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풍·덕률풍·어화통·전어기 [1]
전화 가설로 사형을 면한 김구
20세의 청년, 백범 김구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살리고자 울분을 품은 채 전국을 유랑한다. 대동강변에서 조선인으로 변장한 일본인 장교를 만난다. 일본인 장교와 격투를 벌인 끝에 칼로 쳐 죽인다. 1년 전에 일본인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국모 민왕후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에서다.
살인을 했음에도 김구는 도망가지 않는다. 태연히 집으로 돌아가 잡으러 올 날을 기다리고 있다. 결국 인천감옥으로 끌려가 사형의 날을 기다린다. 그에게 사형을 집행하기로 한 날, 고종이 인천감리를 전화로 불러 사형 집행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김구는 그렇게 죽음 일보 직전에서 목숨을 구한다.
김구가 사형을 면하기까지에는 아슬아슬한 고비가 두 번 있었다. 법무대신이 김구 등 사형수 명단을 가지고 입궐해 사형에 처하겠다며 고종의 재가를 얻었다. 자세한 내용을 알리 없는 고종은 무심코 결재했다. 그때 입직한 승지가 김구의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임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이미 재가된 안건을 가지고 가서 다시 임금에게 아뢰었다. 고종은 즉시 어전회의를 열어 김구의 사형을 정지하기로 하고, 그 사실을 인천감리에게 전화로 알렸다.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가 가설된 것은 바로 사흘 전이었다. 서울 · 인천 간의 전화 개통이 3일만 늦었던들 고종이 아무리 김구를 살리고 싶어도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김구가 쓴 <백범일지>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전화는 이미 1896년 8월 이전에 개통됐다. 하지만 백범일지에도 오류가 있다. 김구가 사형을 면한 날을 병진년 윤 8월 26일이라 적고 있는데, 민왕후가 시해된 것은 1895년이고 병진년은 1916년이니 얼토당토않다. 앞뒤의 흐름으로 볼 때 병진년은 1896년인 병신년의 오기인 듯싶다. 또 백범일지는 김구가 사형을 받기로 한 해가 건양 2년이고, 그 해 창간된 황성신문에 그 사건의 전말이 쓰여 있다고 했다. 하지만 건양 2년은 1897년이요, 황성신문은 1898년에 창간되었다. 세 가지 기록에 1년씩 차이가 난다. 이처럼 기억에 의존하는 기록에는 착각 내지 착오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창양행과 묄렌도르프
1880년대 초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전화기는 다리풍 · 덕률풍 (德津風) · 득률풍(得律風) 등으로 불렸다. '텔레폰(Telephone)'의 중국식 음역(音譯)이었다. 또 의역(意譯)으로 어화통(語話筒) · 전어통(傳語筒) · 전어기(傳語機)라 불리기도 했다.
초창기의 전화는 감도가 매우 나빴다. 그 소리가 마치 귀뚜라미 우는 소리 같아 나이 든 사람은 알아듣기 힘들었다. 때문에 전화가 걸려오면 주위에 있는 관원들이 숨소리를 죽이고 있거나 통화하는 데 방해가 될까봐 아예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한다. 전화기를 만드는 기술 자체도 유치했을 뿐 아니라, 전화선이 동선 아닌 철선인데다 전신까지 같이 썼기에 잡음이 심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전화를 거는 것도 하나의 기술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장거리 전화를 단 회사는 인천에 있는 세창양행(世昌洋行)이었다. 세창양행은 인천에 있는 본사와 강원도 금성(지금의 김화) 당현금광과 통화하기 위해 전선을 가설해 달라고 대한제국 정부에 요청했다.
세창양행은 독일인 마이어가 설립한, 함부르크에 본사를 둔 무역회사였다. 그 회사가 극동으로 진출하면서 홍콩과 상하이 · 텐진 · 고베 등지에 지사를 설립했는데, 제물포(인천)에 설립한 지사 이름이 세창양행이었다. 세창양행은 당시 우리 정부의 고문으로 활약하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와 손잡고 무역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는데, 바늘 · 석유 · 자전거 · 금계탑 등 당시로서는 값진 박래품(舶來品)을 판매했다. 상선도 운행하고 광산도 개발 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신문 광고를 낸 회사여서 당시엔 일반인에게도 꽤 알려져 있었다.
아무튼 7,500원이라는 적잖은 비용을 들여 가설한 전화는 별 쓸모가 없었던 모양이다. 말소리를 알아듣기 어려울 만큼 통화 상태가 나쁘자 세창양행은 5개월간의 전화세로 250원을 납부하고 전화시설을 자진 철거했다. 1899년의 일이었다.
고종과 전화에 얽힌 일화
초창기의 전화가 궁내부를 중심으로 가설되다 보니 전화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린 사람은 고종과 궁내부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고종이 전화를 애용했다. 고종과 전화에 얽힌 일화 몇 가지를 들어보자.
외세에 시달리고 아첨꾼에게 시달리다 보니 고종은 가까운 신하도 믿지 못했다. 때로 대신을 거치지 않고 전화로 신하와 직접 통화했다. 통화 상대에겐 내시가 받을 시간을 미리 알려 주었다. 전화를 받게 될 신하는 의관을 정제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가 걸려오면 신하는 전화기를 향해 네 번 큰절을 하고 두 손으로 공손히 전화기를 들어 귀에 댔다. 외국에서 들여온 요상한 기계로 황제의 목소리를 전함은 황제의 권위와 체신을 위해서도 아니 될 일이라며, 대신들이 만류해도 고종은 듣지 않았다.
러시아의 세력이 한창 위력을 떨치던 때였다. 주한 러시아공사 파블로프가 압록강변의 산림 벌채권을 내놓으라며 우리 정부를 윽박질렀다. 고종도 내락한 상태였으나, 일본공사 하야시(林 權助)가 극구 반대하며 대신들을 협박하자 아무도 그 일에 관여 하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파블로프가 외부(오늘날의 외무부) 로 찾아가 장화발로 마룻바닥을 쿵광거리며 대신을 불러오라고 호통쳤다. 입장이 난처한 외부 간부들은 모두 자리를 피해 버렸다. 할 수 없이 실무자인 외부 주사 황우찬이 파블로프를 맞았다.
파블로프가 불같이 화를 내며 다그치자, 25세의 젊은 나이인 황우찬은 고종에게 여쭈어 뜻을 정하기로 하고 궁중으로 전화를 걸었다. 먼저 의관을 정제하고 공사청 내시에게 전말을 알렸다. 사정이 다급함을 알자 고종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황송스럽지만 자초지종을 아뢰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 공사를 외부에 데려다 놓고 황실을 협박하다니, 불손하도다.'
고종이 진노했으나, 다행히 큰 벌을 내리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