추가 약용이나 관혼상제용 장식품으로 쓰였으나, 이제는 그것의 진가가 널리 알려짐에 따라 각종 대추차가 많이 개발되고 있다. 특히 드링크제로 개발한 대추차가 인기를 끓에 따라 대추의 수요는 엄청나게 늘고 있다. 그러나 값싼 중국산이 대량으로 밀려듦에 따라 국산은 설 곳을 잃어가고 있다. 이에 대항하는 길은 오로지 철저한 고객 관리와 품질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는데, 우편주문판매제도는 수입품의 물량 공세에서 국산품을 지켜 주는 튼튼한 방패막이가 되고 있다는 것이 임사장의 주장이다.
성실 하나로 공급하는 상주 곶감
상주는 쌀과 누에고치 · 곶감이 많이 난다고 하여 삼백(三白)의 고장이라 한다. 곶감이 적당히 익어가면 하얗게 분이 피어 오르므로 곶감의 색깔도 흰 것으로 쳤던가 보다.
감은 예로부터 우리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과일로 중부 이남 지방에서는 어디서나 났다. 특히 소백산맥을 끼고 있는 경상도 서부지역과 전라도 동부지역에서 많이 났는데, 그 중에서도 감의 고장으로 유명한 곳이 상주였다. 조선시대에는 상주 곶감이 왕에게 올리는 진상품으로 쓰였고, 일제시대에는 일본인들이 상주에서 곶감 제조기술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지금도 낙엽이 지기 시작한 늦가을에 상주 일대를 돌아보면 노랗게익은 감나무가 온 마을을 그림처럼 수놓고 있어 그곳이 감의 고장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를 입증하듯, 우편주문판매에 의해 곶감을 공급하는 업체가 전국적으로 9개 있는데, 그 중 5개 업체가 상주에 있으며, 5개 업체 중 맨 먼저 시작한 업체가 상주형제농원이다.
어머니에게 금주 · 금연의 약속장을 써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흔히 그렇듯이 상주형 제농원의 문의현씨(51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무를 해다 팔아야 할 만큼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술꾼인 아버지가 몸져 누워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5남1녀 중 맏이인 그가 집안 살림살이를 걱정해야만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학교와는 담을 쌓고, 그때부터 나무장수 · 소쿠리장수 등으로 고된 인생살이를 시작했다. 가을철이되면 생감을 카바이드가 든 상자에 넣어 연시가 되면 서울로 보내 팔기도 했다. 아예 객지로 나가 장사 세계로 뛰어들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아 버지에게 붙잡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양조장에서 술 배달을 하기도 하고 목수들을 따라다니며 집짓는 일도 거들었다. 제대로 배우진 못했지만 눈썰미가 있어 목수일도 곧잘 했다. 그의 나이 27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자신의 뜻대로 장사의 길로 나서기로 하고 서울과 부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마땅한 장사 거리를 찾아 보았다. 서울의 한 시장에 갔을 때, 왕겨를 담은 나무 상자에 감을 얹어 팔고 있는 것이 신기하게 보였다. 감장사를 하려면 저렇게 하는 것이로구나 하고 감탄하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본 대로 왕겨를 넣은 상자에 감을 얹어 상주 시장에 내놓았으나 팔리지 않았다. 곶감을 낱개로 팔아 보았으나 벌이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 마을에 들렀더니 벌통에 곶감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 집 주인에게 곶감을 팔아 갚아 주기로 하고 집으로 가져 갔다. 새까맣게 굳은 곶감을 잘 손질하고 열개씩 묶어 밀가루를 묻힌 다음 시장에 내다 팔았다. 곶감은 뜻밖에 잘 팔려 장날 하루 동안에 쌀 한 가마니값이 남았다. '장사가 이런 것이로구나!' 그는 열심히 곶감을 떼다 팔았다. 계속 한 장 동안에 쌀 한 가마니 값이 남았다. 마음이 헤퍼진 그는 번 돈으로 주막집에 들러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두 달 동안 곶감 장사를 하고 나니 남은 것은 빈 손뿐이었다.
섣달 그믐날 거나하게 취한 그는 형제를 불러놓고 어머니 앞에서 약속장을 썼다. “저는 오늘 이후로 술 · 담배를 끊고 열심히 돈을 벌겠습니다.” 그가 구술하고 동생으로 하여금 쓰게 했다. 두 장의 약속장을 써 어머니가 한 장, 그가 한 장을 나눠 가졌다. 그리고 그 날부터 술과 담배를 끊었다. 하루에 세 갑씩 태우던 담배를 지금까지 끊고 있다.
이듬해에도 곶감 장사를 했다. 이제는 마을에서 감을 사다 곶감을 만들어 팔았다. 그런데도 벌이는 시원치 않았다. 제대로 장사를 해보겠다는 몸부림에서 블록 벽돌을 찍어 간이 건조장을 만들어 놓고 통풍이 잘되는 곳에서 곶감을 건조시켰다. 가공 기술에 눈을 뜬 것이다. 같은 수량이라도 가공이 잘된 곶감은 1~2천원을 더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지역으로 견학도 다녔다. 상주에 못지않게 감으로 유명한 영동에서는 연탄 화덕 위에 곶감을 널어 놓고 연기를 쐬고 있었다. 그러자 곶감색깔이 곱게 변했다. 그 광경을 보는 동안 곶감에 유황 연기를 쐬면 곶감의 모양이 좋아진다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기억이 생각났다. 실제로 곶감을 매달아 놓고 유황 연기를 쐬자 곳 감색깔이 완연히 달라졌다. 새까맣던 곶감이 발갛고 깨끗하게 변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지만 유황 연기를 쐰 곶감이 인체에 해로운지 아닌지도 모른 채 그때부터 열심히 유황 연기를 쐬기 시작했다. 덕분에 값은 몇 천원씩 더 받을 수 있었다.
곶감 장수를 하는데 있어 또 하나의 애로가 있다면 그것은 감을 깎는 일이다. 숙련공도 잘해야 하룻밤에 한 가마니를 깎을 수 있었다. 그러나 농촌의 부족한 일손으로는 곶감만 깎고 있을 수없기 때문에 자동화할 방안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상주시내의 철물점을 두루 찾아 다니며 감깎는 기계를 만들어 보라고 권하고 다녔는데 마침 그 해에 감깎는 기계가 나왔다.
우편주문판매로 곶감사업이 안정돼
상주형제농원의 문의현씨가 우편주문판매에 참여한 것은 1987년, 그보다 1년 전에 우편주문판매제도가 처음 실시되었을 때 상주우체국 창구 계장 박병조씨가 그를 찾아와 특산품 공급업체로 참여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정부가 보증하는 신용판매제도이니 만큼 품질이 생명일 것 같으며, 좋은 품질을 보장해 주려면 좋은 가격으로 거래해야 하는데, 우체국에서는 단가를 싸게 하는 데만 신경을 쓰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동료 상인인 박수용씨가 공급업자로 선정됐는데, 박씨는 1년도 채우기 전에 손을 들었다. 상품의 품질에 대한 불평이 여기저기서 쏟아지자 공급 자격을 잃었던 것이다. 그러자 상주우체국에서 다시 그를 찾아왔다. 이번에는 가격에 대해 까다롭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합의가 이루어졌다.
문사장은 곶감을 세 등급으로 나누어 1등급은 우편주문판매용으로 쓰고 나머지는 시판용으로 돌렸다. 때문인지 곶감은 첫해부터 잘 팔렸다. 오히려 공급이 주문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구정 무렵이면 저장 물량이 동이나 뒤를 댈 수가 없었다. 남의 가게에서 사다 공급할 수도 있으나 남의 물건은 취급하지 않았다. 품질이 미덥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의 집에서 만든 곶감은 깨진 감으로 만든 것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우편주문판매가 궤도에 오르면서 돈도 벌리기 시작했지만, 한편으로는 곶감 장사를 안심하고 할 수 있었다.
“매년 5월에 재단법인 체성회와 공급계약을 맺고 나면 우선 판로가 확보된 셈이니까 안심이 됩니다. 그때부터는 물건을 확보해서 건조를 잘 시키고 관리만 잘하면 되니까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죠.”
우편주문판매와의 만남, 그것은 곶감장수 문의현씨에게 주어진 하나의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하늘은 누구에게나 일생에 걸쳐 몇번의 기회를 준다고 하지만, 우편주문판매는 그의 인생에 있어 비상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전기가 되었던 것이다. 술 · 담배를 끊고 이를 악물고 열심히 살아온데 대한 보답이라고 할까?
그는 돈이 모이는 대로 밭뙈기를 샀고, 다시 그것을 팔아 논을 사고 땅을 샀다. 상주시내에 곶감 가게도 마련했다. 늘어만 가는 곶감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밭이나 산에 감나무 묘목을 심어 감나무 단지를 조성했다. 곶감을 1년 정도는 저장할 수 있는 10여평의 냉동창고도 마련했다.
당도가 높을수록 분이 많이 나와
잘 익은 감을 금의옥액(金衣玉液)이라 했다. 금빛 같은 옷 속에 옥 같은 액체가 들어있다는 뜻이리라. 감은 수분이 80% 이상 되기 때문에 저장하기 어렵다는 것이 결점이라 하겠는데, 저장성이 좋지 않는 감을 가공한 것이 바로 곶감이다.
감은 다른 과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떫은 맛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타닌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타닌산은 물에 잘 녹는 수용성 (水溶性)이어서 혀에 닿으면 떫은 맛을 준다. 떫은 맛은 감을 물에 우려내도 없어지지만, 곶감으로 만들어도 없어진다.
재래종의 감은 산지에 따라 사곡시 · 단성시 · 고종시 · 둥시 · 월하시 · 수시 · 반시 등 30여종으로 나뉘는데, 상주에서 많이 나는 감이 둥시이다. 일명 먹감이라고 불리는 둥시는 원형으로 생겼는데, 곶감 재료로는 최상급으로 치고 있다. 상주 지역은 소백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풍수해가 적고, 토심이 깊으며 일조시간이 길어 감나무가 자라는데 적합하다고 한다.
'감은 한로가 환갑이다.”라는 말이 있다. 한로가 지나면 바로 감을 따야 한다는 말이다. 곶감용 감을 따는 시기는 지역에 따라 약간 차이가 나지만, 상주의 경우 상강을 전후해 따는 것이 알맞다고 한다. 딴 감은 날이 지나면 물러지므로 바로 껍질을 깎아야 한다. 덜 익은 감은 하루 이틀 지나 깎아도 좋다.
감 한 개를 기계로 깎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불과 수초. 그러나 말리는 데는 40~60일이란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전에는 깎은 감을 대나무나 싸리나무 꼬챙이에 꿰어 말렸으나 지금은 감의 꼭지를 실로 묶어 말린다.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진 건조장에서 말린다.
감이 적당히 건조되어 곶감이 되면 표면에 곰팡이 같은 흰 가루가 피어오른다. 그러나 그것은 곰팡이가 아니고, 감 자체에 담겨 있던 당분이 배어 나온 것으로 단 맛을 줄 뿐 아니라 곶감의 맛을 간직해 주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 감의 당도가 높을수록 분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때문에 전에는 시장 상인들이 속임수로 곶감에 밀가루를 묻혀 팔기도 했다.
곶감은 직접 먹기도 하지만, 수정과나 한과를 만드는 재료로 쓰이기도 한다. 수정과는 우리 고유의 음식으로 기호성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영양가도 높은, 우수한 전통 식품이다.
감 속에 들어있는 타닌 성분은 소화기 계통의 점막을 수축시키는 수렴(收斂)작용을 하기 때문에 설사를 멎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또 타닌은 모세혈관을 튼튼히 해주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고혈압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감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은 아니다. 변비가 있는 사람이나 빈혈 증세가 있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해롭다. 타닌이 체내에서 철분과 만나면 우리 몸에 해로운 타닌철이라는 성분을 만들어 철분이 체내에 흡수되는 것을 막는다. 따라서 철분이 들어 있는 음식과 함께 먹는 것도 좋지 않다.
연중 어느 때라도 공급 가능
상주형제농원의 곶감사업은 이제야 본궤도에 올라섰다고 할 수 있다. 곶감의 원료인 감은 그의 농장 소출로는 어림도 없어 남의 감나무를 입도선매식으로 사고 있지만, 상주 일대에는 감나무가 많아 원료의 공급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감을 깎고 건조하는 것도 건조 기간이 길다는 것이 문제일 뿐 어려운 일은 아니다. 장기 보관이 어려워 구정이 지나면 공급을 중단해야만 했던 문제점도 냉동창고의 건립으로 말끔히 해소되었다. 또 전에는 한 해를 걸러 가며 흉년이드는 해거리라는 자연 현상이 불가피했는데, 이 문제도 퇴비의 충분한 공급과 적당한 전지로 해결되었다.
어려움이 있다면 감을 따는 작업.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감나무 가지는 잘 부러지기 때문에 낙상하기 쉽다. 때문에 누구도 감 따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농촌에서는 인부를 구하기 어려우며 감 따는 시기가 사과 등 다른 과일을 따는 시기와 겹쳐 인부난이 가중된다. 때문에 일당을 몇 곱으로 주며 사정사정을 해서 모셔오는데, 그러한 현상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상주형제농원의 문의현 사장은 계산에 밝은 사람이 아니다. 우편주문판매로 1년 동안에 들어 오는 수입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또 전체 매출 액에서 우편주문판매 수입이 어느 정도 차지하는지도 잘 모른다. 아니, 곶감의 연간 매출액이 얼마나 되는지도 머리 속에 넣고 있지 않다. 그저 많이 팔리면 팔릴수록 좋을 뿐이다. 다만 남 다르게 신경을 쓰는 일이 있다면, 좋은 품질의 곶감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뿐이다.
문사장은 우편주문판매를 시작하기 십수년 전부터 곶감 농사의 앞날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 때문에 1만평의 과수원을 조성하여 사과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사과 농사는 잘되지만 수입은 보잘 것 없고, 오히려 곶감 농사가 주수입원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도 상인들이 모이면 곶감 농사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내리지만, 그는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
“구입 가격 자체가 갈수록 높아지니까 상인들이 모이면 곶감사업은 말년이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에는 곶감을 오랫동안 저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구정까지는 팔아치우는 것으로 알고 장사를 했는데, 지금은 냉동창고가 마련돼 있어 홍수 출하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연중 어느 때라도 소비자가 원하는 시점에 공급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곶감도 1년 사시사철 어느 때나 즐길 수 있는 식품이 됐다고 할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