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풍 · 덕률풍 · 어화통 · 전어기[2]
전화를 통한 왕실의 문상
전화에 대한 고종의 믿음은 생각보다 강했던 듯싶다. 조대비가 서거하자 고종은 조대비의 묘가 있는 동구릉까지 임시로 전화를 가설했다. 아침저녁으로 찾아가기엔 거리가 너무 멀자 전화로 문안 인사를 올리려 했던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한반도에서의 전선 부설권을 노린 청국이 고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조대비가 묻혀 있는 동구릉과 왕실 사이에 전선을 깔아 주겠다고 먼저 제의했다 한다. 먼 길을 행차하느니 전화로 곡을 올리면 한결 편하지 않느냐는 말로 꼬시며…. (당시는 전선 한 가닥으로 전신과 전화를 같이 보냈으므로 여기에서의 전선은 전화선으로 해석함이 옳을 듯싶다.)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강제로 왕위에서 밀려난 고종은 덕수궁에 은거하고 있었다. 왕위를 물려받아 창덕궁에서 기거하고 있던 순종은 덕수궁과 창덕궁 사이에 직통선을 가설해 놓고 태상왕인 고종에게 매 끼니 때와 취침시간 등 하루에 네 번 문안 전화를 올렸다.
전화를 통한 문상은 대물림됐다. 고종이 죽자 순종은 덕수궁에 차린 혼전(魂殿)과 산릉(山陵)에 직통전화를 가설하고 수시로 곡을 올렸다. 이때 순종이 상복을 입고 엎드려 절하면 내시가 재빨리 황제의 입에 전화기를 갖다 댔다. 이에 앞서 내시가 혼전의 참봉에게 덕률풍의 화구(話口)를 혼백에게 돌리도록 명령을 내린다. 신하들이 낯선 요물을 통해 곡함은 왕도에 어긋난다며 말렸지만 순종은 듣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첨단기술이었지만, 전화나 전신은 과학기술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조선 백성들에게 그저 요물일 뿐이었다. 전화를 이용하려면 이용자가 전화를 가지고 있거나 상대방이 전화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전화를 가지고 있는 서민은 없었다.
전보를 둘러싼 유언비어
전신 역시 한문과 영문, 불문 전보만 취급한데다 요금이 비싸 백성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때문에 초창기의 전보는 주로 관청에서 이용했고, 외국 상인들이나 고위 관리들이 사신(私信)으로 이용했다.
게다가 전보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당시엔 전보로 소식을 전함은 결례라는 인식이 강했다. 대한제국 때 인천세관에 근무하는 한 주사가 서울에 있는 본가에 득남했다는 소식을 전보로 알렸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할아버지는 부정 탔다며 그 손자를 평생 집 문안에 들이지 않았다. 그만큼 신기술에 대한 인식이 나빴다.
전보를 둘러싼 유언비어도 끊이지 않았다. 전보가 전달되는 동안 전선을 지키는 청군이나 일군이 그 내용을 변조해 보낸다는 소문이 나돌아 전보에 대한 불신감을 한층 높였다. 게다가 전보는 전기 바람에 의해 전해지는데, 전기 바람은 가뭄을 몰고 오기 때문에 전보가 날아오면 가뭄이 든다는 뜬소문도 나돌았다. 실제로 개화를 반대하는 수구파는 '하늘의 전기 바람은 비구름을 말리고 땅의 덕률풍은 땅 위의 물을 말린다'라는 노래를 퍼뜨려 민심을 어지럽히기도 했다. 또 전보를 취급하는 전보사 (電 報司)엔 전기 귀신이 살고 있으며, 전화를 걸면 귀신이 붙는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전화를 통한 로맨스
전화교환원 하면 우리는 여자를 연상케 된다. 하지만 초창기의 교환원은 남자였다. 남자가 한복에 상투를 틀고 교환대에 앉아 교환수 노릇을 했다. 그 뒤 언제부터 여자 교환원으로 바뀌었는지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1902년에 설립된 한성전화소에 여자 교환원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 이때 여자로 교체됐던 듯싶다. 교환원이 여자고 전화 이용자가 주로 남자다 보니 사건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비둘기 집>의 가수 이석이 안고 있는 사연이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석의 어머니는 궁중 교환원이었다. 교환원으로 일하다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의친왕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 미국 유학파요 총명하고 활달했던 의친왕은 39세나 아래인 어린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는데, 그들 사이에 난 아들이 바로 이석이었다. 두 사람 사이로 보면 장남이지만, 의친왕은 이미 다른 부인들 사이에 많은 자녀를 거느리고 있어, 실질적으로 이석은 의친왕의 11번째 아들이었다. 남녀의 구별이 엄연했고, 39세의 나이 차이가 있었음에도 전화를 통해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다 보니 그와 같은 로맨스가 가능했던 것이리라.
청색전화, 백색전화
서민들에게 그림의 떡이었던 전화가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된 1960년대였다. 나라 경제가 발전하고 국민소득이 높아지자 서민들이 다투어 전화를 놓으려 했다. 수요는 급증하는데 공급이 미처 따르지 못하자 전화 품귀 현상이 생겼다.
느닷없이 전화가 투기의 대상이었다. 주로 권력층과 투기꾼들이 재미를 보았다. 권력층은 전화국 직원을 힘으로 누르고, 투기꾼은 그들을 매수하거나 결탁하는 방법으로 전화 가입권을 따내 힘없는 실수요자에게 웃돈을 얹어 팔았다. 체신부 간부나 전화국 직원들도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전화 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서민들이 전화를 달려면 웃돈을 얹어줘야만 했다. 서울의 전화 한 대 값이 웬만한 집 한 채 값이 되었다. 전화 부조리는 그렇게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러자 체신부는 1970년 전기통신법을 개정해 그 날 이후 가설해주는 전화는 판매를 금지하는, 소위 청색전화제도를 실시했다. 그 전에 가설한 전화는 '백색전화'라 하여 자유로이 사고 팔 수 있도록 내버려두되, 그 날 이후 달아준 전화는 '청색전화'라 하여 판매를 못하게 했다.
두 가지 전화를 '청색전화'와 '백색전화'라는 그럴듯한 명칭으로 구분한 이유도 알고 보면 단순하다. 앞의 전화는 가입전화에 관한 사항을 기재하는 원부의 색깔을 청색으로 했기에 청색전화, 뒤의 전화는 그 원부의 색깔을 종전대로 백색으로 내버려뒀기에 백색전화라 불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