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주문 판매제도 자체가 좋으니까 많이 팔리는 거죠
판교라 하면 우리는 곧잘 경부고속도로에 간서 서울로 진입하는 관문인 서울톨게이트 부근의 판교인터체인지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도토리묵으로 유명한 판교는 그곳이 아니라 충남 서천군의 한 면이다. 그러니까 장항선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자면 보령을 지나 서천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놓인 역이 판교역이고 그 주변 일대가 판교면이다.
주변이 200〜300미터의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농촌인 판교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곳의 특산품인 도토리묵 때문이었다. 산동네도 아니요 그렇다고 평야지 대도 아니어서 이렇다 할 특산품이 없는 판교는 옛부터 도토리묵으로 유명했다. 주변의 야산에서 도토리가 많이 났기 때문이다.
주로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의 애경사에 잔치 용으로 쓰이던 도토리묵이 반찬용 식품으로 상품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판교는 전국적인 도토리묵의 공급처였다. 타지에서 미처 도토리묵의 상품화에 눈뜨기 전인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판교면 소재지에 자리잡은 70여가구는 모두 가내수공업 형태로 도토리묵을 쑤고 있었고, 거기서 생산된 묵은 도매상을 통해 서울의 경동시장이나 용산시장은 물론 대전·광주 등 전국 각지로 공급되었다. 그런데, 그 후 도토리묵이 반찬용 식품으로 일반화되면서 옥수수 전분을 사용한 가짜 묵이 판을 치자 도토리묵의 명성은 퇴색하였고, 따라서 판교 도토리묵도 덩달아 빛을 잃었다. 때문에 현재는 도토리묵 생산에 생계를 매달고 있던 70여가구는 대부분 그 일에서 손을 떼고. 4개 업체가 가내수공업이 아닌 공장 형태로 그것을 생산하고 있다.
우편판매 2년만에 전국 2위에
도토리묵 가루를 생산하는 판교 농민식품(대표: 김영근)이 우편주문판매를 시작한 것은 1990년이었다. 첫해는 늦게 시작했던지라 판매 액 1,800만원으로 체면 유지를 하는 정도였으나 이듬해인 1991년에는 1억 4천만원으로 10배 가까이 뛰어올랐고、3년째인 1992년에는 5억 3천여만원으로 다시 껑충 뛰어 특산품 판매액으로 전국 2위를 차지했다. 전국 어디서나 생산되지 않는 곳이 없고, 그렇다고 특별한 맛이 있는 것도 아닌 도토리묵이 그처럼 인기를 끌리라는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93년에는 매출액이 5억여원으로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더니. 1994년에는 3억 9천만 원으로, 다시 1995년에는 3억 4천여만원으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시중에 흔해빠진 도토리묵이 왜 그 처럼 인기를 끌 수 있으며. 또 1992년을 피크로 하여 매출액이 떨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 일까?
농민식품 대표 김영근씨(43세)가 판교에서 도토리 수집상을 시작한 것은 판교에서 도토리 묵 장사가 활발하던 1970년대 초반이었다. 일찍이 양곡상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장사를 배웠던 그는 20세란 젊은 나이에 독립의 길로 뛰어 들었던 것이다. 도토리 장수로서 그가 하는 일은 고향인 서천 일대는 물론 멀리 점촌·상주·예천·남원·순창 등 경상도와 전라도는 물론 강원도에서 수집한 도토리를 중간상인들로부터 사다가 묵을 만드는 판교의 실수요자들에게 공급하는 것이었다. 결혼 시즌이자 도토리 묵의 성수기인 가을과 봄에는 하루에 400가마니의 도토리를 공급해 주어야 하므로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도토리 장사를 하다 보니 계절에 따라서는 수요가 없어 재고가 쌓일 때도 있었다. 특히 여름철에는 수요가 적었다. 그러자 그는 재고품으로 쌓인 도토리를 빻아 녹말을 만들어 팔아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거래처에서도 그렇게 해 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도토리 가루를 가공해「도토리녹말」이라는 이름으로 시판을 시작했으나 생각만큼 팔리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이나 캐나다 교포들을 상대로 수출을 시도했으나 수줄상의 농간에 놀아나 죽을 쑤기도 했다.
그때부터 그의 장사 편력이 시작되었다. 그는 쌀장사·채소장사·농약장사 등 닥치는 대로 했다. 그러면서 거금을 벌기도 하고 상당한 돈을 잃기도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외상 장사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던 참에 우체국에서 우편주문판매제도를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도토리 묵 가루의 판매를 염두에 두고 우체국을 찾아가 문의했더니 신청을 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몇개월 후에 드디어 판교 도토리녹말이 우편주 문판매용 상품으로 허용되었다. 도토리묵 가루로서는 맨처음으로 우편주문판매 상품 목록에 올랐던 것이다.
우편주문판매가 시작될 때만 해도 도토리묵은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식품이어서 잘 팔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한 예상을 뒤엎고 이듬해부터 불티나게 팔렸다. 특히 도토리 속에 들어 있어 떫은 맛을 내는 타닌이라는 성분이 인체에 흡수된 각종 중금속을 제거하는 데 탁월한 효능이 있다는 방송이 나간 후 잘 팔렸다.
이에 힘입어 1992년부터 청포묵가루와 녹두 빈대떡가루를 취급 품목에 추가했다. 녹두를 가루로 빻은 것이 빈대떡용 녹두가루요 그것에서 원심분리기를 이용하여 녹말만을 채취한 것이 청포묵가루이다. 그러나 청포묵은 순수한 녹두 녹말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콩가루를 3대 7의 비율로 섞어 만들고 있다.
김사장의 상품 다양화 방침은 어느 정도 성공해서 청포와 녹두 가루도 각각 도토리 가루의 5분의 1 수준으로 꾸준히 팔렸다. 1992년부터 판매고가 급증했던 이유는 바로 그 상품 다 양화에 있었던 것이다.
1993년에 접어들자 우편주문판매제도에도 경쟁이 허용되면서 도토리묵가루 따위를 취급하는 업체가 하나둘 늘어났고 당연한 결과로 판교 도토리묵의 배당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현재의 경쟁업체는 5개. 앞으로 그 숫자는 더 늘어 날 전망이어서 업체간의 땅따먹기 경쟁은 한층 치열해질 전망이다.
주문 즉시 발송이 또하나의 비결
도토리묵은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식품으로 오래 전부터 구황식이나 별식으로 사랑을 받아 왔다. 도토리묵은 비교적 열량이 낮은 식품이어서 비만증인 사람에게는 좋은 식품이며. 특히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타닌이 중금속을 해독 하는 작용을 하므로 각종 산업 공해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환영받는 식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수렴성이 강한 타닌 성분 때문에 변비가 있는 사람은 삼가는 것이 좋다고 한다.
이러한 도토리묵 녹말을 만드는 과정은 비교적 단순하다. 도토리를 사면 우선 물에 담근다 떫은 맛을 우러내려는 뜻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도토리 속에 잠복해 있는 벌레들이 번식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1주일 후에 건져 하루쯤 햇볕에 말린 다음 기계로 껍질을 벗기고 분쇄한 후 믹서기를 사용하여 가루로 만든다. 그 가루에 물을 부어서 원심분리기를 이용하여 비지를 분리해 내고 녹말만을 채취하여 건조시킨 것이 도토리묵 녹말이다.
녹말을 채취하는 과정에서는 많은 물을 필요로 하는데. 그 폐수가 하천 바닥을 검게 물들 이는 것이 하나의 흠이다. 폐수 속에 섞여 있는 타닌이 물속의 중금속을 흡수하여 침전되기 때문이라 한다.
이와 같은 공해 문제가 따를 뿐 도토리묵 가루를 생산하는데는 특별한 어려움은 없다고 한다. 또한 판매에 대해서도 김사장은 특별히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편주문판매 자체가 좋은 제도여서 상품이 잘 팔리는 것이지 공급자가 노력을 많이 해서 잘 팔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서 잘 팔리겠어요. 제도 자체가 좋으니까 잘 팔리는 거죠. 또 집배원들이 돌아다니면서 ’기장 미역 하나 팔아 주슈’ 하고 주민들에게 권유하니까 팔아 주는 거죠. 그런데다 상품이 좋으니까 다시 사고 하는 거죠. 그처럼 주변에서 도와 주니까 잘되는 거죠.”
눌변에다 자기 PR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김사장은 뜻밖에도 장사가 잘되는 이유를 이처럼 우편주문판매제도 자체의 공로로 돌렸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살펴볼 때 김사장측의 공로로 돌릴만한 요소도 몇가지는 있다.
첫째는 철저한 품질관리이다. 도토리묵 가루를 만드는데 있어 핵심적인 작업은 믹서기로 빻아놓은 가루에서 녹말을 채취해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홀히 하게 되면 좋은 품질의 녹말가루를 만들 수 없다. 때문에 김사장은 녹말 가루로 만들어 놓은 제품을 물에 타서 끈기와 맛을 살핀다. 그 결과 기준 이하라는 판단이 내려지면 원심분리기를 이용. 재작업을 시킨다. 그 일만큼은 그가 직접 맡는다.
“품질이 좋으니까 많이 팔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먹는 거니까 조금만 나빠도 전화가 걸려 오고 민원이 들어오고 난리가 나는데, 우리는 그런 일이 한건도 없었어요. 타지역 제품을 우리한테 반품시키면서 우리 제품으로 바꿔달라고 할 땐 곤혹스럽죠. 그만큼 우리 제품을 좋아하는 거니까 싫다고 할 수도 없고요.”
또 하나의 비결은 주문 즉시 발송이다. 농민 식품의 하루 평균 주문량은 200건 전후. 그들은 서천우체국에 조그만 공간을 확보해 그만한 양의 상품을 갖다 놓고 인원이 대기하고 있다가 주문이 들어오는 대로 발송해 준다. 때문에 신청 즉시 받아볼 수 있어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을 수밖에 없다.
판교 도토리묵가루는 우편주문판매외에 농협 직매장과 서울의 롯데·그랜드 등 몇개 백화점을 통해 판매되고 있는데. 우편주문판매와 시중 판매의 비율이 반반쯤 된다고 한다. 농협이나 백화점 판매에는 적극적이 아니어서 주문이 들 어오는 대로 팔고 있으나. 품질이 좋기 때문에 꾸준히 나가고 있다.
이처럼 농민식품의 도토리묵가루 판매사업은 원료 구입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고, 생산에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판매 에도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 되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농어촌의 생산자와 도시의 소비자를 직접 연결시켜 주고 있는 우편주문판매제도의 덕분이라는 생각에서 김사장은 이 제도에 대해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한 김사장의 마음에 최근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경쟁 도입이다. 동일 상품의 공급에 대한 문호를 개방해 놓자 사방에서 경쟁자가 침입하고 있는 것이다. 경쟁업체는 앞으로 계속 늘어날 전망이어서 어두운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있다. 물론 경쟁이 품질이나 서비스를 개선하는 효과는 있겠지만, 한정된 공급물량내에서의 경쟁은 자칫 갈라먹기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농협이나 백화점을 통한 시판을 단행했던 일이 여간 다행스럽게 생각되는 것이 아니다. 김사장은 우편주문판매에 전념 하기 위해 한동안 시판을 망설인 일도 있었던 것이다.
“전에는 우편주문판매에 전념하려 했으나 이 제는 크게 신경을 안씁니다. 경쟁업체가 난립하다 보면 결국 갈라먹기가 되고. 그러다 보면 좋은 품질을 유지하기 어려워 우편주문제도라는 좋은 제도 자체가 훼손될 우려도 있습니다. 공급업체 입장에서 보더라도 수요가 줄다 보면 이 사업에 크게 신경을 안쓰게 되고 시판에 신경을 안쓸 수가 없지요. 저는 현재 경쟁업체가 몇개나 되는지도 모르지만. 내년에도 또 늘 텐데 이 사업에 매력이 있겠어요.”
농민식품 김영근 사장은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