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망세
-우체교사로 시작해 우편 고문으로 활동
외국인 가운데 대한제국 우편사업에 실질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프랑스인 클레망세(Clemencet; 吉孟世)였다. 1898년 프랑스 체신성에 근무하던 클레망세를 우체교사로 채용한 데는 두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오늘날의 국제우편 업무를 담당할 관원들을 교육시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실제로 국제우편 업무를 담당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클레망세를 스카우트한 사람은 나중에 통신원 초대 총판이 된 민상호였다고 한다. 민상호가 유럽 여러 나라를 시찰할 때 프랑스의 우편제도를 살펴봤는데, 그때 클레망세를 만났던 것이다.
아무튼 클레망세는 대한제국의 우체교사로 시작해 우편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일을 했다. 1898년 12월 우체교사로 채용되자 클레망세는 외국어학교 학생 중에서 10명을 선발해 영국과 프랑스에 5명씩 파견해 우편 업무를 견습시키자고 건의했다. 그 무렵 대한제국 정부는 곧 실시될 국제우편에 대비하기 위해 인천∙목포∙원산∙부산 등지에 국제우편을 담당할 우체국을 설치하기로 하고, 실제로 프랑스어를 배운 학도들에
게 국제우편에 관한 실무를 견습시켜 항구 우체국에 배치했다.
그 과정에서 클레망세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가 만난 부산우체국장이 프랑스어로 대화할 수 있었던 것도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클레망세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서 우리나라 우편사업에 미치는 그의 입김이 세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가 1903년에 발행한‘독수리우표’를 프랑스에서 인쇄한 사실이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미 독일에서 수입한 석판인쇄기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대형우표라 불렸던‘독수리우표’의 인쇄를 프랑스 정부에 맡겼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1899년 클레망세는 농상공부대신에게“새로운 우표가 발행되면 천하 만국의 우표수집가와 상인들이 살 것이므로 적지 않은 판매고를 올릴 수 있다.”며 국제우편을 실시할 때에 대비해 고액 우표를 발행해야 한다는 내용의 건의서를 올렸다. 유명 관광지와 사적을 담은 그림엽서의 발행도 건의했다. 그리고 위조와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우표를 선진국에 위탁 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프
랑스 공사를 찾아가 새 우표를 아예 프랑스에서 인쇄하도록 하자고 꼬셨다. 그러자 프랑스 공사가 고종을 알현하고 한국 우표를 프랑스에서 인쇄하도록 해달라고 압력을 넣었다. 마음이 약한 고종은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외부대신과 농공상부대신을 불러 상의한 끝에 프랑스 공사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리하여 독수리우표 13종과 우체엽서 2종을 프랑스 체신청에 위탁해 제조하게 했다.
독수리우표는 클레망세가 직접 도안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실제로 영국인 우취가 우드워드가 그렇게 주장하기도 했는데,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우표수집가를 겨냥해 기념우표를 발행해야 하며, 위조 방지를 위해 프랑스에서 인쇄까지 하도록 하고, 우표 도안까지 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볼 때 한국 우편에 대한 그의 열정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미륜사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통신권 지키고자 분투
우편 분야의 외국인 교사로서 클레망세가 있었다면, 전기통신분야에는 미륜사(彌綸斯)가 있었다.
미륜사의 원래 이름은 뮐렌스테트(H. J. Muelensteth)였다.
1855년 덴마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1년 대북부전신회사에 입사해 전기통신 기사로 일하다 중국으로 건너가 청나라 전보총국에서 근무했다. 덴마크 회사인 대북부전신회사는 당시 동양의 해저전신선 부설을 독점하고 있던 세계적인 회사였다. 중국 전보총국이 한반도에서 서로전선을 건설하게 되자, 1885년 미륜사는 중국인 기술자들과 함께 인천으로 건너왔다. 그는 뒷날 뼈를 묻을 한국과 그렇게 첫 인연을 맺었다.
한반도에서의 미륜사의 임무는 서로전선 건설공사의 감독이었다. 그는 대북부전신회사 소속의 사미은(謝彌恩; C. S.Chiron)과 함께 인천에서 서울을 거쳐 의주까지 가면서 1차 공사를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조선으로 돌아와 대동강과 청천강 등을 가로지르는 수저선(水底線)의 건설 작업에 참여했다.
남로전선을 건설하면서 미륜사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남로전선의 가설은 우리 정부와의 조약에 의해 중국회사인 화전국(華電局)이 맡기로 했고, 화전국에서는 미륜사가 공사를 지휘하기로 했다. 그는 서울에서 충주, 대구를 거쳐 부산에 이르는 선로 건설 예정지를 돌아보며 측량 작업을 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가 채용한 영국인 핼리팍스(Halifax)가 선로 건설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그의 역할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그 뒤 화전국 기술자로 일하면서 한국인 전보학생의 양성에 힘썼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미륜사는 중국으로 건너갔다.
산둥반도에서 청나라 전보국에서 근무하다 일본군 포로가 되어 일본 사세보(佐世保)수용소까지 끌려갔으나, 일본군에게 모종의 서약을 한 뒤 석방되었다. 어떤 서약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동안의 행적으로 보아 반일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포로에서 풀려나자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가 조선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자 정부는 그를 농상공부 전보교사로 채용해 전보학도의 교육을 맡겼다. 직책은 그러했지만 그가 맡은 업무는 단순한 실무 교육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전기통신사업전반에 걸쳐 고문 역할을 했다. 대외관계에도 폭넓게 관여했다. 특히 일본과의 교섭에서는 언제나 강경한 자세를 취하며 그들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곤 했다. 그런 공로를 인정했음인지 대한제국 정부는 거의 매년 고용계약을 갱신하며 그를 그 자리에 앉혔다. 또한 1899년에는 3품의 주임관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1905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통신권을 강탈당하자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처럼 공적이 컸음에도 미륜사에 대한 대우는 생각보다 박했다. 특히 통신원에 같이 고용된 우체교사 클레망세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았다. 일본에 의해 해고될 때도 그의 상여금과 귀국 여비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같이 해고된 클레망세에겐 3150원을 지급했지만, 그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 프랑스공사를 통해 상여금과 귀국여비를 지급해 달라고 청했으나, 우리 정부는 그의 공로가 컸음을 인정하면서도 지불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 정부의 뜻이라기보다 일본의 입김이 작용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일본의 기피 인물이었다는 증거는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노일전쟁이 발발하자 경성에 있던 일본우편국장 다나카(田中次郞)가 전신국 직원과 헌병을 거느리고 조선전보총사로 쳐들어간 사건이 있었다. 그때 그들은 전보교사 미륜사를 해고하고 그 자리에 일본인을 앉히라고 윽박질렀다. 그들이 미륜사를 눈엣가시처럼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일통신협정에 관여했던 한 일본인은 그를 가리켜“언제나 일본에 대해 색안경을 쓰고 보는, 매우 귀찮은 존재”라 회고했다.
미륜사의 그 뒤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다. 뒷날 서울 마포에 있는 외국인 묘지에서 그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그가 덴마크로 귀국하지 않고 한국에 남아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신병을 비관한 끝에 세검정에 있는, 과수원이 딸린 자택에서 권총으로 자살한 사실도 뒷날 밝혀졌다.
대한제국 말기에 우리 정부에 채용됐던 외국인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간혹 독일인 등 외국인이 일본인의 추천으로 채용되기도 했지만, 일본인에게 아부하는 자만이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미륜사가 10년 가까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실력과 조야의 두터운 신임 때문이었다. 우체교사 클레망세도 사정은 비슷했으나, 우리 통신기관을 탈취당하는 과정에서 일본 측에 비밀 정보를 제공하는 등
배임 행위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