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경장이 가져다준 변화
우리나라의 행정제도는 오랫동안 이조 · 호조 · 예조 · 병조 · 형조 · 공조로 이뤄진 6조 체제를 견지해 왔다. 그러한 행정제 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은 갑오경장이었다. 1894 년 김홍집 등 친일 세력은 정부 기구를 의정부(議政府)와 궁내 부(宮內府)로 양분하고, 의정부 아래 있던 기존의 육조를 개편해 외무· 내무· 탁지· 군무· 법무· 학무· 공무· 농상 등 8 개 아문(衙門)을 두는 행정제도의 개혁을 단행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부(部)에 해당되는 아문 밑에 국(局)을, 국 밑에 과 (課)를 설치했다. 그때부터 근대식 행정제도의 기본 틀이 짜였 던 것이다.
8개 아문 중 통신사업을 관장한 기관은 공무아문(工務衙門)이 었다. 철도와 광산 · 건축업무까지 맡고 있던 공무아문은 그 밑에 역체국과 전신국을 두고 우편과 전신업무를 담당했다. 따라서 그때까지 병조(兵曹)에 속해 있던 역참제는 폐지될 수 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895년 「의정부」가 「내각」으로 바뀌고 공무아문이 농상아문과 합쳐 「농상공부(農商工部)」로 개편되면서 공무아문 역체국과 전신국이 농상공부 통신국(通信局)으로 통합되었다. 그 당시 통신국은 우편과 전신전화사업뿐만 아니라 선박 · 해원 · 육운(陸運)과 전기사업까지 관장하게 되었다.
1900년 농공상부 통신국이 통신원(通信院)으로 독립해 통신업무를 전담케 되었다. 공무아문이나 농상공부 소속으로 돼 있던 통신 전담기구가 오늘날의 외청(外廳) 형태로 독립했던 것이다. 이처럼 통신원의 발족은 통신사업의 관장기구가 다른 기관의 소속에서 벗어나 독립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통신사업의 비중이 그만큼 커졌음을 의미한다 하겠다.
강제로 체결한 일한통신기관협정
일본은 1905년 대한제국과 강제로 일한통신기관협정을 체결해 우리나라 통신권을 빼앗아 갔다.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빼앗기 5년 전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통신원을 폐지하고 통감부에 통신관리국을 두어 우리나라 통신사업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한일합방이 되자 통감부 대신 조선총독부가 최고 통치기구로 군림했다. 통감부 통신관리국은 총독부 통신국(通信局)으로 대치되면서 고유의 통신사업 외에 통신원의 소관 사항이었던 전기와 해운 · 기상관측업무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이윽고 가스 사업까지 관장했다. 1912년에는 통신국을 체신국(遞信局)으로 개편하면서 종래 통신국 소관이던 기상관측업무를 내무부로 이관했다. 또한 1919년에는 선원 양성기관인 해원양성소(海員 養成所)를 인천에 설치했다가 1927년 진해로 옮겼다. 또한 수력발전소 건설이 시급한 현안으로 대두하자 1923년에는 체신국 내에 임시수력조사과를 두기도 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체신국 기구에도 상당한 변화가 왔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항공계를 항공과로 승격시키더니 1943년에는 해운업무와 항공업무를 교통국 (交通局)으로, 가스사업을 식산국(殖産局)으로 이관했다. 이에 앞서 1941년에는 전기사업을 광공국(鑛工局)으로 넘겼다. 이에 따라 체신국에는 통신사업과 금융사업만 남게 되었다.
정보통신시대의 개막
해방이 되고 체신국이 체신부로 개편됐지만, 관장사업은 우편과 체신금융사업, 전신전화사업으로 큰 변화가 없었다. 체신부 모습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준 것은 전기통신사업의 분리 였다. 1981년 전기통신사업을 전담하는 한국통신(KT)이 설립되고 전신전화사업아 체신부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체신부 사업은 바짝 쪼그라들었다. 불과 몇 년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우편저금과 체신보험사업마저 농협으로 넘긴 뒤여서 체신부는 우편사업만을 관장하는, 보잘 것 없는 부처로 추락했다. 과연 우체국 업무만으로 정부 부처로서 살아남을 수 있느냐는 위기감마저 감돌았다. 때문에 체신부는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워 서둘러 체신금융사업을 부활시켰다.
한국통신(KT)에 이어 설립된 회사가 한국데이터통신 (DACOM)이었다. 데이콤은 컴퓨터와 통신을 통해 자료를 주고 받는 데이터통신이라는 새로운 통신 방식의 보급을 사명으로 삼고 태어났다. 거기서도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정보 통신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단순한 자료통신에 불과하던 데이터통신이 인터넷이라는, 가공할만한 통신 방식을 탄생시켰다. 인터넷은 많은 사람과 동시에, 또한 즉각적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통신 방식이다. 게다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크나큰 장점이 있다. 거기에 정보 검색 기능이 추가되면서 그것의 값어치는 갈수록 높아만 간다. 아무튼 인터넷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정보통신시대가 활짝 열리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체신부의 위상이 눈을 비비고 볼 만큼 높아졌다.
정보통신시대의 개막에 발맞춰 체신부는 1995년 그 이름을 정보통신부로 바꾸고 정보통신 분야의 정책을 전담하는 정부 부처로서 새로운 출발을 했다. 21세기로 접어들어 한국이 IT 강국이 되면서 정보통신부의 모습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앞으로 정보화사회가 완성됐을 때 정보통신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