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사업은 언제나 적자사업이었다. 우체국에서 전신·전화 업무를 같이 취급하며 전기통신사업과 한솥밥을 먹던 시절에도 적자였고, 한국통신(KT)의 설립으로 전기통신사업이 떨어져 나간 뒤 체신예금·보험과 한집 살림을 하던 시절에도 적자였다. 우편사업이 적자인 것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우편사업은 적자였다. 나라에 따라서는 우편사업의 적자를 당연시하고 아예 적자 예산을 편성하고 일반회계에서 과감하게 보조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적자의 가장 큰 요인은 우편사업이 안고 있는 낮은 생산성이라 할 수 있었다. 우편사업은 노동집약적인 사업으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아 비용을 절감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인건비는 매년 상승하고 있어 우편사업의 경영 적자는 해마다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우리나라의 경우, 우편사업의 경영 적자가 불가피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에 비해 우편물량이 적었다.
그 사실은 각국의 국민 1인당 우편물 이용량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1981년을 예로 들면, 미국이 542통, 프랑스가 247통, 일본이 127통, 대만이 59통인데, 한국은 29통에 불과했다. 그처럼 미국의 20분의 1에 불과했고, 우리와 여건이 비슷한 대만과 비교해도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산업사회에 늦게 진입한 탓도 있었으나, 근본적인 이유는 편지를 적게 쓰고 우편물을 적게 이용하는 국민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3년안에
흑자
1조원을
내겠다
우리나라만의 이유는 또 있었다. 우편사업은 오랫동안 금융사업과 총괄하여 우정사업이라 불렸고, 우정사업은 다시 전기통신사업과 총괄하여 체신사업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다 보니 양자 간의 회계를 분리하여 정확한 원가계산을 하지 않았다. 예를들어, 우정사업과 전신전화사업을 같이 운영하는 우체국에서는 우체국장의 월급을 우정사업에서 지급했다. 그와 같은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정확한 원가계산을 하게 되면 우정사업의 적자 규모가 어떻게 달라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전신전화사업의 예산 규모가 우정사업보다 10배 이상 많았다.
우정사업에서 상당한 액수의 적자가 난다 해도 전체 체신사업에서 보면 새 발의 피였다.
우정사업의 적자를 해소하려면 우편요금을 대폭 올려야 하는데, 체신부 간부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편요금 10원을 올리는 것보다 전화 도수료 1원을 올리는 것이 훨씬 실리적이었다. 체신부 간부들이 우정사업의 적자 해소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처럼 우편사업의 경영 적자는 당연시되고 있었는데, 1998년 느닷없이 우편사업이 흑자를 달성했다 하여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그것도 정보통신 전문가로 알려진 사람이 우정국장이 되면서 이룩한 흑자여서 더욱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1998년 6월, 정보통신부 핵심 간부들의 인사를 마친 장관 배순훈이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새로운 임명된 실장과 국장들이 돌아가며 포부를 피력했다. 우정국장 석호익의 차례가 되었다. “금년 중으로 우편사업의 흑자를 달성하여 흑자 원년을 만들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회의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든 간부의 시선이 석호익에게 집중되었다.
“무슨 수로 흑자를 내죠?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나요?” 배순훈이 물었다. “지출은 줄이고 수입을 늘리면 됩니다.” 석호익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팽팽하던 고무줄이 끊어지듯 회의장을 감싸고 있는 긴장감이 풀리며 회의장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에 참석자들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정보화기획실 정보기반심의관으로 일하고 있던 석호익이 우정국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본인의 희망에 의한 것이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탱크주의’로 유명한 배순훈이 정보통신부장관이 되자 그는 장관을 찾아가 우정국장으로 일하게 해 달라고 청했다. 우정국장 자리가 탐나서가 아니었다. 그동안 정보통신 분야에 오래도록 근무하며 그 분야에서 핵심적인 업무를 맡아 왔던 그는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청와대 사직동팀이며 대검 중수부에 불려다니며 조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 사정기관에 흠 잡힐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크게 걱정하진 않았으나,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것이 세상사이기에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때문에 새로운 분야로 자리를 옮겨 기분 전환을 하고 싶어 우정국장 자리를 원했다. 아무튼 한 번 내뱉은 말은 책임지는 것이 그의 성격이었다. 아니, 그는 일벌레였다.
1977년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1979년 6월 체신부 우표보급계장으로 발령받은 이래 그는 일이 무서워 피한 적이 없었다. 1982년 1월 새로 발족한 통신정책국으로 자리를 옮겨 새로운 분야인 정보통신정책을 입안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사무관에서 서기관을 거쳐 이사관으로 승진하는 동안 정보통신 분야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그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했던 것이다. 장관 앞에서 큰소리를 친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 목표를 세웠다. 우편 분야에서 앞으로 3년 안에 흑자 1조 원을 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 돈을 정보화 촉진기금으로 기부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야만 정보통신부를 없앤다는 소문을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에도 정보통신부를 없애네 마네 하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떠돌고 있었다.
그는 먼저 우정국 과장·계장의 인사부터 단행했다. 우정국에서 잔뼈가 굵은 과장 이정길과 이승모를 부이사관으로 승진시키고 행정고시 출신의 젊은 서기관들로 그 자리를 채웠다. 계장 역시 우편 업무에 밝은 인물들로 재구성했다. 그때 우정국에 포진된 면면이 우정기획과장 정경원, 우정개발과장 노영규, 국내우편과장 왕진원, 국제우편과장 김준호, 우표실장 박종석 등이었다. 국내우편과장 왕진원은 기술직이어서 행정직 자리인 국내우편과장에 앉힐 수 없다며 총무처에서 반대했으나, 석호익이 직접 나서 총무처 사람들을 설득했다.
김포공항, 대법원
구내우체국을
폐국하다
우정국 조직이 갖춰지자 부실 우체국을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먼저 국사기획담당인 계장 김익환으로 하여금 전국 우체국의 경영 상태를 정밀히 분석하여 적자가 심한 우체국을 추려 내도록 했다. 그중에서 적자가 심각한 우체국은 폐지하고 그 대신 우편취급소를 설치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폐지 대상이 된 우체국의 명단이 작성되었는데, 그중에는 정말 손을 대기 어려운 우체국이 있었다. 예를 들면, 김포공항이나 대법원, 군부대, 대학에 있는 우체국이었다.
“김포공항이나 대법원 구내우체국까지 없애는 건 아무래도 재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포공항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관문이고 대법원은 우리나라 최고 사법기관 아닙니까.
그런 곳에 우체국이 없으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실무를 맡고 있는 계장 김익환이 난색을 보였다. “우리는 우체국 설치 여부를 담당하는 공무원입니다. 국제 관문국이나 최고 사법기관에 우체국을 계속 설치해야 하느냐 마느냐는 것은 그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에서 판단할 일이지 우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면 국민에게 편리한 우편 서비스를 최대한 경제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아 우체국을 신·개축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일단 문서를 보내 그들 기관의 반응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석호익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김포공항과 대법원에 공문을 보냈다. 누적된 적자로 말미암아 그들 기관에 설치되어 있는 구내우체국을 폐국할 수밖에 없는데, 폐국해서 안 되는 이유가 있다면 이의신청을 해달라고 통고했다. 우정국 측의 염려와는 달리 그들 기관에서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덕분에 두 곳의 구내우체국을 폐지하고, 그 대신 우편취급소를 설치했다.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적자 우체국의 정리 작업에 돌입했다. 저항이 생각보다 거셌다. 지역구를 돌봐야 하는 국회의원이나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언론인, 그 밖에 힘 있는 사람들을 통해 정리 대상으로 선정된 우체국을 살리라는 압력이 수시로 가해졌다. 수익이 나는 몇 개 대학을 제외하고 모든 대학의 우체국의 문을 닫게 했으므로 대학생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학생들은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우체국의 수호를 공약으로 내세울 만큼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국민의 편익을 도외시한, 행정 편의주의적인 정책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마다 석호익은 단호하게 맞섰다. “어느 것이 정말 국민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편한 거로만
따진다면 골목마다, 아니 아예 집집마다 우체국이 있으면 더 좋겠죠. 그러나 그 비용은 누가 부담합니까. 결국 국민이 내는 세금 아닙니까.”
군부대 내에 있는 군사우체국도 상당수 정리했다. 문민정부를 거쳐 ‘국민의 정부’가 열렸으나 군의 기세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군에서도 당연히 반발이 있었다. 그들의 주장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군인이라는 신분은 일반인처럼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기에 부대 안의 우체국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서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일반 주민들이 부대 내의 우체국을
이용할 수 있게 한다면 존치시키겠다고 했다. 군인뿐만 아니라 일반 주민들도 우체국의 혜택을 같이 누리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의 제안에 동의한 군사우체국은 존치시켰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 원칙대로 문을 닫게 했다. 그러나 전혀 예외를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면 단위로 따져 우체국이 하나밖에 없는 경우 적자가 나더라도 존치시켰다. 국민의 복지가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 해 연말까지 정리한 우체국이 83개국에 이르렀다. 반년밖에 안 된, 짧은 기간에 그처럼 엄청난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 그만큼 적자의 규모가 축소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 엄청난 작업을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전광석화로 단행했기에 잡음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우편 매출
1조원
시대를
개막하다
예산 절감은 우체국의 감축만으로 끝날 수 없었다. 불필요한 예산은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또 하나의 절감 방안이었다. 그러나 공무원사회에서는 일단 책정된 예산은 반드시 그 해에 사용함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다음 해의 예산이 그 해에 사용된 예산을 기준으로 책정되므로 책정된 예산을 남기게 되면 다음 해 예산이 그만큼 줄어들었다. 때문에 공무원사회에서는 그 해에 책정된 예산은 좀처럼 남기지 않고 써 버리는 관행이 있었다.
그는 체신청장들을 모아 놓고 예산 집행을 신중히 하도록 당부했다. 특히 연말에 남게 되는 예산을 집행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 이유로 ‘제로베이스 예산’을 내세웠다.
제로베이스 예산이란 모든 예산 항목에 대해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고, 매년 제로에서 시작하여 다음 해 예산을 다시 편성하는 것이었다. 이듬해부터 제로베이스 예산을 편성할 것이며, 전년도에 예산을 아낀 체신청에는 예산을 우선적으로 책정해 주겠다고 공언했다. 또한 경영 평가에도 반영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해서 상당한 액수의 예산을 절감할 수 있었다.
예산 절감에 이어 그가 추진한 사업이 우체국 창구의 재배치였다. 과거에는 우체국 창구의 절반 이상을 우체국 직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도 뒷자리에 있는 과장이나 계장이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고객들이 편안히 앉아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이 그만큼 줄어들었다. 서비스기관인 우체국이 그처럼 권위적이고 딱딱한 일반 관청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도 대표적인 우체국인 광화문우체국을 지목하여 개혁을 요구했다.
광화문우체국 창구 역시 뒷자리에 있는 과장과 계장이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 고객들이 사용할 수 있는 휴식 공간이 없다시피 했다. 그처럼 직원 중심으로 배치된 창구를 이용자 중심으로 다시 배치하도록 했다. 동시에 넓어진 창구 공간에 민간인 편의점을 유치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손님들이 가장 많이 찾는 물건을 판매하도록 했다.
우체국 안에 민간인이 운영하는 편의점을 설치한다는 것은 완전히 상식을 깨뜨리는 발상이었다. 체신청과 현업의 반발이 심했다.
관공서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일이라며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서울체신청장 이재선이 예산이 확보되면 내년 초에 개조 작업을 하겠다며 미루려 했다. 석호익은 당장 작업에 착수하되 1개월 안에 완료하라고 응수했다. 이튿날 그는 간부회의에서 광화문우체국을 폐국하겠다고 선언했다. 광화문우체국을 폐국하면 종로에 작은 우체국을 여러 개 세울 수 있다며, 정말 그렇게 할 것처럼 말했다. 이튿날 이재선이 찾아왔다. 한 달 내에 작업을 완료하겠다며 광화문우체국을 없앨 생각은 하지 말라고 설득하려 했다. 물론 석호익은 광화문우체국을 폐국할 생각은 하고 있지 않았다.
상식을 깨는 일은 또 있었다. 그는 편지봉투 뒷면에 광고를 넣도록 하고 돈을 받기로 했다. 또한 우체국 창구에서 편지봉투나 도서 상품권, 소포 상자 등도 판매하도록 했다.
국제특급우편이나 국제소포처럼 수익성이 높은 상품에 대하여는 적극적인 마케팅 활동을 전개하여 방문접수도 하기로 했다.
그처럼 돈벌이가 될 수 있는 상품은 뭐든지 우체국에서 취급하도록 했다. 늘어나는 업무로 바쁜 현업 직원들에게 일만 시키지 않았다. 그들에게 보상하는 방안으로 인센티브제도를 도입했다. 인센티브제도를 실시하기 위해 별도의 예산 269억 원을 마련하여 수익성과 생산성, 경영목표 달성 등의 지표를 통해 상위 50%에 해당하는 우체국에 기본급의 50% 내지 150%를 차등적으로 지급했다. 그처럼 예산을 절감하고 수입을 늘리고 직원들을 북돋울 수 있는 방안은 총동원했다. 그 결과는 놀라운 수치로 나타났다. 우편 매출액이 전년도의 9,971억 원에서 1조 59억 원으로 뛰어올랐다. 반면에 지출은 9,987억 원으로 전년도에 비해 349억 원이 줄어들었다. 그 결과 72억 원의 흑자를 올릴 수 있었다.
1998년은 우리나라가 IMF 외환위기를 겪고 있는 시기로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5.7%를 기록한 해여서 기업 활동이 위축됨에 따라 우편물량이 전년 대비 8.4%나 감소했다. 그런 여건에서 우정 100여 년의 역사상 첫 우편 매출 1조원을 달성했고, 더욱이 2,000여 명의 명예퇴직수당금을 지급했음에도 우편사업에서 흑자를 달성했다는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그 해 연말 국내의 주요 일간지는 그 사건을 ‘115년 만에 우편사업 첫 흑자 기록!’, ‘우편 매출 1조원시대의 개막’ 등의 제목으로 크게 보도했다.