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날, 정보통신의 날’
달라진 기념행사
지난 4월 19일 ‘과학기술인·정보통신인 한마음대회’가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렸다. 제목만으로 본다면 과학기술인과 정보통신인들이 모여 단합대회를 개최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했으나, 제목 위에
‘제46회 과학의 날, 제58회 정보통신의 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 그 행사가 단순한 단합대회가 아닌 기념행사임을 알게 했다. 그 자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창조경제를 통해 대한민국의 더 큰 미래를 열어갈 것”이라고 강조한 뒤, 미래창조과학부의 현판 제막식에 참석해 현판을 제막했다. 행사는 미래창조과학부와 방송통신위원회가 같이 주최했다. 예년에는 과학의 날과 정보통신의 날 행사를 따로 개최했는데, 예전의 정보통신부와 과학기술부가 미래창조과학부로 융합하면서 기념행사도 한 날 같이 치르기로 했던 것이다. 우정사업본부는 별도의 행사를 열지 않고 이 행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갈음했다.
앞으로 이 행사가 어떻게 치러질지 예측하긴 쉽지 않다. 과학의 날과 정보통신의 날을 어우르기 위해 부제와 같이 붙이는 것은 불가피하겠지만, ‘과학기술인·정보통신인 단합대회’라는 제목을 계속 사용하긴 어려울 것이다. 기념일의 명칭에 단합대회라는 용어를 사용함은 적절한 선택이라 할 수 없다. 보다 적절한 용어가 없다면 차라리 ‘제46회 과학의 날/제58회 정보통신의 날’이라는 부제를 제목으로 내세워도 좋을 것이다.
그럴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날짜다. 과학의 날과 정보통신의 날을 피하다 보면 엉뚱한 날이 채택될 수도 있다. 그보다는 두 날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이다. 두 날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어느 날을 택해야 할까? 과학의 날은 1967년 4월 21일 과학기술처가 중앙행정부처로 발족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것이고, 정보통신의 날은 1884년 4월 22일 고종이 우정총국을 설치하라는 교지를 내린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날이었다. 후자의 경우, 1956년 제정할 당시에는 ‘체신의 날’이라 불렸다. 우정총국은 신식 우편제도를 실시하기 위해 설립한 기구로서 우리나라 통신의 뿌리인 동시에 서구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도입하기 위한 개화의 첫 작품이었다. ‘체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당시의 통신사업은 우편과 전신·전화는 물론 전기와 해운, 기상까지 아우르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모체였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의 날을 1884년으로 거슬러 오르도록 함이 보다 바람직한 선택이 될 것이다.
체신의 날을 언제로 하느냐를
놓고 의견이 양분되다
체신부에서 ‘체신의 날’을 제정하자고 공식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이었다. 물론 그전에도 체신기념일을 만들자고 논의한 적이 있었다. 1950년 1월 ‘UPU 가입 50주년’ 행사를 치르고 나자, 체신부 간부들은 체신기념일을 제정해 연례행사로 하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구체적으로 그 날을 언제로 해야 하느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8·15광복일로 하느냐, 일제로부터 체신사업권을 이양받은 날로 하느냐, 신식 우편제도를 시행한 날로 하느냐, 서울과 인천 간에 전신이 개통된 날로 하느냐며 갑론을박했다. 하지만 곧이어 6·25전쟁이 터졌기에 그 같은 논란은 무의미하게 되었다. 체신부 내에서도 ‘체신의 날’ 제정을 공식적으로 제기한 부서는 우정국이었다. 우정국에서 처음 건의할 때는 ‘체신의 날’이 아닌 ‘우정기념일’이었다. 명칭이 어떻든, 특별한 기념일을 정해 우수 직원을 표창하고 장기 근속자를 위로하자는 것이 그 취지였다. 1956년, 체신부 간부회의에서 우정기념일의 제정 문제가 공식적으로 논의되었다. 기념일을 정하자는 데 대해 반대하는 간부는 없었다. 하지만 우정기념일로 국한하자는 데는 다들 반대했다. 체신사업 전체로 범위를 넓혀 ‘체신의 날’로 정하자고 했다. 그리고 신식 우편제도를 시행한 날을 기념일로 정하자는 데까지는 쉽게 합의했다.신식 우편제도를 시행한 날이 언제냐부터 헤매기 시작했다. 당초 우정국에서 제시한 안은 우정총국 개국식을 거행한 날로 갑신정변이 발생한 10월 17일(양력 12월 4일)을 기념일로 삼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안에 대해 별 이의가 없었다. 그런데 한 간부가 “갑신정변은 우정총국 청사인 옛 전의감(典醫監) 건물의 개수공사가 끝나 그 낙성을 축하하는 연회가 베풀어졌을 때 일어난 것인데, 그 날 개국식을 거행한 게 맞지 않지 않느냐”며 이의를 제기하자 혼란에 빠졌다. 그 날의 행사가 개국식인지 낙성식인지 분명치 않았던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체신사(遞信史)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져 있지 않아, 우정총국의 업무 개시를 언제 했는지, 개국식은 언제 했는지,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는 언제 발행했는지, 제대로 정리된 기록이 없었다.
업무 개시일이냐 청사 준공일이냐를 놓고 의견이 양분되자, 신식 우편제도를 도입할 당시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다시 고찰하기로 했다. 그 결과 기념일로 삼을만한 네 가지 역사적 사실이 밝혀졌다. 첫째는 우정사(郵程司)의 설치였다. 우편과 전보를 담당할 기관으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소속하에 우정사를 설치했는데, 그 날이 바로 1882년 12월 5일(양력 1883년 1월 13일)이었다. 그때 홍영식이 우정사 협판으로 임명되었다. 둘째는 우정총국(郵征總局)의 개설 명령을 내린 날이다. 고종은 1884년 3월 27일(양력 4월 22일) 신식 우편제도를 전담할 기관으로 우정총국을 설치하라는 전교를 내리고 홍영식을 총판으로 임명했다. 셋째, 1884년 10월 1일(양력 11월 18일) 구 전의감 건물에서 우정총국이 우편 업무를 개시했다. 넷째, 1884년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우정총국 총판 홍영식이 청사 준공식을 거행하고 축하연을 개최했다. 그 같은 네 가지 사실을 놓고 논의를 거듭했지만, 역시 업무 개시일이냐 축하연 개최일이냐로 의견이 양분되었다.
갑신정변으로
널리 알려진 날을
기념일로 정하다
그 문제를 놓고 체신부 간부회의에서 다시 논란이 벌어졌다. 그러자 차관 최재호가 ‘체신의 날’을 어느 날로 하느냐보다 제정 자체에 뜻이 있으므로 양력 12월 4일로 하자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12월 4일 우정총국 청사 낙성식에 국내의 많은 고관과 외교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화파의 중진인 우정총국 총판 홍영식의 주재로 신식 우편제도 개시를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고, 이에 편승해 개화파 정객들이 정변을 일으켰다는 것은 일반 국민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 날의 축하연이 우편업무 개시 관련이든 청사 준공 관련이든, 체신사업은 이와는 관계없이 언제나 문명 개화의 선구로서 사회의 첨단에서 활동해야 할 사명을 띠고 있어요. 이런 점에서 큰 의의를 발견할 수 있으므로 갑신정변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12월 4일을 ‘체신의 날’로 정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가며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은 엄격히 말해 8월 15일이라 단정하기 어렵다.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된 것은 7월 17일이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취임식을 거행한 것은 7월 24일이었고, 초대 내각이 구성된 것은 8월 5일이었다. 첫 국무회의는 8월 6일 개최되었다. 그리고 미군정으로부터 행정권 이양을 마친 것은 9월 13일이었다. 그럼에도 뜻깊은 8월 15일 광복절을 택해 정부 수립 선포식을 가졌기에 이날을 기념일로 삼았던 것이다. 10월 1일은 결코 국군이 맨 처음 창설된 날이 아니었다. 그 날은 국군이 38선을 돌파해 북한으로 진격한 날이었다. 원래 우리 육ㆍ해ㆍ공군은 따로따로 창설일을 정해 제각기 기념행사를 가졌다. 육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가 창설된 것은 1946년 1월 15일이었다. 그래서 육군은 그 날을 창설일로 삼았다. 해군은 해군의 뿌리인 해방병단이 만들어진 날인 1945년 11월 11일을 창설일로 삼았고, 공군은 육군으로부터 분리된 날인 1949년 10월 1일을 창설일로 삼았다. 그럼에도 1956년 정부는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한 날을 ‘국군의 날’로 정했고, 이에 대해 이론을 제기한 사람은 없었다. 최재호의 주장에 따라 ‘체신의 날’은 12월 4일로 정해졌다. 1956년 6월의 일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4월 19일
미래창조과학부 현판 제막식에 참석해
현판 제막을 하고 있다.
제삿날을
생일로 삼을 수는 없다
그 문제가 재론된 것은 1972년 신상철 장관 시절이었다. 그리고 12월 4일이라는 체신의 날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장관도 우정국장도 아닌, 총무과 상전계장 이계철이었다.
사무관 이계철은 1967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체신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당시로서는 유망주였다. 그가 지적한 문제점은 제삿날을 생일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12월 4일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날이고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남에 따라 우정총국이 문을 닫았으니 제삿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 날을 생일로 정한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와 같은 판단에서 그는 체신의 날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사무관에 불과했으나, 총무과 상전계장은 체신부 행사업무를 담당하는 자리여서 당연히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었다. 그 문제가 다시 체신부 간부회의에서 논의되었다. 간부들이 이계철을 불러 놓고 체신의 날을 바꿔야 할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제삿날을 생일로 삼을 수는 없다고 했다. 그의 주장에 따라 체신의 날을 바꾸기로 했다. 그러나 어느 날로 바꾸느냐는 것은 간부회의에서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결국 그 과제가 상전계장 이계철에게 떨어졌다. 역사에 대한 전문 지식이 있든 없든 기념일을 정하는 것은 실무자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전문가 집단인 국사편찬위원회에 문의했다. 위원회에서 내린 결론은 고종이 우정총국을 설치하라는 전교를 내린 양력 4월 22일이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체신의 날은 그렇게 4월 22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1972년의 체신의 날 행사는 생략하고, 1973년부터 4월 22일에 체신의 날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다. 1994년 12월 체신부의 명칭이 정보통신부로 바뀜에 따라 ‘체신의 날’도 ‘정보통신의 날’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우정사업본부는
고유의 생일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4월 22일을 정보통신의 날로 받아들이기엔 어딘지 떨떠름한 면이 있다. 4월 22일은 우정총국을 설치한 날도 아니고 우편사업을 시작한 날도 아니었다. 우정총국을 설치하라는 고종의 칙령이 내려진 날에 불과했다. 그렇게 본다면 큰 의미가 있는 날은 아니었다. 보다 깊이 있는 검토 과정을 거쳤다면 우편사업 개시일인 11월 18일로 정함이 마땅했음에도 체신부의 내부적인 논의도 없이 그 날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정보통신의 날이 제정된 지 어언 57년이 지났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그 날짜를 언제로 정하느냐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최재호의 주장대로 체신의 날을 언제로 하느냐는 것보다 제정 자체에 의미를 둔다면, 어느 날이냐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의 각 기관은 기관의 특성에 맞는 기념일을 가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래전부터 독자적인 운영체제를 갖추고 있는 우정사업본부 역시 그 특성에 맞는 기념일을 가져야 할 것이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정부 조직이 개편되고, 정부 조직이 개편됨에 따라 기념일마저 바뀌는 관행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고유의 기념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게 본다면 우정사업본부의 생일로는 최초의 우편사업 개시일인 11월 18일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