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광복 이후의 우체국 수의 변동 추세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광복을 맞이한 1945년에서 6·25전쟁이 진행 중인 1952년까지는 우체국 수가 매년 줄고 있었다. 1945년 692개국이던 남한의 우체국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인 1948년에는 625개국, 6·25전쟁 중인 1952년에는 587개국으로 계속 감소했다. 해방 직후의 남한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운 데다, 6·25전쟁으로 상당수 우체국이 파괴된 결과였다. 미군이 통치하는 미군정 시절에는 주로 우체국 수를 줄이는 정책을 펼쳤다. 1946년 6월에는 45개 우체국의 문을 닫았는데, 그중 30개국이 서울과 부산, 인천, 대구 등 대도시에 있는 우체국이었다. 폐지된 우체국의 업무는 가장 가까운 지역에 있는 우체국으로 넘겨졌다. 이듬해인 1947년에는 다시 21개국을 폐국했다. 그처럼 해마다 우체국 수를 줄인 것은 국가 재정이 빈약하여 우체국을 제대로 운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기간에 새로 생긴 우체국이 하나 있었다. 1946년 5월에 설치한 인천우편국 연평도임시출장소였다. 명칭 그대로 임시출장소여서 정식 우체국으로 부르긴 어려웠으나, 섬마을인 연평도 도민을 위해 우편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했던 것이다.
문경 가은이
첫 번째 설치 대상이 되다
8·15광복 당시 남한의 우체국 분포율은 3.5개 면에 1국일 정도로 매우 낮았다. 미군정 시절에는 66개국을 폐지했으니 분포율이 더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우체국 보급에 대한 정책이 바뀌었다. 초대 우정국장 최재호는 우체국 증설을 체신부의 중요한 정책 목표로 내걸었다. 그는 초대 윤석구 장관에게 우체국 증설이 우편사업의 첫 번째 당면 과제라 역설하며 1면1국주의를 체신부의 시정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1면1국주의란 1개 면에 우체국을 하나씩 세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장관이나 우정국장이 1면1국주의를 외친다 해서 우체국이 곧바로 늘어날 수는 없었다. 정부 수립 당시처럼 경제 사정이 어려운 시기에는 정부 예산을 투입해 우체국을 세우긴 어려웠다. 우체국을 설치하되 선별적으로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우체국이 반드시 필요한 도시 지역은 체신부 예산으로 설치하되, 그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은 지방의 경우에는 우체국 청사나 비품 등의 시설 일체를 그 지역에서 부담해 준다는 조건으로 설치하기로 했다. 그것도 완급을 가려 순차적으로 설치하기로 했다. 그동안 우체국을 설치해 달라는 진정서를 보내온 지역은 여러 곳 있었다. 대표적인 지역이 문경군 가은면, 여수군 남면, 무주군 설천면, 울주군 하상면, 괴산군 청안면 등이었다. 이에 대해 체신부는 현지 실시를 한 뒤 우선순위에 따라 설치하기로 했다. 현지 실사는 체신청(현 지방우정청)에서 담당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전국을 대상으로 선정 작업을 해야 하기에 본부에서 직접 맡기로 했다.
그들 지역 중에서 첫 번째로 선정된 것이 문경 가은이었다. 가은은 탄광으로 유명한 가은광산의 소재지여서 우체국 설치가 일제강점기 때부터 주요 현안으로 대두되어 있었다. 본부 직원을 파견해 확인한 결과 우체국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곳이었다. 더구나 그 지역에서는 청사와 비품은 물론, 전신전화시설 일체를 부담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그 같은 지역 주민들의 열의를 확인하자 가은우체국을 첫 번째 설치 대상으로 정하고, 세부적인 개국 준비는 부산체신청에 일임했다. 우체국 청사는 당시 점포로 사용하고 있는 개인 소유의 기와집을 개축하여 사용하기로 했다. 전신전화시설을 설치하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므로 우선 우체국부터 개국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우편과 보험 업무부터 취급하기로 하고, 개국 일자를 1949년 4월 1일로 잡았다.
궁여지책으로
면사무소에 우체국 간판을 내걸고
개국하다
체신부 장관을 대신하여 우정국장 최재호가 개국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광복을 맞이하고 나서 우리 손으로 설치하는, 첫 번째 우체국이니만큼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최재호는 김천을 거쳐 점촌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서 이튿날 개국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김천역에는 김천우체국장을 비롯하여 인근 우체국장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그들과 김천우체국으로 자리를 옮겨 환담을 나누었는데, 개국식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점촌행 기차를 타고 가는데, 국장들의 표정이 갈수록 굳어지고 있었다. 점촌에 도착하자 마침내 점촌우체국장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이튿날 개국식을 개최하기로 한 우체국 청사가 아직 준비되지 않아 행사를 열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화가 잔뜩 치민 최재호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며 본부와 부산체신청 관계자들을 다그쳤다. 우정국 실무자는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부산체신청의 보고를 받고 개국일을 잡았다고 했다. 부산체신청 실무자는 현지로 출장 갔을 때 비품 등은 준비하고 있었고, 청사는 창구시설만 갖추면 되겠기에 예정일까지 완료될 것이라는 판단에서 그렇게 보고했다고 했다. 다만 출장비 부족으로 최종 확인 과정을 생략한 것이 불찰이라 했다. 점촌우체국장의 설명을 들어보니, 비품 등 나머지 준비는 끝났는데, 가옥 소유주와 기성회 간에 가격 조정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아 창구시설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재호는 마중 나온 문경군수 채문식에게 화풀이를 했다. 지방 측의 무성의를 나무라며 모든 일은 군수가 책임져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전혀 내용을 모르고 있던 채문식은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청사 문제를 빠른 시일 안에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체신사업에 협조하지 않는 지방에는 앞으로 우체국 신설은커녕 기존 우체국의 확장이나 개량도 일절 하지 않겠소.” 최재호는 쉽사리 화를 풀지 않으며 엄포를 놓았다. 현지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고 개국 일자를 며칠 늦추었다면 조용히 끝날 일이었다. 우체국장들은 최재호에게 그들이 책임지고 해결할 테니 그냥 상경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최재호의 입장은 달랐다. 이미 정해진 개국 일자를 미룰 수는 없었다. 가은우체국의 개국 일자는 이미 공시되었고, 신문에 보도된 바도 있어 개국식을 미룰 수는 없었다.
최재호는 문제의 청사 대신 면사무소에 임시 우체국을 세우는 방안을 생각해 냈다. 청사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면사무소에 임시 우체국을 설치하여 우편 업무를 시작하기로 하고, 우선 면사무소에 우체국 간판을 달고 예정대로 이튿날 개국식을 갖자고 제의했다. 굳이 면사무소에 임시 우체국을 세우려 했던 것은 군수 이하 지역 주민들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약관 23세에 문경군수가 되어 뒷날 국회의장까지 지낸 채문식은 사리판단이 빨랐다. 그는 최재호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이며, 면 회의실를 임시 우체국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야간작업을 시켜 우체국 창구시설을 갖추도록 했다. 그리하여 이튿날 무사히 개국식을 열 수 있었다. 덕분에 말썽을 부렸던 가은우체국 청사 문제는 곧 해결되었다. 우정국장 최재호는 그처럼 군수까지 동원해 가며 체신부 돈을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우체국을 세워 나갔다. 당연히 체신부 예산으로 건물을 사고 비품을 구입해 우체국을 설치해야 함에도 국가 재정이 빈약한 시절이어서 그 같은 원칙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우편과 전신, 전화는 물론 금융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우체국은 지역 주민들의 복지 증진에 크게 기여하는 기관이어서 국가 재정이든 민간 자본이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 세울 수 있다면, 우체국을 설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박수갈채를 받던 시절이었다.
여수 여남우체국
개국에 얽힌
이야기
가은우체국 문제를 해결하고 나자, 여수군 남면에 우체국을 설치해 달라는 진정서가 날아왔다. 여수군수, 경찰서장, 우체국장을 포함해 그 지역의 유지 일동의 이름으로 보낸 진정서의 요지는 여수군 남면 우학리에 우체국을 세워 달라는 것이었다. 만일 우학리에 우체국을 새로 세울 수 없다면, 같은 면에 있는 안도우체국을 우학리로 이전해 달라고 했다. 안도의 경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많이 거주했고 어업이 성하여 우체국 이용이 많았으나, 현재는 어업도 부진하고 우체국 이용도 낮아 폐국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여수가 여수시와 여천군으로 분리되기 전이어서 여수 일대를 관할하는 행정구역은 여수군이었다.
여수군 남면은 35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섬마을인데, 그중에서 가장 큰 섬이 우학리가 자리 잡고 있는 금오도이고, 금오도 남동쪽으로 조그맣게 붙어 있는 섬이 안도였다. 안도에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우체국은 물론 무선국 시설도 설치되어 있었다. 진정서의 내용을 살펴본 우정국장 최재호는 안도우체국을 우학리로 옮기고, 무선국 시설은 가급적 살리기로 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안도 주민들이 맹렬히 반대했다. 그들은 장관 측근부터 설득했다. 장관 비서실장이 느닷없이 그 문제를 거론하며 우정국의 처사를 비난했다. 이미 합의 문서에 도장을 찍고 난 전무국장이 난데없이 그 내용을 검토할 기회가 없었다며 재검토하자고 했다. 그러나 안도에 무선국 시설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분국이나 출장소 형식으로 존치시킬 수 있어 문제될 게 없었다. 상공부 수산국에서도 이의를 제기했다. 어업 문제로 볼 때 안도가 더 중요한 위치에 있으므로 우체국을 우학리로 옮기는 데 반대한다며 이전을 철회해 달라고 했다.
최재호는 안도 주민 대표들을 만나 설득했다. 여수군수, 경찰서장, 우체국장 등이 안도보다 우학리 지역이 우체국 설치의 적지라 했고, 체신부가 조사한 결과도 같으니 대국적인 입장에서 협조해 달라고 설득했다. 그러자 그들이 돌아간 지 며칠 안 되어, 여수군수와 경찰서장, 지방 유지들이 서명한 반대 진정서를 들고 다시 찾아왔다. 지난번에는 그 지역 대표들의 일방적인 말을 듣고 진정서에 날인한 것이고, 군수와 서장의 속마음은 우체국 이전에 반대하는 것이라며 우체국을 이전하지 말아 달라고 강경하게 요구했다. 우체국을 이전시키는 데 대한 주민들의 반응이 그처럼 민감했다.
이에 대해, 최재호는 어업 문제를 고려하여 무선국 시설만큼은 안도에 존속시킬 것이니 더 이상 반대운동을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끝내 협조하지 않고 분규를 일으킨다면, 안도우체국을 완전히 폐국하겠다고 경고했다. 그처럼 체신부와 안도 주민들 간의 실랑이는 길게 이어졌다. 드디어 1949년 8월 15일, 여수군 남면 우학리에 우체국이 세워졌다. 이름하여 여남우체국. 안도우체국은 폐국되었고, 안도에 있는 무선국 시설은 목포무선국출장소라는 이름으로 존치되었다. 주민들의 소원이 그처럼 간절했다면, 안도에 있는 우체국은 그대로 두어두고 이웃에 있는, 훨씬 큰 섬에 우체국 하나 더 지어 주었으면 될 것 같은데, 나라 살림이 어렵다 보니 그처럼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