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과 칼로 싸우는 옛날식 전쟁이든 총과 폭탄으로 싸우는 현대전이든 전쟁을 수행함에 통신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적정을 탐지하여 알리거나 아군 간에 정보를 교환함에 있어 가장 편리한 수단이 통신이기 때문이다.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에는 적정을 탐지하기 위해 간첩이나 척후병을 파견했고, 그들이 수집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비둘기를 이용하기도 했다. 전신이 발달하고 전화가 발달하면서 정보의 전달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고,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실시간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6·25전쟁에서도 통신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군대에서 사용하던 주요 통신 수단은 무전기와 전화였다. 그런데 군사우편제도가 실시되면서 우편이 또 다른 통신수단으로 등장했다. 전신과 전화가
아군 간의 정보 교환이나 적정을 탐지하고 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면, 군사우편제도는 전방의 장병과 후방의 가족을 연결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일선 장병들에게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을 전달함으로써 그들의 불안감을 덜어주고 사기를 북돋아 주는 심리전의 일환으로 실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 NARA, 사진제공. 눈빛출판사
국방부의 요청으로
군사우체국을 설치하다
군사우체국은 6·25전쟁이 일어난 지 3개월째인 1950년 9월 22일에 처음 설치되었다. 부산에 세운 야전우체국이 그 효시였다. 당시 국군과 UN군은 대구와 부산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 공산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군사우체국을 설치해 달라고 먼저 요청한 것은 국방부였다. 국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군사우편제도를 실시해 달라고 했다. 출정 군인과 가족 사이에 연락이 끊기면 군인의 사기가 저하되므로 전방의 장병과 후방의 가족이 편지를 주고받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전시인 만큼 군사우체국의 설치 문제를 놓고 우물쭈물할 수는 없었다. 군사우편제도를 실시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 시급했다. 체신부는 국방부와 공동으로 ‘야전우체국 설치와 군사우편 취급에 관한 건’을 상정하여 긴급히 소집한 임시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부산에 야전우체국을 설치했다.
처음에는 육군과 해군의 사단급 이상의 부대에만 야전우체국을 설치하기로 하고, 대구에 육군중앙야전우체국을, 부산에 해군중앙야전우체국을 세웠다. 당시에 설치한 야전우체국은 육군에 13개국, 해군에 5개국이었다. 문자 그대로 야전우체국인지라 일반 우체국에서 취급하는 모든 우편 업무를 취급할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제1종 우편물인 편지와 제2종인 우편엽서만 취급했다. 공용 소포우편물도 취급했다. 공용 소포우편물로 대표적인 것이 입대 장정 소포우편물이었는데, 이는 입대 당시 장정이 착용한 옷을 본가로 보내기 위해 발송하는 소포였다. 1950년 11월에는 국군과 UN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체신부는 북한으로 조사단을 파견하여 평양과 원산에 각각 중앙야전우체국을 설치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하게 되면서 곧 폐지되었다.
야전우체국을
군사우체국으로
개편하다
1951년으로 접어들어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육군과 해군, 공군 간에 유기적인 군사우편 업무가 요청되었다. 그런데도 그때까지 군사우편제도를 뒷받침할, 법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아 일제강점기의 군사우편법을 적용하고 있었다. 그 해 4월 새로 만든 군사우편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이어 시행규칙이 마련됨에 따라 군사우편제도가 법제화되었다.
다시 그 해 11월에는 야전우체국제도를 폐지하고 육군중앙야전우체국을 군사우체국이라 개칭하게 되었다. 동시에 해군중앙야전우체국과 각 부대에 설치한 야전우체국을 군사우체국 파견국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 군사우체국 산하의 파견국은 모두 20개였는데, 군사우체국이 각 파견국을 지휘 감독했다.
1953년 2월 체신부 우정국에 군사우편과와 검열과를 신설하면서 그동안 국내우편과에서 관장했던 군사우편 업무를 군사우편과에서 맡게 되었다. 또한 군사우체국 파견국이라 부르던 우체국을 승격시켜 군사우편 업무를 취급하는 우체국은 모두 군사우체국이라 불렀다. 군사우체국이라 해서 우편에 관한 모든 업무를 우체국 직원이 담당했던 것은 아니다. 우편물의 수집과 배달은 각 부대의 연락병이 맡았다. 일선에서는 우편물의 운반도 우체국에 맡기지 않고 부대 차량을 이용했다. 따라서 연락병이 도착하면 각 부대의 장병들은 집배원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우편행낭을 실은 차가 도착하면 장병들은 기대에 찬 눈으로 우편행낭을 둘러쌌어요. 그러다 자기에게 온 편지가 있으면 편지를 받아들고 어린애처럼 춤을 추며 반겼어요. 반면에 편지를 받지 못한 병사들은 풀이 죽은 얼굴로 돌아가곤 했어요.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선 장병들의 낙이 뭐가 있었겠어요. 후방에 있는 가족들의 소식을 듣는 게 유일한 낙이었죠.” 군사우편 업무로 잔뼈가 굵어 우정국 군사우편 과장까지 지냈던 손승록의 말이었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독 속에 사는 장병들이 가족의 소식에 얼마나 목말라 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군사우편제도는 군부대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으면 원활하게 운영될 수 없었다. 초창기에는 체신부나 국방부 쌍방이 그 업무에 미숙했기에 원만한 제휴가 이뤄지기 어려웠다. 따라서 우체국 직원들의 노고가 클 수밖에 없었다. 1952년 6월 중장 백선엽이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하면서 변화가 있었다. 군대 쪽에서 깊은 이해를 하고 적극 협조했기에 군사우편제도가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1953년 12월 제1야전사령부의 창설과 함께 사령관으로 전보되었는데, 일선 지휘관 시절에도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 공로를 표창하기 위해 체신부는 장관 감사패를 수여하는 한편 무용단을 파견하여 장병들을 위문했다.
군사우체국
군사우체국 창설 10주년 기념 일부인
월남전 때 이용량이
가장 많았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군사우편제도가 정착됨에 따라 군사우체국에서 취급하는 업무도 점차 늘어났다. 제1종과 제2종 우편물에 이어 제3종과 제4종 우편물인 정기간행물과 서적도 취급했다. 등기와 소포우편물도 취급했다. 환금(換金)과 저금 업무도 취급했다. 일부 군사우체국에서는 전보 업무를 취급하기도 했다. 소포우편물은 입대 장정 소포우편물과 위문 소포우편물에 한해 취급했다.
그렇다면 군사우편은 어느 쪽이 더 많이 이용했을까? 일선의 장병일까, 후방의 가족일까? 군사우편의 이용 실태를 살펴보면 접수물량이 배달물량보다 훨씬 많았다. 일선 장병이 보낸 우편물이 후방 가족이 보낸 우편물보다 많았던 것이다. 통상우편물의 경우, 접수물량이 배달물량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군인들이 그만큼 외롭고 가족을 그리워했음을 보여주는 통계라 하겠다. 하지만 등기나 소포우편물의 경우, 배달물량이 접수물량에 비해 2~3배나 많았다. 군사우편 이용량이 가장 많은 것은 월남전 시절이었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휴전이 성립된 1950년대는 군사우편의 연간 이용량이 많아야 3,000만 통이었다. 월남 파병이 본격화한 1960년대 후반에는 그 숫자가 부쩍 늘어 5,000만 통에 육박했다. 월남 파병이 끝나면서 그 숫자가 급격히 줄었다.
군사우편은 일반 우편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편지 겉봉에 ‘군사우편’이라 표기하게 되어 있는 군사우편은 무료였다. 물론 일선 장병이 이용하는 우편물이 무료였다. 군사우편법 2조는 전방에서 발송하는 우편물은 그 요금을 면제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우편물이 무료인 것은 아니었다. 등기나 소포우편물은 유료였고, 일반 우편물도 발송 일자나 지역에 따라 유료로 하는 경우가 있었다. 한때는 강릉·홍천·서울·인천을 연결하는 선 이북지역은 무료 취급지역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전방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만 무료 취급을 인정하려 했던 것이다. 그처럼 가급적 체신부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군 장병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긴 했으나, 군사우체국을 운영하고 우편물을 발송·운반하는 부담은 고스란히 체신부가 떠안았다. 1965년 군사우편법을 개정하여 우편요금의 절반을 받기로 했다. 장병에게 직접 받는 대신 국방부로부터 받았다. 국방부가 전체 이용량을 계산하여 체신부에 일괄 납부했다.
군사우편 외에 선거우편도 무료였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가 있는 해에는 무료우편물이 급증했다. 많은 해에는 전체 우편물의 15%나 되었다. 적자사업인 우정사업의 경영 측면에서 볼 때 그대로 방치하기 어려운 수치였다. 그래서 우편요금을 절반만 받기로 했던 것인데, 장병들이 발송하는 우편물량에는 큰 변화가 없는 데다 우편요금은 계속 오르고 있어 체신부의 부담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었다. 체신부가 전쟁 기간은 물론 그 뒤로도 꾸준히 국토방위와 국가 안전을 위해 그만큼 기여한 셈이었다.
둘째, 군사우체국은 일종의 이동우체국이었다. 현재는 대부분의 군사우체국이 일정한 장소에 고정되어 있지만, 전쟁 중에는 군사우체국이 군대와 함께 이동했다. 1개 우체국에 3명 정도인 직원은 군복을 입고 군대와 같이 행동했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사고 위험을 안고 있었다. 간혹 순직자가 생기기도 했다. 셋째, 군사우체국의 국명 표기는 문자로 하지 않고 우편번호와 같은 숫자로 했다. 그러다 보니 발송인이 오기하는 경우가 많아 주인을 찾는데 애를 먹기도 했다.
판문점에서
포로우편물 교환이
이뤄지다
군사우편과 유사한 제도로 포로우편제도가 있었다. 포로우편도 6·25전쟁의 산물이었다. 6·25전쟁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공산군에 납치되고 국군이 붙잡혀 갔다. 공산군으로서 포로가 된 자도 많았다. 그런가 하면 멀쩡한 남한 청년이 소위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공산군에게 끌려가다 포로로 붙잡히기도 했다. 그런 포로들이 보낸 우편물이 바로 포로우편물이었다. 포로우편물 교환은 만국우편조약에서도 인정하는, 인간의 기본권에 해당하는 제도였다. 만국우편연합(UPU) 회원국이 교전 상태에 이르게 되면 일정한 매개국을 선정하여 포로우편물을 교환하는 것이 국제적인 관례였다.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고 10만 명이 넘는 포로가 수용되자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북한지역으로 보내는 우편물은 나중에 처리하더라도 남한 내에서 보내게 되는 우편물은 우선적으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포로우편물은 관례대로 무료로 처리하기로 하고, 포로에게 보내는 우편물이나 포로수용소에서 보내는 우편물은 모두 부산우체국을 통하도록 했다. 일반인이 포로에게 보내는 우편물은 우편요금을 받았다. 북한과의 포로우편물 교환도 오래 미룰 수는 없었다.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포로우편물을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1952년 1월 판문점에서 남북 간에 최초로 포로우편물 교환이 이루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