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우체국은 부족했다. 필요한 만큼 공급한 적이 없었으니 우체국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 재정이 빈약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계속되는 정치적 불안과 전쟁 등도 우체국의 증설을 방해했다. 40년에 이르는 일제의 통신권 침탈 기간에는 국민의 생활 편익을 위한 통신시설 증설은 기대할 수 없었고, 6ㆍ25전쟁 이후에는 파괴된 우체국 시설을 복구하기에 바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그처럼 다사다난했던 100여 년의 우편 역사에서 우체국을 획기적으로 늘릴 기회가 세 번 있었다. 첫 번째는 우편사업을 재개하면서 실시한 임시우체사(臨時郵遞司) 제도였다. 1898년에 실시한 이 제도는 우체국의 설치를 통신기관이 맡는 대신 지방관에게 맡겼다. 우체사는 필요한데 재원이 없자 우체사의 설치를 지방관에게 일임함과 동시에 그것의 운영마저 맡겼던 것이다. 그 결과 1897년 전국적으로 33개에 불과하던 우체사가 1899년에는 379개로 대폭 늘어났다. 두 번째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실시된 별정우체국제도였다. 1961년 12월에 실시한 이 제도는 우체국의 설립을 민간인에게 맡기고운영마저 맡기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61년에 771개국이던 우체국 수가 1966년에는 1728개국으로 2.2배 증가했는데, 이는 843개국이나 늘어난 별정우체국 덕분이었다. 우체국 수를 대폭 늘리는데 기여한 또 하나의 제도가 우편취급국이었다. 1983년 12월에 실시된 이 제도 역시 우체국의 설립과 운영을 민간인에게 맡겼다. 그 점에서는 별정우체국제도와 다를 바 없으나, 우체국의 운영비와 인건비 등 제반 경비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별정우체국과 크게 차이가 났다. 별정우체국은 주로 우편물량이 적은 농어촌에 설치된 데 비해 우편취급국은 비교적 우편물량이 많은 도시지역에 설치된다는 점 또한 달랐다.
한성우체총사
임시우체사제도를
실시하다
1884년 신식 우편제도를 처음 도입한 것은 국내적 필요보다 국제적인 필요에서였다. 19세기 후반, 구미 제국과 문호를 개방한 이래 선진 문물이 밀물처럼 밀려오면서 그들 나라와 주고받아야 할 문서나 사고팔아야 할 상품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이에 비해 중앙정부와 지방관서 간에 주고받는 공문서는 역참제에 따라 전달되고 있고, 개인이 주고받는 신서는 보발이나 인편을 이용하고 있어 우편의 필요성이 그다지 절실하지 않았다. 그 같은 사실을 반영하듯 조선 정부는 우편사업을 개시할 때부터 만국우편연합(UPU)에의 가입을 당연시했다. UPU에 가입해야 세계 각국과 우편 교류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나라가 UPU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을 갖춰야만 했다. 국내적으로는 전국적인 우편망을 형성해야 했고, 국제적으로는 실제로 다른 나라와 우편물 교환을 실시하고 있어야만 했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중단된 우편사업을 다시 시작한 것은 11년 뒤인 1895년이었다. 우정총국 시절과 마찬가지로 한성(서울)과 인천 두 곳에 우체사를 설치하고 그 해 6월 1일 우편 업무를 재개했다. 그처럼 출발은 2개 우체국 사이에 이뤄졌으나, 우체사를 전국으로 확대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우편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농상공부는 그 해 24개 우체사의 설치 예정지를 고시했는데, 실제로 우체사가 세워진 곳은 개성, 수원, 충주, 안동, 대구, 부산 등 8개소에 불과했다.
우체사의 설치는 이듬해로 이어져 1896년 2월에는 공주, 전주, 남원, 나주, 4월에는 평양, 의주, 6월에는 춘천, 원산, 함흥, 해주, 홍주, 경성, 강계 등지로 확대되었다. 이어 진주, 상주, 정주, 경흥 등지에도 우체사가 세워졌다. 서울을 중심으로 지역별로 우편망을 확대해 나갔다. 이로써 경부선, 호남선, 경의선, 경원선을 이루는 네 방면의 기간 선로가 형성된 셈이었다.
당시 우체사를 설치하여 우편업무를 개시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우체사 설치 예정지의 지방관에게 우체사 설치에 협조하도록 지시한 뒤, 우체관원을 파견하여 청사를 마련하고, 사전 답사를 통하여 체송(운송) 노선 및 소요 시간 등을 측정했다. 그들 자료를 근거로 체송법 등 관계 법규를 정한 뒤 우체사의 설치 및 업무 개시를 공고하고 우체관원을 임명하여 예정일에 개국했다.
조선 정부는 우편사업을 재개하면서 UPU 가입을 서둘렀다. UPU에 가입하려면 먼저 국제우편을 실시해야 하므로, 조선 정부는 1899년 1월 1일부터 국제우편을 실시하기로 하고 1897년 4월 30일 그 사실을 UPU 본부가 있는 스위스 정부에 통보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에 설치되어 있는 우체사는 총 25개로 기간 선로를 구축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전국적인 우편망을 구축하려면 한 고을에 우체사 하나씩은 세워야 하는데, 방대한 우편망을 갖추기에는 국가 재정이 너무 빈약했다. 따라서 최소의 비용으로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전국적인 우편망을 형성하기 위해 고안해 낸 것이 바로 임시우체사제도였다.
(좌)홍주우체사현판
(우)구한국시대의 집배원과 전배원
우편업무를
향장에게 맡기다
임시우체사제도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였다. 우편업무를 우체사에서 맡는 대신 지방관에게 맡기는 제도였다. 그것도 지방관에게 직접 맡기지 않고 향장(鄕長)에게 맡겼다. 임시우체사장 자리는 지방관이 맡았으나 실무는 맡지 않고, 향장이 실무자로서 우편업무를 담당케 했다. 임시우체규칙(臨時郵遞規則)에서 규정한 내용을 중심으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우체사 소재지로부터 20리 밖을 우체구외(郵遞口外)로 지정하고, 이 지역에서 임시우체사제도를 실시했다. 둘째, 각 부(府)ㆍ군(郡)에서는 그 지역의 지방관이임시우체사장이 되고 향장이 1개월 동안 우편업무를 실습한 뒤 향장 봉급을 받으며 우편업무를 담당케 했다. 우체사와 임시우체사 간의 우편물을 체송하기 위해 우체사에 임시체전부를 두었다. 셋째, 향장은 지정된 우체사의 관할 아래 우편업무를 수행하고 우표 판매대금의 1할을 수수료로 받았다. 그처럼 임시우체사에서 실제로 우편업무를 담당한 사람은 향장이었다. 향장은 1896년 지방관리직제(地方官吏職制)를 개편할 때 신설된 관직으로 행정관리로서는 매우 독특한 벼슬이었다. 해당 지역에서 7년 이상 거주한 전 향리나 유지 중에서 군수가 지정하여 군민의 동의를 얻어 임명했는데, 군수가 자리를 비울 때는 군의 수서기(首書記)와 함께 군수의 업무를 대행했다. 그 같은 임무를 맡고 있는 향장에게 한 달 동안 우편업무를 실습케 한 뒤 고장의 우편업무를 맡겼던 것이다. 임시우체사제도는 1898년 4월 1일 경기도로부터 실시했다. 이어 5월 15일에는 충청남북도, 황해도, 강원도, 6월 1일에는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로 확대했다.
그처럼 임시우체사제도라는 편법을 동원해 1년 동안에 전국의 군 단위까지 우체사를 설치함으로써 전국적인 우편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한성우체총사가 취급한 우편물 수가 이 제도의 실시 직전인 1898년 3월에 1만7123통이던 것이 실시 직후인 10월에는 5만 3124통으로 세 배 이상 급증했다는 사실에서 그 제도의 실시 효과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임시우체사제도는 일시에 전국적인 우편망을 형성하기 위해 실시한 잠정적인 조치였으나, 점진적으로 제도를 개선하면서 우체관서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00년 통신원(通信院)이 발족하면서 이듬해부터 임시우체주사를 임명하여 향장의 역할을 대신하도록 했다. 새로운 인원을 채용하기보다 3년간 우편 업무를 담당한 향장을 임시우체주사로 임명하여 그 일을 계속하도록 했다. 그 결과 1905년까지 전국의 342개 임시우체사 중 197개사의 향장이 임시우체주사가 되었다.
1903년 임시우체사에 임시체전부를 2명씩 배치했다. 이어 1904년에는 임시우체세칙(臨時郵遞細則)을 제정하여 임시우체사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세칙의 주요 내용은 임시우체사를 구성하고 있는 사장, 주사, 체전부의 임무를 규정하는 한편, 일반 우체사와 마찬가지로 임시우체사의 운영 경비를 지방 공금에서 환용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이 조치에 따라 임시우체주사도 월 8원의 봉급을 받게 되었고, 임시체전부에게도 봉급을 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법 규정과 현실은 달랐다. 우체사의 운영 경비를 지방 공금에서 환용하기로 한 제도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아 체전부의 봉급을 지급하지 못하는 등 우체사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향장의 문제점이
나타나다
임시체전부를 두기 전까지 군내에서의 우편물 배달은 면장이나 이장, 면주인(面主人) 등이 맡았다. 면주인이란 조선시대 군ㆍ현과 면 사이를 오가며 공문서를 전달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면장이나 이장, 면주인은 우체사에 소속된 직원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우편물이 제대로 전달될 리 없었다. 우편물을 늦게 배달하거나 아예 배달하지 않는 사례가 빈번했다. 우표 판매대금을 횡령하거나 별도의 배달료를 요구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와 같은 우편물 배달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1902년부터 전국 임시우체사에 임시체전부를 배치하려 했으나, 봉급을 지급할 재원을 확보하지 못해 이듬해로 미뤘다. 그 뒤 1904년 임시우체세칙이 제정됨에 따라 임시우체사의 운영 경비를 마련할 수 있게 되면서 임시체전부를 배치할 수 있었다.임시우체사제도는 그처럼 빠른 시일 내에 전국의 각 고을에 우체사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으나, 주민들에게 유용한 제도로 정착하는 데는 실패했다. 우편 업무와는 거리가 먼 향장에게 우체사 운영을 맡길 때부터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문제였다. 향장의 잦은 교체가 문제점을 가중시켰다. 향장은 군수가 임명하므로 군수가 바뀔 때마다 향장이 바뀌었고, 우편업무 이외의 일로 자주 교체되기도 했다. 실시 첫해인 1898년 12월 16일 자 제국신문(帝國新聞)은 그 제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각 도 각 군 향장으로 우체 사무를 보게 한 후로 인민들이 우체로 편지를 부치는 사람이 허다한데, 편지가 향청에 가게 되면 향장들이 생각하기를 편지가 향청으로 오는 것인 줄로만 알고 각 면 각 동에 분전하는 법은 규칙에 없는 줄만 알고 그러한지, 촌사람이 편지 받아 보았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고, 혹 전하였다는 말을 들은즉, 편지를 떼어 보기도 하고 신문을 떼어보기도 한 후에 먼저 부친 신문이나 편지를 나중 전하고 나중 부친 신문이나 편지를 먼저 전하기도 하고, 또 등기우표란 것은 돈을 더 주고 회답 보려고 부치는 것인데, 등기우표를 부친 지가 과한이 되어도 회답이 없다고 시비들이 대단하니, 농상공부 통신국에서는 이런 소리도 듣지 못하는지 장정이 본래 그러한지, 좀 정신들을 차려 각 도 향장들을 별도로 단속하였으면 매우 좋을 듯하다고들 한다더라.” 1898년부터 실시된 임시우체사제도는 그 제도가 채 정착되기도 전에 일본 우편국으로 편입되었다. 1905년 통신권을 강탈한 일본은 우리나라 통신기관을 한국에 있는 일본 우편국과 통합했다. 그때 임시우체사는 임시우체소라는 이름으로 일본 우편국에 편입되었다. 그 뒤 1906년 12월 우체소로 개칭되었고, 일부는 우편취급소로 개편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