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사업의 뿌리[2]
우정총국이 문을 연 지 20일 만에 문을 닫자 국내 통신은 전통 방식인 역참제(驛站制)로 되돌아갔다 ○ 그러자 인천 · 부산 · 원산 등 각 항구에 그들 멋대로 설치한 일본 우편국이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 나라의 체면을 살리자면 우편사업을 재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갑신정변의 참변이 잊어질 무렵인 1893년, 고종은 「전신총국」을 「전우총국(電郵總局)」으로 개편해 전신(電信)과 함께 우신(郵信)을 취급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 전신 업무를 시작한 지 오래 되었으니, 우편 업무 또한 취급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전제를 달면서 ● 그럼에도 우편사업은 바로 시작되지 않았다 ○ 전우총국의 기구를 만들고 법령을 제정하는 동안 갑오개혁으로 정부 조직의 틀이 다시 바뀌었다 ○ 1894면 공무아문에 역체국(驛遞局)과 전신국이 설치되는가 했더니, 이듬해에는 다시 농상공부 통신국(通信 局)으로 우편사업의 관장 기구가 바뀌었다 ○ 그리하여 1895년 6월 1일 통신국에서 서울 · 인천 간에 우편 업무를 시작함에 따라 우편사업이 재개되었다 ● 그 뒤 1900년 통신국을 통신원(通信院)으로 승격시키는 정부의 조직 개편이 있었다. ○ 대한제국 정부는 통신국을 농상공부에서 떼어내 우체 · 전신 · 선박 해원(海員) 등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관장하는 독립기구로 발족시켰는데, 그때부터 통신원은 우편과 전기통신은 물론 해양 업무까지 담당하는, 오늘날의 청(廳)과 같은 형태로 독립할 수 있었다 ●
전화의 등장
우리나라에 전화기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82년 3월로 추정되 지만, 실제로 전화가 가설된, 정확한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전화에 관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태까지는 1898년을 정설로 삼고 있었으나, <백범일지>는 이미 1896년 윤 8월에 서울과 인천 간에 통화한 사실이 있다고 적고 있다.<백범일지> 자체에도 오류가 발견되고 있어 확신하기 어려우나, 전후 사정으로 볼 때 그 무렵에 이미 전화가 가설돼 있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초창기의 전화는 궁중에서 먼저 사용했다.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에 전화교환대를 설치하고, 왕실에 관한 업무를 맡고 있던 궁내부(宮內府)와 각 아문(衙門) 사이를 연결해 놓고 왕의 급한 명령을 전달했다. 나라의 관문을 지키고 있는 인천감리와도 자주 통화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궁내부 중심으로 운용되던 전화는 곧바로 대중용으로 보급되지 않았다. 당시의 전화는 시내전화보다 시외전화에 중점을 두었다. 가입자가 극히 제한적인 당시로서는 전화의 필요성이 단거리보다 장거리 간에 보다 절실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외국과의 교통수단을 배에 의존하던 당시로서는 나라의 관문인 인천과 서울을 연결하는게 무엇보다 시급했다. <백범일지>에서 밝혔듯, 1896년 서울 · 인천 간의 전화가 개통된 이래, 각 아문과 인천감리 사이에 통화를 주고받은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어 1902년에는 서울 · 개성 간의 전화가 개통되고, 다시 개성 · 평양 간의 전화가 개통되었다. 이듬해인 1903년에는 서울 · 수원 간의 전화가 연결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한성전화소 관내에 마포 · 도동(남대문) · 시흥(영등포) · 경교(서대문) 등 4개 지소를 설치했다.
일반인에게 전화를 공급하기 시작한 것은 1902년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당시의 전화 사정을 알려줄 기록이 없어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통신원 초대 총판 민상호의 유품에 '각 전화소 청원인표(請願人表)'라는 제목의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의 사정을 어렴풋이 짐작케 한다. 그 기록에 의하면, 1902년의 전화가 입자는 서울에 2명, 인천에 3명에 불과했는데, 이듬해인 1903년 에는 서울에 16명, 인천에 13명이었다. 그 뒤 1905년에는 서울 50명, 인천 28명, 수원 1명, 시흥 1명 등 모두 80명이었다. 그처럼 초기의 전화 가입자는 거북이걸음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일본의 통신권 침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은 1910년이었다. 하지만 통신권은 이미 5년 전인 1905년에 강탈당했다. 한국을 강탈할 야욕을 품고 있던 일제는 그 전초작업으로 정보 전달 수단인 통신시설부터 장악했던 것이다.
사실 일본의 우리 통신권 침해 역사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이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해 부산 · 인천 · 원산 등의 항구를 개방하면서 그들 개항지에는 일본인 거류지가 생겼다. 일본은 우정총국이 문을 열기 전부터 그들 거류지에서 자국민의 통신 편의를 제공한다는 구실 아래 일본 우편국을 세웠다. 강화도조 약에 의해 개항지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치외법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우체국 설립도 그들 멋대로 했던 것이다. 그 뒤 1891년 에는 출장소라는 명분으로 항구가 아닌 서울에도 인천우편국 경성출장소를 세웠다. 그리하여 1894년에는 일본 우편국이 29 개로 늘어났다. 통신국이 설립되고 우리 우편사업이 재개되면서 우리 정부는 일본에 우편국 철폐를 요구했으나 일본 우편국은 갈수록 늘어만 갔다.
우체국금융사업의 도입
1905년 한국의 통신권을 빼앗자 일제는 1880년대부터 한국에 진출해 있던 일본 우편국에서 실시하고 있던 우편저금사업과 우편환사업을 전국 우체국에서 취급하도록 했다. 재한 일본인의 편의를 위해 실시한 제도를 그대로 우리 우체국으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 또한 일본 정부는 거액의 전쟁 비용을 적자 공채의 발행으로 조달하고 있었으므로 우편저금 제도를 통해 우리 백성들에게 저축을 강요했다. 우리 우체국금융사업은 이처럼 일본의 강요에 의해 피동적으로 받아들여졌다. 1929년에 실시한 간이생명보험사업도 예상보다 훨씬 많은 적립금을 쌓아가며 일제의 전쟁비용 조달에 큰 몫을 했다.
이처럼 당시로서는 새로운 제도요 새로운 기술이던 우편과 전신 · 전화, 우편저금과 보험은 혹은 자의에 의해, 혹은 외세의 압력에 의해 도입되면서 온갖 수난의 역사를 거치며 한 울타리에서 발전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